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흠…….”
라이오넬이 깍지 낀 손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편지가 있었나?”
“펴언지는…….”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솔직하게 말했다.
“다리에는 아무것도 매달려 있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등이나 배 쪽에 붙여 뒀을 수도 있어요.”
“다른 증거는 없나?”
다른 증거……. 다른, 증거…….
머리를 굴렸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꽈당이가 로만 씨를 싫어하는 것 같긴 했지만 그건 증거라기엔 빈약했다.
“저와 프레르에게 목장 근처에 오지 말라고 하던걸요.”
라이오넬이 나를 빤히 보았다.
특별히 뭐라고 반박하진 않았으나 딱히 내 말이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눈치도 아니었다.
그는 깍지 낀 손을 풀고 펜을 잡았다.
“알겠으니, 가 봐.”
“안 믿으시는 거 아는데, 혹시 몰라서 말씀드렸어요. 그러면 알아보시기라도 하실까 봐서요.”
의심하는 거, 잘하시잖아요.
그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았지만 목소리에 괜한 원망이 섞일 것 같아 삼켰다.
라이오넬은 내 쪽을 보지도 않은 채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를 노려보다가 꾸벅 인사하고 밖으로 나왔다.
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라이오넬의 눈빛이 계속 떠올랐다.
‘하긴 이번 건 나 같아도 안 믿었을 거야.’
그가 의심병 말기 환자인 건 둘째 치고라도, 나는 목장지기 자리를 프레르에게 돌려주고 싶어 하니까.
게다가 로만 씨는 다른 목장지기들과 달랐다.
사람들과도 제법 어울리려고 했다. 사람들도 프레르 덕분에 편견이 가셨는지 로만 씨와 제법 어울렸다.
이러니 라이오넬 입장에서는 내가 로만을 음해했다고 생각해도 할 말이 없었다.
‘다시 생각해 보자.’
죽기 전에 봤던 로만 씨는 어떤 사람이었지? 사실 잘 기억나지 않는다.
목초지는 톰의 관할이었다. 나는 보고서나 장부만 받아 봤었다.
운영이 대충 어떻게 되어 가는지는 기억나도 로만 씨가 어떤 사람인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때도 사람들과 어울리려고 했던 것 같은데.’
광장이나 선술집에서 소문을 수집할 때 몇 번 목격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예전에는 쉽지 않았다. 사람들이 이방인인 로만 씨를 지나치게 경계했다.
그래도 그는 꿋꿋하게 사교성 없는 얼굴로 사람들과 어울렸었지.
그러더니 돌연 민간요법으로 사고를 치고 쫓겨났다.
그래. 돌연! 갑자기!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이상하게 자꾸 마음에 걸린단 말이야. 얌전한 꽈당이가 발길질을 해서 그런가?’
멀쩡한 사람 대신 당나귀를 믿는다고 하면 다들 코웃음을 칠 것이다.
나는 깊게 숨을 내쉬고 방으로 돌아와 램프에 불을 켰다.
책상에 앉아 고민해 봐도 이렇다 할 증거는 떠오르지 않았다.
‘가깝게 지내면 뭐가 나오려나?’
좋아. 일단 찾아가 봐야겠다.
다음 날, 일이 끝나자마자 맥주와 돼지 다리 요리를 바리바리 싸 들고 목초지로 향했다.
나를 보고 신나서 달려온 꽈당이가 울타리 너머에서 킁킁 냄새를 맡았다.
“미안, 꽈당아. 오늘 네 간식은 없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꽈당이가 쌩하니 몸을 돌려 되돌아갔다.
꽈당. 차가운 당나귀.
까만 꼬리를 멍하니 바라보는데 오두막 안에서 커다랗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가 이상하게 익숙했다.
직감이 당장 되돌아가라고 내 머리채를 잡았다.
갈까? 말까? 고민하다 몸을 돌렸는데 벌컥 문이 열렸다.
“푸하하! 로만 너, 아주 열심히 사는 놈이구나!”
파우트 씨다.
걸리면 안 돼. 분명 파우트 씨가 과한 칭찬으로 내 정신을 공격할 거야!
도망치려는데 파우트 씨의 목소리가 날 붙잡았다.
“어? 관리인님 아니야?”
망했네. 아니지. 로만 씨랑 둘이 있는 것보다는 나을 거야.
