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프레르의 무지막지한 힘에 끌려가서 창고 문을 열었다. 그는 나를 내버려 두고 안으로 들어가 약초를 들고 어디론가 달려갔다.
조금 따라가다가 포기했다.
도무지 따라갈 수 있는 속도가 아니었다.
‘괜히 뛰었어.’
숨을 헐떡이고 있는데 창고 근처에 사는 아주머니가 보였다.
무릎을 짚고 숨을 고르다가 아주머니를 붙잡았다.
“늑대가 나타났다고 들었는데 혹시 어디에서 봤는지 아세요?”
“알죠, 그럼. 난리인데. 서쪽에 숲 경계에서 갑자기 나타났다고 하더라고요.”
“감사합니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가끔 무릎이 꺾이긴 했지만 못 걸을 정도는 아니었다.
힘겹게 걸어 민가 사이를 지났다.
사람들은 한곳에 모여 있었는데, 그 중앙에서 프레르가 능숙하게 치료하는 게 보였다.
주변에는 당나귀 발굽보다 조금 작은 갯과 동물의 발자국들이 어지럽게 찍혀 있었다.
늑대와 마주쳤을 걸 상상하자 등골이 오싹했다. 소름이 돋은 팔을 문지르고 있는데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커다란 말에 올라탄 라이오넬이 보였다.
“공작님?”
내 목소리에 영지민들이 고개를 돌렸다.
그들은 나를 보고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가 라이오넬을 발견하고는 사색이 되었다. 그리고 저마다 모자를 벗거나 옷을 단정히 하고 고개를 숙였다.
차갑고 새빨간 눈동자가 사람들과 주변을 훑었다.
숨을 들이마신 라이오넬이 미세하게 미간을 찌푸리더니 천천히 주변을 거닐었다.
눈을 내리깔고 간혹 숨을 깊게 들이마시는 모습이 어쩐지 심상치 않았다.
“왜 그러세요?”
라이오넬이 근처에 왔을 때 묻자 그가 말에서 내렸다.
“고기 냄새가 심하게 나는군.”
고기 냄새? 코를 킁킁거리며 허공에 떠 있는 냄새를 맡았다.
그러고 보니 탄내와 고기 냄새 같은 게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설마, 이 냄새 때문에 늑대들이 마을로 내려온 건가?
‘그래도 보통 사람을 공격하진 않을 텐데.’
고개를 기울이자마자 한 남자가 툭 튀어나와 무릎을 꿇었다.
헝겊 인형 4인방의 부모님 중 한 분인, 칼슨 아저씨였다.
“죄송합니다!”
라이오넬이 그의 앞에 섰다.
광물처럼 차가운 눈동자가 칼슨 아저씨를 고압적으로 내려 보았다.
그러다가 주변을 훑었다. 허술한 나무 울타리 너머에 흙으로 급조한 화덕 하나가 보였다.
그 위에는 오리와 닭 여러 마리가 통으로 올라가 있었다.
불은 꺼져 있었지만 고기가 다 익은 거로 봐서 꽤 오래 조리한 모양이었다.
“개인 화덕에서 조리하는 건…….”
“불법이지.”
라이오넬이 내 말을 대신 끝맺어 줬다.
나는 힐끗 그를 보았다. 그는 여전히 아저씨를 내려 보고 있었다.
“공용 화덕이 있을 텐데.”
고저 없는 목소리가 오히려 더 위압적으로 느껴졌다.
아저씨는 몸을 벌벌 떨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자 라이오넬이 제 뒤에 서 있는 기사들에게 말했다.
“끌고 와.”
기사들이 말에서 내려 아저씨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사람들 사이에 서 계시던 할머니 한 분이 다급하게 뛰쳐나왔다.
“안 됩니다, 공작님!”
허리가 다 굽은 할머니가 라이오넬의 바짓단에 매달리려 했다. 그러자 칼슨 아저씨가 할머니의 허리를 잡아 세웠다.
“어머니! 그러지 마세요!”
