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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제발 좀 망하세요 (29)화 (29/130)

29화

라이오넬이 리지를 보았다.

그녀는 마른침을 꿀꺽 삼킨 뒤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넬리 님께 맡기시는 게 어떨까요?”

“하아…….”

라이오넬이 깊게 한숨을 내쉬자 리지가 움찔거렸다. 그러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말을 덧붙였다.

“중요한 일을 직접 맡겨 주시면 아마 기뻐하실 거예요!”

“업무 보조.”

“네!”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맡은 일에나 집중하도록.”

“네…….”

시무룩해진 리지가 다시 몸을 틀었다.

레반스는 리지의 어깨를 몇 번 다독이고 제 할 일을 했다.

펜촉이 종이 위를 스치는 소리만이 집무실을 가득 채웠다.

리지는 기계와 같은 속도로 계산을 해 나갔다. 그러나 머릿속은 투덜거림으로 가득 찼다.

‘도대체 왜 넬리 님을 못 믿으시는 거야? 넬리 님만큼 다정하고 유능한 사람이 어딨다고.’

그녀는 라이오넬을 못마땅한 눈으로 힐끔거렸다.

‘좋아. 넬리 님이 신임을 얻을 수 있도록 내가 도와드려야지.’

당사자가 알면 손사래 칠 생각을 하며 리지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 모습을 보던 레반스가 미소 띤 얼굴로 말을 걸었다.

“리지 양.”

“네?”

“멀쩡한 서류를 그렇게 구기면 곤란합니다.”

“앗!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잉크를 쏟은 것도…….”

아니라고 말하려던 레반스가 급하게 고개를 꺾었다. 리지가 들고 있던 펜이 레반스가 있던 자리를 꿰뚫고 지나갔다.

‘죽을 뻔했네.’

그는 랑브리(벽 표면에 덧대 놓은 목조 실내장식)에 다트처럼 박힌 펜을 보고 식은땀을 흘렸다.

그리고 자신이 기사였음에 감사하며, 리지의 필기구를 단단하지 않은 것으로 바꿔야겠다고 다짐했다.

* * *

며칠간 꽈당이 얼굴을 못 봤다.

당연하게도 다시 만든 특제 식물 전용 독도 방치된 상태였다.

코르크 마개로 단단하게 막아 두긴 했는데, 더 두었다가는 분명 지독한 냄새를 풍길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희석해서 뿌리지 말걸.’

원액 그대로 뿌렸으면 지금쯤 식물들이 다 죽어 나갔을 텐데. 아쉬워하며 잔디 위에 식물 전용 독을 쏟아부었다. 독을 담아 뒀던 통도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게 몰래 소각장에 버렸다.

터덜터덜 걸어 마차를 타고 이동한 뒤, 다시 터덜터덜 걸어 관리소로 들어갔다.

“아침이에요…….”

힘없이 인사하며 제럴드를 지나쳤다. 그러자 그가 웃는 얼굴로 농담을 걸었다.

“넬리 님. 앞에 ‘좋은’이 빠진 것 같은…….”

천천히 몸을 돌리자 눈이 마주쳤다. 제럴드는 내 얼굴을 보고는 입을 헙 다물었다가 말을 바꿨다.

“아닙니다.”

그의 뒤로 소피가 들어오며 밝게 인사했다.

“넬리 님, 좋은 아침입,”

인사하려는 그녀를 제럴드가 끌고 갔다.

“오늘은 좋은 아침이 아니라 그냥 아침이야.”

“뭐라는……, 아.”

그녀는 내 얼굴을 보더니 금세 수긍했다.

“무슨 일 있으셨나? 좀비가 따로 없네.”

“물어볼까?”

“아냐. 일단 쉬시게 내버려 두자.”

전직 좀비들에게 좀비 소리 들은 게 못내 억울하다.

하지만 뭐라 그럴 기운도 없어 터덜터덜 내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그대로 몸을 숙였다.

이마가 책상 모서리에 닿았다. 다리 옆으로 축 처진 손을 달랑달랑 흔들며 한숨을 내쉬었다.

