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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제발 좀 망하세요 (30)화 (30/130)

30화

라이오넬한테 말하면 허락해 줄까?

그럴 리가 없지.

깊게 한숨을 내쉬자 집사님이 잠깐 위를 보았다. 그를 따라 고개를 돌리려는데 집사님이 다시 말을 걸었다.

“하지만 서재라면 몰래 열어 드릴 수 있습니다.”

“서재랑 서고랑 다른가요?”

장성한 손녀를 보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집사님이 목소리를 낮췄다.

“서고에는 가계도와 역대 가주님들의 일기나 고대 문헌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서재에는 공작님께서 모은 책들이 다입니다.”

“그럼 서재로 갈게요!”

덩달아 소곤거리며 활짝 웃었다.

집사님이 고개를 끄덕이고 따라오라는 눈빛을 보낸 뒤 앞서 걸었다.

중앙 계단을 올라가 발소리를 죽여 집무실 앞을 지났다. 조금 더 걸어가자 집사님이 걸음을 멈췄다.

열쇠를 고르는 그를 보자 괜히 불안해졌다.

“그런데 이렇게 몰래 열어 주셔도 괜찮은 거예요?”

나중에 라이오넬에게 혼나시진 않겠지?

걱정스럽게 바라보는데 집사님은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이셨다.

하긴. 아무리 라이오넬이라도 자기가 어렸을 때부터 집사로 계셨던 분을 어떻게 하진 않겠지. 고작 서재 열어 준 거로 말이야.

숨을 크게 쉬며 마음을 진정시키는데 집사님이 문고리를 잡으며 물었다.

“그런데 서재는 갑자기 왜 찾으시는 겁니까?”

“아, 제가 명색의 관리인인데 농사에 대해 너무 모르는 것 같아서요. 공부 좀 하려고요.”

“훌륭하시군요.”

……오랜만에 양심이 아프다.

“하하.”

어색하게 웃는데 집사님이 서재 문을 열어 주었다. 내부는 불빛 한 점 없이 어두웠다. 환기를 위한 작은 창 몇 개만 있기 때문에 달빛조차 들지 않았다.

당황한 얼굴로 눈을 깜빡이는데 집사님이 램프를 가져다주었다.

“화재의 위험이 있으니 촛대는 켜지 마십시오. 램프를 사용하실 때도 조심하셔야 합니다.”

“네. 그럴게요.”

“다 보신 뒤에 나가실 땐 저를 찾아 주십시오.”

“네!”

집사님이 가볍게 고갯짓으로 인사한 뒤 서재를 떠났다.

달칵. 문 닫는 소리와 함께 혼자가 되었다.

일단 램프를 들고 한 바퀴를 빙 둘러보았다. 원형으로 된 방 안의 벽은 천장까지 전부 책장으로 되어 있었다.

책장에는 레일로 고정되어 좌우로 움직이는 사다리가 붙어 있었다.

방 한가운데를 차지한 커다란 마호가니 책상은 불곰이 올라가도 끄떡없을 정도로 튼튼해 보였다.

‘책부터 찾아야지!’

돌아다니며 식물에 관한 책은 전부 뽑아 왔다. 책상 위에 쌓아 두니 대충 어린 불곰 크기 정도는 되었다.

역시나 책상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좋아. 늦게까지 공부하고, 복수 계획을 세워야지.’

가져온 책 중에 가장 두꺼운 책을 펼쳤다.

오래된 책 냄새가 풍겼다. 동시에 먼지가 얼굴을 뒤덮었다.

“콜록, 콜록!”

기침을 하며 손을 휘젓고 그 책을 덮었다.

책은 많으니까 다른 거부터 봐야겠다. 비교적 깨끗한 책을 끌어와 제목을 읽었다.

‘식물을 죽이는 확실한 방법.’

제목부터 마음에 쏙 드네!

어쩐지 이번 복수는 예감이 좋다. 작게 흥얼거리며 책을 펼쳐 목차를 살폈다.

1. 식물의 이해-어떤 식물을 키울 것인가?-

2. 식물을 죽이는 화분

3. 식물을 죽이는 흙

4. 식물을 죽이는 빛

5. 식물을 죽이는 물

목차만 봐도 가슴이 설렌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천천히 책을 정독했다.

