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관리인님, 안녕하세요. 그냥 신기해서 구경하고 있었어요.”
“신기해요? 뭐가요?”
다가가자 사람들이 길을 비켜 주었다. 그 자리에 가 보니 벽 근처 잔디가 둥그런 모양으로 죽어 있었다.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니 하녀 한 명이 말을 걸었다.
“신기하죠? 어떻게 딱 저 부분만 누렇게 죽었대요.”
“그러게요. 누가 고의로 한 것 처……, 럼?”
아무 생각 없이 중얼거리다가 말을 잘못 꺼냈다는 걸 깨달았다. 나였다. ‘누가 고의로 한 것’의 ‘누구’가 바로 나였다!
내가 어제 아침에 저 자리에 식물용 독을 버렸다.
‘효과가 있긴 있구나.’
새삼 감탄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정신 차려야 해, 넬리 페퍼!
내가 밭에 개수작 하는 걸 리지가 봤잖아.
밭에 뿌리던 게 잔디를 죽인 것과 같은 액체라는 게 발각되면 빈털터리로 쫓겨날지도 모른다.
“누, 누가 노상 방뇨라도 했나 봐요!”
고심해서 한 변명이었지만 아무도 믿지 않는 눈치였다.
“에이. 소변으로는 이렇게 안 되죠.”
하인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독이라도 뿌렸나?”
나도 모르게 숨을 헙 들이마셨다. 입을 꾹 다물고 있는데 하녀가 고개를 저었다.
“그럼 주변에 곤충이나 동물도 죽어 있었겠지.”
“혹시 요정이 앉았다 간 거 아닐까요?”
제일 어린 하인이 눈을 빛내며 나를 돌아봤다.
왜, 왜 날 보니. 혹시 뭘 봤나?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슬쩍 닦으며 시선을 회피했다.
다들 소년의 순수함을 지켜 주고 싶은지 그런 거라고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래. 독을 만들어서 살포한 사람보다는 요정이 낫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별일 아닌 것 같으니까 저는 가 볼게요!”
“네. 관리인님, 들어가세요.”
사람들의 인사를 받으며 재빨리 자리를 피했다.
불안하다. 분명 라이오넬 귀에 들어갈 텐데. 불러서 추궁하면 뭐라 그러지?
……뭐라 그러긴 뭐라 그래. 잡아떼야지.
마음을 다잡고 방에 들렀다가 밖으로 나왔다.
이럴 때 꽈당이라도 쓰다듬으면 좀 안정이 될 텐데.
‘아직 이른 시간이니까 로만 씨도 안 일어났을 거야.’
마차를 세우고 목초지로 향했다. 예상대로 목초지는 조용했다.
나는 살금살금 걸어 당나귀들이 있는 쪽으로 갔다.
한쪽에는 건초 더미가 엄청 쌓여 있었다. 며칠은 안 쓴 것 같았다.
‘애들 먹이를 안 주나?’
에이. 설마. 신선한 풀을 뜯게 해서 저렇게 쌓인 거겠지.
첩자든 아니든 목장지기로 있으면 애들을 잘 먹여야지. 안 그러면 금방 의심을 받을 테니까.
“꽈당아!”
내 목소리에 꽈당이가 번쩍 눈을 떴다. 그리고 과묵한 당나귀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요란한 소리로 울어 댔다.
“쉿! 꽈당아. 조용히 좀 해! 로만 씨 오면 나 쫓겨난단 말이야!”
하지만 꽈당이는 여전히 요란하게 울었다.
하긴. 사람 말을 알아들으면 그게 당나귀겠어? 사람이지.
“당근 줄게. 착하지?”
보따리에서 당근 하나를 꺼내 흔들었다. 그러자 꽈당이가 냉큼 물고 갔다.
역시 챙겨 오길 잘했어. 뿌듯하게 웃고 있는데 옆에 있는 당나귀와 눈이 마주쳤다.
당나귀 입이 씰룩거린다. 당장 울음을 쏟아 낼 것 같아 냉큼 당근을 물려 줬더니 조용해졌다.