‘복수가 체질에 안 맞나?’

아니면 과거로 돌아온 이유가 따로 있는 것 아냐?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사사건건 일이 틀어질 순 없어!

애꿎은 책상을 이마로 두드리고 있는데,

“넬리 님! 제가 엄청난 걸 알아 왔어요!”

리지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늘어진 채로 고개만 돌려 리지를 보았다.

나를 발견한 그녀가 양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러다 이내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에게 달려왔다.

“이 소식을 들으면 힘이 날 거예요!”

“뭔데요?”

리지가 문을 닫고 방 안을 두리번거렸다.

엿듣는 사람도 없는데 그녀는 다가와 귓속말로 속닥였다.

“여왕님께서 공작님께 먼 이국땅의 곡물을 맡기셨는데, 이걸 잘 키워 내는 게 엄청 어렵나 봐요.”

……내가 리지에게 복수를 계획하고 있다는 말을 했었나?

몸을 일으키며 놀란 눈으로 리지를 보자 그녀가 활짝 웃으며 내 양손을 붙잡았다.

“넬리 님은 유능하시니까, 그 곡물이 잘 자라도록 관리해 주시면 공작님의 신임을 얻을 수 있을 거예요!”

먼 이국의 곡물? 맞아! 그게 있었지!

저번에 꼭 망쳐야겠다고 종이에도 써 놨으면서 왜 까먹었담?

바보야. 바보!

자책하면서도 광대가 아플 정도로 입꼬리가 치솟았다. 리지의 손을 덥석 잡자 그녀가 나를 따라 활짝 웃었다.

“정말 고마워요. 리지는 천재예요!”

“도움이 되었다니 기뻐요.”

얼굴을 발그레 붉히며 몸을 배배 꼬는 리지를 와락 안아 주었다.

나는 과거로 돌아오기 전 일을 떠올렸다.

여왕은 영지 몇 곳에 이국의 곡물 씨앗을 보냈다. 그러나 성공한 곳은 없었다.

라이오넬마저 수확에는 실패했다. 자라는 속도가 너무 더뎌서 곡식이 익기 전에 겨울이 돼 얼어 죽고 말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다른 영지에 비하면 잘 키운 축에 속했다. 다른 사람들은 싹조차 틔우지 못했다.

덕분에 라이오넬은 여왕 폐하의 치하를 받았다.

그때 여왕 폐하께 작물 기르는 법을 보고했던 것 같은데. 뭐라고 적혀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당연하지.’

라이오넬은 나를 믿지 않았으니까. 곡물이 잘 자란 이유도 당연히 알려 주지 않았다. 아마 내가 다른 영지로 정보를 빼돌릴 거라고 생각한 거겠지.

그래도 상관없어. 이번엔 아예 자라지 못하게 할 테니까!

“흐흐흐.”

내가 음침하게 웃는데도 리지는 눈에 띄게 좋아했다.

정말 좋은 사람이라니까. 괜히 코끝이 찡해져 리지의 손을 맞잡았다.

“제가 나중에 영지를 떠나게 되더라도 리지는 잊지 않을게요.”

“……네? 갑자기요?”

“고마워요!”

맞잡은 손을 위아래로 크게 흔들었다.

그리고 손을 놓으려는데 리지가 내 손을 덥석 붙잡았다.

“넬리 님. 영지를 떠나시려고요?”

물론, 복수에 성공하고 집을 구할 돈만 모이면 바로 떠날 생각이다.

하지만 그렁그렁한 눈을 보니 차마 그렇다고 할 수 없었다. 어색하게 웃으며 잡힌 손을 부드럽게 빼냈다.

“언젠가는 떠나지 않을까요……?”

“싫어요!”

“네?”

“다른 사람은 싫어요! 제가 더 잘할게요. 가지 마세요!”

“……네?”

떠나는 애인한테 매달리는 것처럼 말하지 말아요!

어디서 헛숨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렸다. 열린 문틈으로 소피, 톰, 제럴드의 머리가 3층 석탑처럼 쌓여 있었다.