대충 요약하자면 이렇다.

뿌리가 자랄 충분한 공간이 필요하고, 흙은 질이 좋아야 하고, 빛이 너무 강하거나 안 들면 안 되고, 식물 간의 간격이 너무 좁으면 안 되고, 물이 적거나 많아도 안 된다.

전부 식물을 잘 자라게 하는 방법이었다. 아무래도 제목은 관심을 끌기 위한 반어법인 모양이었다.

그래도 상관없다. 반대로만 하면 되니까!

공작령의 토양은 질이 좋았고, 햇빛은 신이 아닌 이상 어찌할 수 없다.

그렇다면 내가 어쩔 수 있는 건 물과 공간뿐이었다. 씨앗을 구해다가 야밤에 몰래 더 심어야겠다.

‘곡물을 화분에 심는 건 아니지만 씨앗을 빽빽하게 심어 놓으면 뿌리를 내리기 힘들 거야.’

하나만 준비하긴 좀 불안한데.

내용을 유심히 보다가 마음에 드는 부분을 발견했다. 나는 그 대목을 손으로 짚어 가며 여러 번 읽었다.

‘물이 적으면 금세 티가 난다. 그때 물을 보충해 주면 식물은 살아난다. 그러나 물이 과해 죽을 경우, 뿌리부터 썩는다. 티가 났을 때는 이미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인 것이다.’

완벽해!

라이오넬이 작물을 심으면 강에서 물을 끌어다가 밭에 부어 버려야지.

이 두 방법을 마음에 품었다. 그리고 다른 책들도 펼쳤다.

‘혹시라도 작물과 원예용 식물의 재배법이 완전히 다르면 복수에 실패할 테니까. 미연에 방지해야지.’

처음 골랐던 책들과 달리 다른 책들은 전문 용어로 쓰여 있었다. 그래서 어떤 부분은 몇 번이나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도 꿋꿋하게 가져온 책들을 다 읽는데 슬슬 졸음이 쏟아졌다.

‘방으로 돌아가서 자야 하는데…….’

눈꺼풀이 무겁다. 주변을 둘러봤지만 시계는 보이지 않았다.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것 같으니까, 잠깐 눈만 붙였다가 조금만 더 보고 돌아가자.’

책상에 엎드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수마가 덮쳐 왔다.

“흐아암…….”

눈이 감긴다. 책상의 찬 기운이 볼에 스몄다. 빛이 잘 안 드는 곳이라 그런지 약간 쌀쌀했다.

‘담요라도 달라고 해 볼까?’

생각은 떠오르는데 눈이 떠지지 않는다.

‘몰라. 감기 걸리면 그 핑계로 좀 쉬지 뭐.’

막 잠에 빠지려는데 희미하게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묵직하고 정갈한 걸음이 다가온다.

“또 아무 데…… 자다니. 놀랍…… 않군.”

뭐야. 뭐라는 거야.

웅얼거리며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렸다.

이내 부드러운 무언가가 내 몸을 완전히 뒤덮었다. 그러자 쌀쌀한 기운이 완전히 가셨다.

아무래도 집사님이 담요를 가져다주신 모양이었다. 따뜻함에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일어나면 감사하다고 해야지.’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나는 완전히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작은 창으로 보이는 밖은 푸르스름하게 변해 있었다.

램프는 어제 집사님이 들어오셨을 때 끄셨나 보다.

비몽사몽 한 채로 담요를 추슬렀다.

졸음을 떨치기 위해 눈을 깜빡이는데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라이오, 아니, 공작님.”

서재 쓰는 거 들켰다! 놀라서 허둥지둥 일어나는데 라이오넬이 천천히 다가왔다.

뭐지. 혼내려나? 나 혼나나?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살짝 돌렸다. 지나친 긴장에 몸이 저절로 굳는 게 느껴졌다.

“누가 보면 내가 때리는 줄 알겠군.”

코앞에서 라이오넬의 목소리가 들렸다.

살짝 눈을 뜨자 그가 길고 우아한 손을 뻗었다. 그러더니 내가 쌓아 놓은 책 중 하나를 빼내어 갔다. 자연스럽게 책 제목에 눈길이 갔다.