그러나 문제는 당나귀가 세 마리나 더 있었다는 것이다.
“끄아악, 끽, 끄아앙, 끽!”
진짜, 이 영악한 당나귀들!
요란스럽게 울어 대는 놈들에 입에 당근을 물려 주었다.
하지만 배가 차지 않았는지 당나귀들은 계속해서 울어 댔다. 하는 수 없이 건초를 주니 머리를 박고 먹기 시작했다.
“너네 굶었니?”
“여기서 뭐 하십니까?”
“으악!”
왜 저렇게 소리도 없이 다니는 거야!
가슴께를 부여잡고 숨을 내쉬는데 로만이 저벅저벅 다가왔다.
괜히 무서워서 당나귀 울타리의 잠금장치를 살짝 풀어 두었다.
“그, 그냥 꽈당이 보러 왔어요.”
로만이 아무 말 없이 나를 쳐다본다.
왜 저렇게 본담. 물론 저번에 오지 말라고 하긴 했지만.
아니, 생각해 보니까 그렇네. 공작 놈 허락 없이 꽈당이만 안 빌리면 되잖아.
보러 오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잖아!
당당하게 허리를 펴고 고개를 치켜들었다.
“안 되나요?”
“안 될 것까지야, 없죠.”
로만이 맹한 목소리로 답하며 몸을 돌렸다.
정말 저게 단가? 저번에는 엄청 칼 같았던 거 같은데. 지금은 정반대였다.
“자주 오셔도 됩니다.”
오히려 오길 바라는 눈치였다.
내가 그런 거에 넘어갈 줄…….
“벡시아드리아 라렐리우스를 빌려 가시는 것도 눈감아 드리겠습니다.”
“자주 올게요!”
“그럼 그 기념으로 안에서 차라도 드시고 가십시오.”
그건 좀, 너무 수상한데.
달리는 말 위에서 공중제비 돌면서 봐도 목적이 있는 초대였다.
“저번처럼 공작님에 대해 물으시려고요?”
로만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하지만 부정하지 않았다.
“제가 공작님께 관심이 많습니다.”
원래 첩자들이 이렇게 티 나게 정보를 모으나?
아니면, 혹시 내가 오해했나?
하긴 첩자면 대놓고 비둘기를 날리는 짓은 하지 않겠지. 노골적으로 물어보지도 않을 거고.
근데 그런 게 아니면 왜 라이오넬에게 관심을 가지지? 보통 무서워하던데.
‘설마, 잘생겨서?’
잠시 그의 얼굴을 떠올렸다.
원한 많은 나도 가끔 홀리는데, 원한 없는 로만 씨 눈에는 오죽 잘생겨 보이겠어.
주민들은 라이오넬의 성격을 아니 조금 무서워하고 거리를 뒀다.
하지만 로만 씨는 이제 막 목장지기가 되었으니 라이오넬을 모를 테고, 무서워하지도 않을 것이다.
“혹시 공작님을 사…….”
“존경합니다.”
“사랑…….”
“존경입니다.”
그래. 존경이라고 하자.
하지만 이유가 어찌 됐든 로만 씨와 단둘이 오두막에 있고 싶진 않았다.
불편한 사람과 하하 호호 할 정도로 사교성이 좋은 것도 아니고.
사실 로만 씨의 맹한 표정이 조금 무섭다.
프레르가 잠에서 덜 깬 표정으로 다닌다면, 로만 씨는 뭔가 약에 취한 표정 같았다.
“그런데 저는 출근 시간이 다 되어서요.”
“그럼 일이 끝난 다음에…….”
로만 씨가 끈질기게 굴려는 차에 멀리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로만! 이봐, 로만!”
파우트 씨다! 안 그래도 곤란했던 참인데 잘됐어.
나는 로만 씨 옆을 지나쳐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갔다.
“파우트 씨!”
“관리인님이잖아? 이른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저는 꽈당이 보러 왔어요.”
“꽈당이?”
“네! 소개해 드릴게요.”
파우트 씨를 이끌고 당나귀 울타리 쪽으로 갔다. 로만 씨는 그새 오두막 안으로 들어간 것인지 보이지 않았다.
