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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제발 좀 망하세요 (35)화 (35/130)

35화

퇴근하자마자 찾길래 갔더니 이게 무슨 말이람.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따로 없다.

내 복수를 눈치채고 미연에 방지하려는 의도는 절대 아니다. 뼈아픈 이야기지만, 그간의 숱한 복수 실패로 나는 영지를 끔찍이 아끼는 관리인이 되어 있었다.

그런 사람이 일부러 작물을 망칠 거라고 생각하진 못할…….

‘그거구나!’

내 평판이 너무 좋아진 탓이야!

죽기 전에는 주민들이 나를 별로 안 좋아했으니까. 라이오넬도 나를 신뢰하지 않았고.

그런데 복수를 망치다 못해 역효과가 나게 했으니. 사람들의 신뢰는 물론 평판까지 좋아진 것이다.

이걸 기뻐해야 하나?

괜히 입술만 삐죽이는데 라이오넬이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벼를 위해 새벽까지 공부하던 것 아닌가?”

그 이국의 작물 이름이 비어? 비요? 그런 건가 보다. 발음하기 엄청 힘드네.

“물론 그런 게 맞긴 한데…….”

재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썩히기 위해서 공부한 건데요.

사실 공부를 했다고 하기도 뭐했다.

아직 잎만 보고는 감자랑 고구마도 구분 못 한다고!

“조금 부담스러워요.”

게다가 뿌리를 썩힐 건데 내가 책임자로 있어 봐. 실패한 거 독박 쓸 거 아니야. 물론 내가 망칠 거니까 억울할 건 없지만!

노후 자금을 모을 동안은 여기서 버틸 생각인데 절대 안 되지. 실패하면 쫓겨날 테니까.

심지어 큰 손해를 입히고 쫓겨난다면 추천장도 없을 테니 다른 곳에 취직하기도 어려워진다.

‘앗! 설마 원하는 게 그건가?’

당연히 아니겠지. 나한테 무슨 악감정이 있다고……. 있, 있나?

라이오넬을 빤히 바라보자 그가 입을 열었다.

“부담스러워할 필요 없다. 이제껏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으니까.”

맞다. 되면 좋고 안 되도 그만이었지!

왜 이걸 잊고 있었담?

저번 책임자도 결국 재배에 성공하지 않았지만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왜냐면 죽는 게 당연한 식물이니까!

그렇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책임질 게 없다면 밭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위치가 낫지.

“할게요! 맡겨만 주세요.”

“갑자기 의욕적이군.”

“네!”

라이오넬이 묘한 비음을 내며 나를 보다가 집사를 향해 손을 까딱였다.

“지도.”

“여기 있습니다, 각하.”

그가 책상 위에 지도를 펼쳐 두며 물었다.

“어느 위치가 적당하다고 생각하지?”

이미 정해 둔 곳이 있으면서 왜 묻는담.

나는 손가락을 들어 라이오넬이 봐 뒀다던 땅을 가리켰다.

“나와 의견이 일치하는군.”

내가 리지에게 라이오넬이 고른 땅을 들었을 때 한 생각이다.

어쩜 내 의도와 이렇게 잘 맞는 땅을 골라 줬는지!

“신기해요.”

“신기할 것까지야.”

라이오넬이 괜히 지도를 쳐다보며 나에게 핀잔을 주었다.

“그래도 우리 생각이 일치하는 경우는 거의 없잖아요.”

“우리?”

앗, 우리라니! 복수 대상에게.

고개를 돌려 방정맞은 입술에게 찰싹찰싹 벌을 주고 몸을 바로 했다.

“죄송합니다, 공작님.”

“별로. 상관없다.”

그래도 복수 대상에게 우리라고 하는 건 기만이니까.

“앞으로 안 그럴 거예요.”

라이오넬의 왼쪽 눈썹이 까딱거렸다.

또 뭐가 마음에 안 들었나 싶었는데 목소리는 의외로 무던했다.

“……그러든지.”

“그럼 내일 바로 시작할까요?”

“그래.”

당분간 좀 바빠지겠지만 어쩔 수 없지!