[특수작물 및 희귀작물 경작의 이론과 실제]

어제 읽어 보려다가 한 문장에 모르는 단어가 다섯 개 이상 나와서 포기했던 책이었다.

라이오넬은 아무 말 없이 책을 넘기며 훑어봤다. 그러더니 그대로 몸을 돌렸다.

……서재에 몰래 들어왔는데 그냥 간다고?

혹시 집사님을 혼내려는 거 아니야?

“저기, 공작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라이오넬이 고개를 돌렸다.

“제가 허락도 없이 서재에 들어온 건…….”

“이미 로저에게 들었다.”

몰래 열어 주신다면서요, 집사님!

아니야. 공부 때문에 서재를 쓴다고 해서 말한 거겠지. 라이오넬은 열심히 하는 사람을 싫어하지 않으니까. 의심은 하지만.

이왕 말 나온 김에 자주 와도 되냐고 허락받아야겠다.

나는 최대한 순한 표정을 지으며 공손하게 섰다.

그런데 어쩐지 라이오넬은 인상을 찌푸리며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또 무슨 꿍꿍이지?”

“꿍꿍이라뇨! 그냥 가끔 서재를 사용하고 싶어서요.”

“……그러든지.”

“감사합니다!”

라이오넬은 다시 몸을 돌려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다가 갑자기 몸을 돌렸다.

무슨 일이냐는 듯 쳐다보자 그가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앞으로 광장이나 선술집에서 나오는 말은 보고하지 않아도 된다.”

“영지민들의 동태를 살피지 말라는 뜻인가요?”

“그래.”

이상하다. 이상해. 왜 갑자기 저런 명령을 내리지?

뭐든 알고 있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인데. 일을 늘릴지언정 줄여 줄 사람은 아닌데?!

“정말요?”

“그래.”

혹시 복수 계획이 들켰나?

죽기 얼마 전에야 안 사실이지만 라이오넬은 다른 사람을 통해서도 영지민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내게 그 일을 시킨 의도는 따로 있었다.

혹시라도 내가 첩자거나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아 이상한 보고를 올리면 자르기 위함이었다.

“저를, 자르시려고…….”

“그랬다간 폭동이 일어나겠지.”

“그럼 갑자기 왜 감시를 그만두라고 하시는 거예요?”

“내가 사람들을 억누른다더군.”

“누가 그런…….”

올바른 소리를!

생각이 입 밖으로 튀어 나갈 것 같아 황급히 양손으로 입을 막았다.

“파우트가. 숨이 막힌다던데.”

파우트 씨 할 말 못 할 말 다 하는 성격이구나. 하긴 그러니까 내가 민망해 죽으려고 해도 꿋꿋하게 칭찬하겠지.

그렇지만 멋지다. 덕분에 일이 줄었어!

다음에 만나면 맛있는 거라도 챙겨…….

“그대도 그렇게 생각하나?”

“네! ……니요.”

라이오넬이 싸늘한 붉은 눈으로 나를 빤히 보다가 몸을 돌렸다.

“앗, 죄송해요! 다른 생각 하다가 그만…….”

“그만?”

본심이 나왔다고 어떻게 말해.

어색하게 웃자 라이오넬이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비웃는 건지 장난스러운 건지 모를 모호한 미소였다.

“본심이 나왔다?”

아니면 생각을 읽는 미소인가?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지만 최대한 자연스럽게 부정했다.

“아 아니요! 잘못, 크흠! 대답했다고 말하려 했어요.”

“……그대가 온 뒤로 묘하게 다들 기어오른단 말이야.”

“죄송합니다.”

“됐어.”

그는 별다른 말 없이 서재를 나갔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나는 길게 숨을 내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뭐야. 오늘따라 엄청나게 유하네.

차갑게 쏘아붙일 줄 알았는데. 아니면 선을 긋거나.

‘뭐, 좋은 게 좋은 거지!’

이제 퇴근한 뒤에 괜히 선술집이나 광장을 서성이지 않아도 되겠다.

침대에서 뒹굴거릴 수 있어. 해방이다!

콧노래를 부르며 책을 정리하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서쪽 탑으로 돌아가려는데 외벽 근처에 하녀와 하인 몇 명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게 보였다.

“거기에 모여서 뭐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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