“리지, 일단 좀 놔 봐요.”

어느새 허리에 달라붙어 있는 리지를 떼어 내려 애썼다.

아레트, 레반스와 어울리더니 힘만 세졌는지 리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빨리 떠나지 않는다고 약속해 주세요!”

소피, 톰, 제럴드의 머리가 문 뒤로 스르륵 사라졌다. 이상한 눈빛을 하고 말이다.

가지 마! 아니야! 그런 거 아니란 말이야! 자리 피해 주지 마!

“밖에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잖아요!”

“안 돼요! 다른 관리인은 싫단 말이에요! 가지 마요!”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문이 다시 벌컥 열렸다.

“다른 관리인이라니, 넬리 님, 어딜 가신다고?”

“일을 그만두신다는 말씀입니까?”

“영영 떠나서 안 돌아오신다고요?!”

소피와 톰, 제럴드가 쏟아져 들어오며 소리쳤다.

어째 말이 점점 와전되는 것 같은데…….

그 소리를 들은 다른 감독관들도 한마디씩 거들며 몰려들었다. 나는 흉흉한 눈빛들을 보며 손을 내저었다.

“그런 말 안 했어요!”

일단 리지를 허리에 매단 채 몰려드는 사람들을 한꺼번에 밀어냈다. 그러고 나니 온몸에 힘이 빠졌다.

벽을 짚고 숨을 고르는 와중에도 리지는 여전히 내 허리를 붙들고 있었다.

리지를 얕봤다.

펜촉을 다트처럼 벽에 꽂을 때 알아봤어야 했어. 어지간한 힘이 아니면 그 정도로 기물을 파손할 수 없는데.

“알겠어요. 알겠으니까 좀 놔 봐요.”

“진짜요?”

“네. ……은퇴는 괜찮죠?”

“그럼요! 대신 80세는 넘으셔야 해요!”

백골이 진토 될 때까지 부려 먹겠다는 내 말을 들었을 때, 프레르의 심정이 이랬을까?

지금이라도 도망갈까 하는데 리지가 활짝 웃으며 내 허리를 풀어 주었다.

허리……. 부서질 것 같아…….

골반 위를 두드리며 책상으로 가자 리지가 그제야 내게 서류를 내밀었다.

“아! 그리고 이건 예산안이에요. 레반스 님이 전해 드리래요.”

“……고마워요, 리지.”

“혹시 뭐 부탁하실 일은 없으신가요?”

부탁? 고개를 저으려다가 볼을 쓰다듬었다.

그러고 보니 그 이국의 곡물은 어디에 심지?

죽기 전에는 가장 비옥한 땅에 심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내가 그 땅을 파우트 씨에게 맡겨 버렸다. 심지어 씨뿌리기가 끝나고 싹까지 올라온 상태였다.

‘이미 난 작물을 뽑아내진 않을 테니까 아마 다른 곳에 심겠지?’

나에겐 비밀로 할 가능성이 높다. 저번에도 씨앗을 심고 싹이 틀 즈음에야 알았으니까.

“그럼 여왕 폐하께서 보내신 곡물이 어디서 재배되는지 알아봐 줄래요?”

“그럼요! 맡겨만 주세요!”

리지가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고는 씩씩한 걸음으로 사무실을 나갔다.

그러고 한참 시간이 흘렀다.

나는 일이 끝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빨리 퇴근해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속도 든든하게 채운 뒤 다짐했다.

이번 일은 그동안 한 복수와 중요도가 다르다.

전문적으로 망쳐야 하니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해!

힘차게 걸어서 본성으로 들어갔다. 나를 알아보는 하녀들과 인사하는데 집사님이 다가왔다.

“관리인님.”

“집사님, 안녕하세요!”

“오늘따라 활기차시군요.”

“흐, 흠흠! 그럼요.”

음침하게 흐를 뻔한 웃음을 갈무리하고 중앙 계단을 올려다보았다.

“혹시 제가 서고를 좀 쓸 수 있을까요?”

“서고에는 가주의 허락을 받은 사람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가주가 누구인지는 안 봐도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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