어머니라는 단어에 저절로 시선이 갔다. 할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라이오넬에게 빌었다.
“제 아들이 잘못한 게 있다면 다 못 가르친 이 늙은이 탓입니다. 벌하려면 저를 벌하세요.”
“어머니!”
칼슨 아저씨는 마흔이 훌쩍 넘은 건장한 중년 남성이다. 반면에 할머니는 넘어지기만 해도 크게 다치실 것처럼 작고 연약해 보였다.
도대체 어떤 벌을 받길래 노쇠한 몸으로 감싸려는 걸까?
떠올려 보려고 했으나 칼슨 아저씨가 어떤 처벌을 받을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내 주 업무는 관리고 판결은 오직 라이오넬이, 조사와 재판 진행은 레반스가, 집행은 아레트가 했다.
내가 아는 것은 광장과 선술집을 돌아다니며 정보를 모을 때 주워들은 게 다였다.
‘그때는 어땠지? 어디를 잘랐나? 아니면 광장 기둥 같은 곳에 묶어서 방치하던가? 지하 감옥에 가뒀던가?’
뭐든 끔찍하다. 눈을 질끈 감았다 떴지만 여전히 할머니는 칼슨 아저씨를 지키려 하고 있었다.
저렇게 다 큰 아들을, 마치 어린아이 감싸듯이 말이다.
‘원래 부모님은 다 저런가?’
내 부모님을 떠올려 보려고 해도 기억은 희미했다. 아버지는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어머니는 자신의 인생을 위해 나를 버렸다.
눈을 감으면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나를 차갑게 바라보던 어머니의 초록색 눈동자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고작 열 살이었을 때도, 나는 보호받았던 적이 없었다.
‘그녀가 할머니 같았다면 나도 돌아갈 집이 있었을까?’
직업은 있었지만 집은 없었다. 언제나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녔다. 그녀가 칼슨 아저씨의 어머니처럼 나를 아꼈다면 외로움도 없었을 텐데.
질투와 서러움으로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렇다고 못 가진 것을 망치고 싶다는 파괴적인 충동이 드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했던 저 관계가 내 눈앞에서 상처받지 않았으면 했다.
나는 할머니 앞을 막아섰다.
“이야기라도 들어 보시는 게 어떨까요?”
라이오넬이 내게 다가와 손을 뻗었다. 손끝이 가볍게 눈가를 훑고 지나갔다.
“가볍게 처벌할 생각이니 그런 표정 하지 마.”
내가 무슨 표정을 하고 있는지 몰라 눈만 깜빡이는데 그가 기사들에게 눈짓했다.
기사들이 칼슨 아저씨의 양팔을 붙잡았다. 안절부절못하며 서 있는데 라이오넬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넌지시 물었다.
“따라오겠나?”
“정말요?”
보통 재판장에는 아무도 안 들이는데. 갑자기 무슨 바람이지? 빤히 바라보자 라이오넬이 대수롭지 않은 어조로 말을 툭 던졌다.
“변호라도 해 주던지.”
“네! 할게요.”
라이오넬이 나를 빤히 보다 또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라도 마음을 바꿀까 봐 냉큼 옷자락을 붙잡았다. 그는 팔을 당겨 잡힌 옷자락을 빼내고 말 옆에 섰다.
“이리 와.”
일단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할머니의 주름지고 거친 손을 꼭 잡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관리인님. 내 아들 좀 잘 부탁해요.”
울먹이는 목소리에 겨우 고개를 끄덕이고 라이오넬에게로 갔다. 말 옆에 서자 그가 내 허리를 양손으로 붙잡았다.
나도 모르게 숨을 훅 들이마시는데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어깨.”
“어깰 뭘, 으악!”
예고도 없이 몸이 붕 떴다. 덕분에 비명을 지르며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너무 놀란 탓에 다른 감정들이 달아나 버렸다.
발 디딜 곳이 없어 무서웠다. 의지할 곳이라고는 라이오넬의 어깨밖에 없어 꽉 움켜쥐었다.
