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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제발 좀 망하세요 (27)화 (27/130)

27화

“진짜.”

“뭐가 있는데!”

“불신이요.”

술잔을 쾅 내려놓으며 말하자 파우트 씨의 흥분이 가라앉았다.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뭔가를 말하려다가 로만을 힐끗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술기운에 흐릿해지는 눈으로 그를 보다가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니까 로만! 로만도 막, 응? 공작님한테 관심 갖고 그러지 마세요. 아주 얼마나 사람 질리게 하는데!”

“…….”

그도 취했는지 붉어진 얼굴로 조는 닭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제일 멀쩡한 파우트 씨가 고기를 뜯어서 내 앞에 놓아 주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도 관리인님이 예쁘게 봐줘. 우리 공작님 상처가 많아서 그런 거니까. 나쁜 사람은 아니야.”

그래. 상처가 많겠지.

뭐랬더라, 전쟁터에 있는 동안 약혼녀가 사촌 형님하고 바람이 나서 도망쳤다 그랬나?

“저도 들어서 알아요.”

“……그걸 들었다고?”

“네!”

“전쟁터에서……. 배신, 그걸?”

배신? 하긴. 바람도 배신이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려는데 눈앞이 팽 돌았다.

안 되겠어. 누워야겠어. 일단 탁자에 머리를 기댔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힘차게 소리쳤다.

“응!”

파우트 씨의 입이 떡 벌어졌다.

동네방네 소문 다 났는데 파우트 씨만 소문난 걸 모르고 있었나 보다.

내일 나가서 괜히 여기저기에 그 소문 들었냐고 물어보는 거 아냐?

그러면 안 된다고 말하려는데 혀가 굳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 일단 나오는 대로 내뱉었다.

“그래도 막 말하고 다니면 안 돼! 아무리 다 알아도. 라이오넬 체면이 있지.”

“그럼. 내가 그걸 어떻게 말해.”

파우트 씨가 힘없이 대답하고는 복잡하다는 듯 자기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그리고 맥주를 통째로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는 옛일을 회상하듯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나도 처음엔 악감정이 있었지만, 괴로워하시는 걸 보니까…….”

파우트 씨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술을 한 번 더 들이켜고 말을 이었다.

“원망할 수가 없더라.”

“괴로워했어? 라이오넬?”

“그래. 잠도 못 주무셨지.”

“그건 지금도 그렇잖아.”

웃기지도 않은 말인데 술기운 때문인지 웃음이 터졌다. 그러자 파우트 씨가 따라 웃었다.

하지만 그의 웃음은 잘못 보관한 맥주처럼 텁텁하기만 했다.

“아마 지금도 괴로우신 거겠지.”

아련한 목소리를 듣는데 정신이 가물가물해졌다.

생각보다 순정파네, 라이오넬.

이상하게 속이 답답했다. 가슴을 두드리는데 갑자기 옆에서 로만이 벌떡 일어났다.

파우트 씨가 놀란 얼굴로 로만을 보다가 민망하다는 듯 웃었다.

“하하. 우리가 너무 재미없는 이야기만 했지?”

“……아니. 나 화장실.”

로만 씨가 비틀거리면서 창가 쪽으로 다가갔다.

응? 화장실 간다며. 취했나? 몸을 흔들며 일으키는데 그가 갑자기 창문을 열었다.

그러더니 밖에다 대고 크게 늑대 소리를 냈다.

“아우우!”

“으악! 깜짝아!”

나도 모르게 펄쩍 뛰었다.

파우트 씨는 벙하니 있다가 커다랗게 웃음을 터트렸다.

로만 씨의 울부짖음과 파우트 씨의 웃음소리에 동물들이 깼는지 난리가 났다.

아니, 자는 애들한테 저래도 돼?

소리친 곳이 닭과 오리를 가둬 둔 곳 쪽이었는지, 날개 퍼덕이는 소리와 꽥꽥 꼬끼오 하는, 온갖 종류의 새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방금, 왜, 뭐였어요?”