나는 파우트 씨에게 꽈당이를 소개해 주며 물었다.
“저는 그렇다 치고 파우트 씨는 무슨 일이에요?”
“나야 로만이랑 친목을 다지러 왔지. 로만! 일어나 봐! 같이 아침이나 먹자고!”
목청이 너무 커서 귀가 따가울 정도였다.
당나귀 울음보다 큰 목소리를 차마 무시할 순 없었는지 오두막 문이 열렸다.
짜증스러운 얼굴로 나오는 로만을 힐끗 보다가 까치발을 들어 파우트 씨에게 속삭였다.
“너무 가깝게 지내지 마세요. 공작님에 대해 말하지 마시고요!”
그리고 로만이 나를 붙잡기 전에 뛰듯이 걸어 목초지를 벗어났다.
초대는 거절했지만 일단 꽈당이를 빌리는 건 눈감아 주기로 했으니까 다시 식물 전용 독을 만들어야지!
전부 다 잘 풀리는 기분이야.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관리소로 향했다.
이른 아침부터 밭을 돌보는 주민들과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막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누군가가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는 걸 발견했다.
“관리인님!”
그것도 있는 힘껏 나를 부르면서 말이다!
뭐야. 무슨 일이지? 내가 나쁜 짓 한 게 들키기라도 했나?
그동안 실패했던 복수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건가 보다. 서쪽 탑 외벽 주변의 잔디가 죽어 있던 거!
‘내가 거기에 독을 뿌린 게 들킨 거야.’
어쩌면 그걸 밭에 뿌린 것까지 들킨 걸지도 모른다.
리지는 착하고 똑똑하지만 가끔 눈치가 없으니까!
일단 도망칠 요량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나 제대로 달려 보기도 전에 뒷덜미가 잡혔다.
“왜 도망가세요!”
프레르다. 긴장이 툭, 풀렸다.
라이오넬이 보낸 거면 아마 아레트가 왔겠지.
안심하려는데 프레르의 다급한 목소리가 잡념을 끊어 냈다.
“급한 일이에요. 창고 열쇠 어디 있, 아니다, 그냥 같이 가요.”
그는 내가 뭐라고 하기 전에 다시 무서운 속도로 달렸다. 그러다 100m도 못 가서 멈췄다.
나 때문이었다.
“헉, 허억, 마, 헉, 마차!”
“고작 이 정도 뛴 거 가지고…….”
“급하, 다면서요. 후우, 마차!”
프레르가 고개를 끄덕이고 달려가서 마차를 끌고 왔다.
“타세요!”
헐떡이며 마차에 올라탔다.
진짜 급하긴 했는지 자리에 앉기도 전에 마차가 출발했다.
그 반동에 넘어지듯 의자에 앉았다. 아픈 엉덩이를 문지르며 축 늘어져 있다가 창문을 열고 소리쳤다.
“근데 무슨 일이에요?”
“마을에 늑대가 나타났는데, 누가 물렸어요.”
“마을에 늑대가요?”
사람 사는 곳까지 내려오는 일은 드문데.
아니, 그것보다!
“사람이 물렸다고요? 누가요? 얼마나 다쳤는데요?”
“아주 살짝 물렸어요. 그런데 병이 옮을까 봐요. 깨끗한 물로 씻어 뒀으니까 약초만 제때 쓰면 상관없어요.”
정말 다행이다. 안도의 숨을 내쉬다가 낯선 감각에 머리를 기울였다.
혹시 죽기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나?
기억을 되짚어 보는데 프레르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약초가 필요한데 창고에 있다고 들어서 달려왔어요.”
“……마을에서부터 경작지까지 달려왔다고요?”
사람인가?
물론 프레르의 집은 마을 외곽에 있다. 하지만 관리소와 절대 가깝다고 할 수 없는 거리였다.
달려오는 것까지는 그렇다 쳐도, 호흡이 멀쩡한 건 이상한데.
경악하는 사이 마차가 멈췄다.
내리자마자 창고가 보였다.
“관리인님, 빨리!”
“어? 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