“열심히 할게요.”

복수를!

* * *

새로운 복수를 시작하는 날이다.

꽈당이에게 좋은 기운을 받고 경작지로 나가기 위해 마차가 모여 있는 곳으로 갔다.

그러다 마차로 향하는 프레르를 발견했다.

“프레르!”

내 목소리에 프레르가 뒤를 돌아봤다. 그는 나를 보고는 잠시 당황하는 듯하더니 이내 손을 흔들었다.

“넬리 님.”

“어디 가나 봐요?”

“잠깐 고향에 좀 다녀오려고요.”

“고향이요? 갑자기?”

“네.”

그러고 혹시라도 이유를 덧붙일까 싶었는데 별다른 말이 없었다. 아무래도 개인적인 일인가보다.

괜히 캐묻지 않는 게 낫겠다 싶어 말을 돌렸다.

“가면 언제 와요? 영영 가는 건 아니죠?”

“일주일 조금 더 걸릴 거예요.”

프레르가 멍하니 대답했다.

“그래요. 조심히 잘 다녀와요.”

“넬리 님도 몸조심하세요.”

“프레르도요!”

손을 흔들고 프레르와 헤어진 뒤 관리소에 들렀다가 바로 밭으로 갔다.

시범적으로 경작하는 것이어서 그런지 밭의 규모는 크지 않았다.

그게 더 마음에 들었다. 더 빠르고 효과적으로 죽일 수 있을 테니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사람들에게 인사를 했다.

가장 연장자인 칼슨 아저씨가 곡괭이를 들고 다가왔다.

“관리인님. 일단 땅은 다 갈아 놨습니다.”

“좋아요. 그런데 이 작물은 조금 다른 방법으로 키워 볼 거라서요.”

“어떤 방법으로 말입니까?”

“일단 주변 땅하고 높이 차이가 있어야 해요.”

“밭을 옆 땅보다 더 높게 만들까요?”

“아니요. 더 낮게요. 얕은 상자 모양으로 만들어 주세요.”

그래야 물을 끌어왔을 때 밭이 완전히 잠기지!

“알겠습니다, 관리인님.”

칼슨 아저씨가 밭으로 돌아가 다른 사람들에게 내 말을 전했다. 밭은 내 요청대로 착실히 낮아지고 있었다.

귀한 작물을 키우는 분들이니까 귀한 대접을 받아야겠지?

이참에 고기를 잔뜩 사서 뿌려야겠다. 물론 라이오넬 돈으로!

“흐흐흐.”

“그렇게 웃는 걸 보니 안심이-”

“으악, 깜짝이야!”

“-되는군.”

라이오넬이 말을 끝맺으며 넘어지려는 내 팔뚝을 잡아 주었다.

나는 놀란 심장에 손을 얹고 깊게 심호흡했다.

“아레트세요?”

“무슨 의미지?”

라이오넬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소리 소문 없이 다니시잖아요.”

“흠.”

저 비음은 분명 시답지 않은 소리라는 뜻이다.

하여간 유머를 모른다니까.

속으로 투덜거리며 밭을 봤다.

잠깐, 근데 이거 라이오넬한테 들켜도 되나? 다른 밭하고는 모양이 조금 다를 텐데?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라이오넬을 힐끔거렸다. 그러다가 눈이 마주쳤다.

“넬리 페퍼.”

“에, 예?”

들켰나? 왜 이렇게 했냐고 물어보겠지? 그러면 뭐라고 변명하지?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요즘 목장지기가 그대 주변을 자주 맴돈다던데.”

“예?”

이건 또 무슨 뜬금없는 소리람.

최근 로만 씨와 얼마나 자주 마주쳤는지를 떠올려 봤다.

음……. 정정한다. 마주쳤다고 표현하긴 힘들었다. 왜냐면 보통 먼 곳에서 일방적으로 나를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그렇네요.”

“자주 만나나?”

“로만 씨랑요?”

“그래.”

“아니요.”

“흠…….”