로만의 돌발 행동에 멍하니 묻자 그는 성큼성큼 걸어 뒷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대로 나가서 사라졌다.

“아까부터 화장실 갈 때마다 저러더라고. 소리 나면 민망하다고.”

“아니, 화장실은 뒷문으로 나가야 있잖아요! 여기까지 들릴 리가 없는데……. 뭐, 항문에 비둘기라도 키우신대요?”

“푸학, 푸하하하!”

파우트 씨는 아예 탁자를 내리치며 자지러지게 웃었다.

나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숨을 내쉬었다.

“어휴, 놀라라. 술이 다 깨네.”

“하하하하! 술 깨면 안 되지! 자, 더 마셔!”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잔을 들었다.

라이오넬 이야기로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다시 붕 떴다. 파우트 씨는 가끔 얼굴이 달아오를 정도로 민망하게 나를 칭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술기운이 돌아서인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물론 민망한 건 마찬가지였지만!

듣다못한 내가 그만하라며 그의 팔뚝에 장난스럽게 주먹질을 할 즈음에야 로만이 다시 돌아왔다.

자리에 앉은 로만이 술잔을 비웠다.

“이제 난 쉬어야겠어.”

“그래, 쉬어. 우리는 더 마시다 갈 테니까.”

“나가라는 말인데.”

“좋아. 그럼 나가서 같이 한잔 더 해!”

로만 씨가 자리에서 일어나 파우트 씨에게 뭐라고 말했다. 그러자 파우트 씨가 껄껄 웃었다.

머리가 어지러워 두 사람이 뭐라 그러는지 잘 들리지 않았다.

“뭐야. 왜 나 빼고 둘이 웃어! 나도 알려 줘!”

소리치는데 탁자가 달려들어 쿵 부딪쳤다.

이 건방진 탁자 놈. 복수할 거야. 막 이마로 탁자를 때리려는데 누군가가 내 어깨를 붙잡았다.

“관리인님, 뭐 하는 거야!”

“한 대만! 딱 한 대만 때릴게!”

“누굴 때리려고?”

“탁자를! 이마로! 내 이마로 응징할 거야!”

“관리인님 취했지? 이거 주사지?”

“응!”

파우트가 자꾸만 나를 붙든다. 뿌리칠 힘도 없어 몸만 흔들고 있는데 로만이 문을 열어 줬다.

정신을 차리니 파우트 등에 업혀 있었다.

파우트가 뭐라고 계속 말을 거는데 대답을 한 건지 만 건지도 모르겠다.

고개를 돌렸는데 옆에 뭔가 시꺼먼 게 보인다. 심지어 나한테 말도 걸었다.

“원래 한번 마시면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마시나?”

뭐라는 걸까. 들리긴 하는데 취해서 이해가 안 된다.

새빨간 눈동자를 보면서 졸았다 깼다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내 방이었다.

눈앞에 뭔가 시뻘건 게 떠다니는 것 같은데…….

손을 확 뻗자 빨간 불빛이 사라졌다. 그리고 내 의식도 사라졌다.

* * *

침대에 누워 흐리멍덩한 눈을 깜빡이던 넬리가 라이오넬의 눈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손을 피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파우트를 향해 몸을 틀었다.

“목장지기의 집에는 왜 갔지?”

파우트가 놀란 얼굴로 라이오넬을 쳐다봤다.

“어떻게 아셨, 아닙니다. 물어보나 마나죠.”

파우트의 목소리에 넬리가 몸을 뒤척였다.

라이오넬은 대자로 뻗어 잠든 넬리를 보다가 파우트에게 따라오라고 눈짓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며 하녀에게 명령했다.

“잠자리를 봐주도록.”

“예, 공작님.”

파우트가 나오자마자 하녀가 안으로 들어갔다.

파우트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라이오넬을 보았다.

‘누구 잠자리를 봐주라고 할 사람이 아닌데.’