“허리를 펴, 넬리 페퍼.”
벌벌 떨면서 허리를 펴자 라이오넬이 내 뒤에 올라탔다.
“무서우면 눈 감고 있도록 해.”
고개를 끄덕이고 눈을 질끈 감았다.
말이 걷는 게 느껴졌다.
높은 곳에서 흔들리는 게 무서워 나도 모르게 라이오넬 쪽으로 바짝 붙었다.
정수리 위에서 불편함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라이오넬이 몸을 뒤로 뺐다.
뭐야, 어디 가, 무서워 죽겠는데!
손에 잡히는 걸 아무렇게나 움켜쥐자 속도가 더 느려졌다.
“멱살 좀 놓지.”
눈을 뜨니 손아귀에 라이오넬의 옷깃이 붙잡혀 있었다.
“죄송해요.”
“차라리 허리를, 아니. 이게 낫겠군. 그냥 잡고 있어.”
“멱살을요?”
“그래.”
“혹시 그런 취향……, 으악!”
라이오넬이 무자비하게 고삐를 흔들어 속도를 높였다.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한참을 달리다가 말이 멈추고 나서야 슬슬 걱정스러웠다.
“목 괜찮아요?”
조금은 괜찮지 않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서 물었다. 하지만 내 바람이 무색하게도 라이오넬은 멀쩡했다.
그는 가볍게 코웃음 치고 말을 멈췄다. 그리고 먼저 말에서 내려 내게 손을 뻗었다.
허리로 오는 손을 잡아 세우고 눈을 질끈 감은 채 뛰어내렸다. 다리가 땅에 닿자마자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라이오넬이 전혀 감탄스럽지 않은 목소리로 감탄했다.
“아주 용감해졌군.”
“놀리지 마세요.”
그가 피식 웃고는 영주관으로 들어갔다.
라이오넬이 응접실에 들어서자 집사님이 차를 가져왔다. 멀뚱히 서 있는데 라이오넬이 자리를 권했다.
“앉지.”
주춤주춤 자리에 앉으며 홀이 있는 쪽을 쳐다봤다.
“바로 벌을 내리는 게 아닌가요?”
“절차대로 진행해. 레반스가 먼저 조사할 거다.”
“조, 사요……?”
머릿속에 소문으로만 들었던 온갖 고문들이 스쳐 지나갔다.
차를 마시려다 말고 굳어 있자 라이오넬이 작게 웃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뻔히 보이는군. 고문은 하지 않아.”
“그럼 뭘 하는데요?”
“흠…….”
라이오넬이 묘한 비음을 내며 다리를 꼬았다. 그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만 마셨다.
뭐야. 왜 사람 궁금하게 해!
정말 고문 안 하는 거 맞나? 사실 고문도 하는데 그냥 안 한다고 말한 거 아니야?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는데 집사님이 문을 두드렸다.
“주인님. 준비를 끝냈습니다.”
라이오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나에게 눈짓하고 먼저 걸음을 옮겼다.
홀과 연결된 문을 열자 무릎을 꿇고 있는 아저씨가 보였다.
표정은 좋지 않았지만 핏자국은 없었다.
‘다행이다.’
라이오넬은 왜 아무 말도 안 해서 의심하게 만들고 그런담.
괜히 민망해 칼슨 아저씨를 봤다.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로 웃어 보였는데, 아저씨가 내 눈을 피했다.
‘왜 그러지?’
눈을 깜빡이다가 고개를 돌렸다.
라이오넬의 왼편에 레반스와 아레트가 나란히 서 있었다. 두 사람의 표정을 살폈지만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아레트는 여전히 석상 같았고, 레반스는 능청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두 사람한테 뭐라도 좀 물어볼까? 상황을 자세하게 알아야 변호도 할 수 있으니까.
의자 뒤로 살금살금 건너가면 모를 것 같은데…….
그러나 발을 떼기도 전에 라이오넬이 입을 열었다.
“왜 법을 어겼는지 들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