“의심하는 거예요? 제가 뭐, 로만 씨와 짜고 첩보 활동이라도 하고 있을까 봐요?”

“설마. 그랬다면 그대에게 벼를 맡기지도 않았겠지.”

뭐? 지금 내가 뭘 들은 거지?

그건 나를 믿는다는 건가? 나를 믿어서 이 비어인가 비요인가 하는 걸 맡긴 거야?

저절로 눈이 크게 떠졌다.

라이오넬을 빤히 응시하자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대를 완전히 신뢰한다는 뜻은 아니야.”

……그럼 그렇지. 차라리 다행이다. 지금 와서 나를 믿느니 어쩌느니 하면 괜히 마음 약해졌을 것이다.

잊지 말자, 넬리 페퍼.

휴가 좀 보내 달라고 울부짖던 나날들을 잊으면 안 돼. 죽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절대, 잊으면 안 돼.

속으로 끔찍했던 과거를 되새기는데 라이오넬이 내 쪽으로 돌아섰다.

“표정이 왜 그러지?”

이제 내 표정에도 관심을 가져 주시나? 아주 영광이네.

삐딱하게 생각하며 고집스럽게 정면을 쳐다봤다.

“제 표정이 어떤데요?”

“실망스러워 보이는군.”

실망은 무슨. 복수심에 불타고 있는 거겠지!

“잘못 보셨어요.”

라이오넬의 말 때문인지 목소리가 약간 실망스럽게 들렸다.

진짜, 괜한 말을 해 가지고는.

라이오넬을 힐끗 노려봤다. 그는 고개를 돌려 밭을 보고 있었다.

재수 없어, 정말.

내 시선을 느꼈는지 라이오넬이 나를 쳐다봤다.

이상하게 그와 함께 있는 게 불편했다. 아니, 이상할 것도 없다. 언제부터 막역한 사이였다고.

“저는 관리소에 갔다 와야 할 것 같은데, 공작님은…….”

“나도 돌아가지.”

라이오넬이 몸을 돌렸다.

먼발치에 있는 나무 한 곳에 말 한 마리가 묶여 있었다.

그는 나무에 매어 놓은 고삐를 풀고 말에 올라탔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마음 같아서는 딴청을 피우고 싶었으나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제야 라이오넬이 경작지를 떠났다.

“칼슨 아저씨!”

큰 소리로 부르자 칼슨 아저씨가 허리를 세워 나를 봤다.

“저 관리소에 좀 갔다 올게요!”

“예에, 다녀오십쇼!”

나는 아저씨에게 손을 흔들다가 라이오넬이 완전히 사라진 걸 확인했다. 그리고 입가에 손을 모아 크게 소리쳤다.

“씨앗 좀 빽빽하게 심어 주세요!”

“이미 충분히 빽빽한데요?”

“더요! 다른 작물보다 한, 서너 배 빽빽하게요!”

“그러면 식물이 죽을 겁니다!”

역시 책에서 본 게 맞나 보다. 그리고 그게 내가 바라는 것이다.

뿌리가 자랄 공간이 없어서 죽는 것!

수로가 실패할지도 모르니까 대비책 하나는 마련해 두는 게 낫겠지?

“괜찮으니까 그렇게 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좋아. 나중에 라이오넬이 왜 그랬냐고 물어보면 대충 둘러대야지.

“흐흐흐. 저 진짜 다녀올게요! 천막에서 쉬면서 천천히 하고 계세요, 다들!”

사람들이 다녀오라고 인사하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다들 의욕이 넘치는 표정이었다.

“진짜 쉬면서 하셔야 해요!”

거듭 강조했지만 다들 귀담아듣진 않는 것 같았다. 가능하면 발아도 하지 못하게 씨앗 채로 썩히고 싶은데.

아쉬운 숨을 내쉬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사무실로 돌아와 문을 걸어 잠갔다.

지도를 꺼내 책상 위에 펼쳐 놓고 밭 위치를 표시했다.

‘수로를 어떻게 뚫어야 할까?’

지도에 모양을 잡으며 고민하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라 지도를 마구 말며 소리쳤다.

“잠시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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