넬리는 둘 사이에 있는 게 불신밖에 없다고 했지만 파우트가 보기엔 아니었다.

적어도 라이오넬은 말이다.

어쩌면 넬리 덕분에 라이오넬이 배신의 상처를 이겨 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파우트는 그러길 바라고 있었다.

라이오넬은 아무도 없는 방으로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그제야 파우트의 뜨거운 시선을 느꼈다.

그가 인상을 찌푸리자 파우트가 램프에 불을 켜고 탁상 위에 올려 두었다.

커튼을 닫자 달빛이 사라졌다.

음영 진 얼굴로 라이오넬이 파우트를 보았다. 목장지기에게 왜 갔는지 해명하라는 눈빛이었다.

“그냥 술 한잔하러 갔습니다.”

“관리인과 함께?”

“마시고 있는데 관리인이 음식과 맥주를 들고 찾아왔습니다.”

라이오넬이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로만이 수상하다고 말해 놓고는 술을 들고 찾아가다니.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군.’

골치가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누르는 라이오넬에게 파우트가 말을 걸었다.

“목장지기 말입니다, 대장.”

“호칭.”

“아, 죄송합니다, 각하.”

“됐어. 계속해.”

“좀 수상합니다.”

파우트가 연신 뒷덜미를 문지르다가 말을 이었다.

“술 마시는 내내 공작님에 관한 걸 넌지시 물어보더란 말입니다.”

“흠…….”

라이오넬이 특유의 비음을 흘리며 다리를 꼬았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았다. 그는 파우트에게 앉으라고 눈짓했다.

파우트가 순순히 맞은편에 자리하며 말을 이었다.

“제가 예전처럼 술에 찌들어서 막살았으면 눈치 못 챘을 정도였습니다.”

“훈련받은 사람 같았나?”

“그 정도로 완벽하진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평범해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관리인의 말로는 전서구를 봤다던데.”

파우트가 작게 감탄했다.

어쩐지 자리를 비울 때마다 늑대 소리를 내서 닭이나 오리들을 깨우더라니만. 전서구가 날갯짓하는 소리를 숨기려 그랬나 보군.

“목장 오두막 근처에 전서구를 숨겨 두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아레트에게 말해 두지.”

“벌써 감시를 붙이신 겁니까?”

“아까 말하지 않았나. 넬, 관리인의 보고를 들었다고.”

라이오넬은 넬리의 이름을 부르려다가 인상을 찌푸리고 말을 바꿨다.

그 사실을 눈치챈 파우트의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동시에 라이오넬의 왼쪽 눈썹도 까딱거렸다.

“표정이 불손하군.”

“크흠! 아닙니다.”

“관리인을 믿는 게 아니다. 목장지기와 관리인 둘 다 수상하다고 여길 뿐이지.”

“알겠습니다.”

대답은 그렇게 해도 영 알겠다고 대답한 사람의 표정이 아니었다.

라이오넬은 변명을 하려다 그게 더 이상해 보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커다란 손으로 피곤하다는 듯 제 얼굴을 몇 번 비비고 다시 입을 열었다.

“관리인이 로만에게 무슨 말을 했지?”

“별다른 말 없었습니다. 제가 실수로 각하의 식사 습관을 말해서 주의를 받긴 했습니다.”

“식사 습관?”

“샐러드를 다 드시는 거 말입니다.”

“……레반스에게만 들키지 마. 네가 실언한 걸 알면 난리가 날 테니.”

“각하께서도 샐러드 드실 때 조심하십시오.”

“생각이 있다면 시간 차를 두고 방심했을 때를 노릴 거야. 지금은 괜찮다. 목장지기가 떠난 뒤엔 조심해야겠군.”

라이오넬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램프를 들었다.

파우트가 그를 따라 일어났다. 문을 여는 라이오넬을 뒤따르며 말을 덧붙였다.

“사실 관리인을 신뢰하고 계신 것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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