나는 몸을 돌려 파우트 씨에게 어색하게 인사했다.
“하하하. 파우트 씨. 안녕하세요.”
“그럼! 안녕하고말고! 응? 이게 뭐야? 술하고 고기네!”
파우트 씨가 내 품에 있는 음식들을 들어 주며 반색했다.
나는 힐끗 로만 씨를 보았다.
멍한 표정이라 달가워하는 건지 아닌지 알 수가 없네.
“로만 씨 챙겨 드리려고요.”
“목장지기가 고기라니, 어디서 이런 대우 받기 힘든데. 역시 우리 관리인님은 하늘에서 내려…….”
“으아악! 배고프다!”
“그, 그 정도로 배고파? 비명을 지를 정도로?”
“네!”
“그럼 빨리 뭐라도 먹어야지!”
파우트 씨가 내 어깨에 팔을 걸치며 로만 씨를 향해 돌아섰다.
“같이 들어가서 한잔 더 하자고!”
로만 씨가 거절하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나는 그만…….”
“참, 요즘 공작님은 어떻게 지내시나? 내가 통 못 찾아봬서 말이야.”
파우트 씨가 로만 씨의 목소리를 못 들은 듯 나에게 물었다.
말이 끊긴 로만 씨가 민망할까 봐 그를 쳐다봤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물으려는데, 그가 언제 거절할 기색을 비쳤냐는 듯 문을 열었다.
“관리인님도 들어오십시오.”
맹한 목소리가 어쩐지 싸하다.
……파우트 씨가 있어서 진짜 다행이야. 전직 기사니까 무슨 일이 생기면 지켜 주겠지?
그래도 정신 바짝 차려야지!
고개를 끄덕이고 안으로 들어갔다. 집의 구조는 프레르가 살 때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삭막하다 싶을 정도로 짐이 없었다.
둘러보는데 파우트 씨가 안으로 들어오며 말을 걸었다.
“보니까 부 단장, 아! 이제 기사단장인가?”
“아레트 님이요?”
“그래. 아레트하고 레반스 얼굴이 좀 사람처럼 보이던데. 그것도 관리인님 덕이지?”
“아니요. 리지 덕이에요. 리지가 천재거든요.”
옳은 말을 했을 뿐인데. 파우트 씨 표정이 지나칠 정도로 흐뭇하게 변했다. 그리고 감동한 눈으로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또 내가 내 공로를 다른 사람에게 돌린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해명을 하는 것도 지쳐 파우트 씨를 외면한 채 자리에 앉았다.
로만 씨가 맥주잔 세 개를 가져왔다. 그가 맥주를 가득 따르자마자 파우트 씨가 잔을 들었다.
“건배!”
“건배.”
힘없이 맞춰 주며 잔을 들었다. 옆에서 로만 씨도 말없이 잔을 부딪쳤다.
맥주를 벌컥벌컥 마신 파우트 씨가 로만 씨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아까 먹다 남은 샐러드 없나?”
“있어.”
로만 씨가 유령처럼 일어나 부엌으로 갔다.
갑작스러운 반말에 놀라 파우트 씨를 보았다.
“반말할 정도로 친해지셨어요?”
“마시면서 친해졌지. 크하하!”
“오늘 처음 본 게 아니에요?”
“며칠 전에 선술집에서 만났는데 집으로 초대하더라고.”
“로만 씨가 먼저 말을……,”
걸었느냐고 물어보려는데 갑자기 로만 씨의 팔이 나와 파우트 씨 사이를 가로막았다. 샐러드만 내려놓고 사라졌지만 말은 뚝 끊겼다.
파우트 씨가 샐러드를 제 접시에 덜고 돼지고기를 포크 두 개로 쩍 갈라냈다.
“로만이 뭘?”
실례되는 질문도 아닌데 괜히 로만 씨가 있는 자리에서 묻기 꺼려졌다.
“아니에요. 그것보다, 이 요리 잘 가져왔죠? 제가 특별히 주방장님께 부탁해서 받아 왔어요!”
파우트 씨가 호탕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내 접시와 로만의 접시 앞에 차례대로 고기를 덜어 주었다.
로만이 아주 소량의 고기를 포크로 찍어 입에 넣었다.
“맛있죠?”
내 질문에 그가 몽롱한 얼굴로 끄덕였다.
“공작님도 이런 요리를 즐겨 드십니까?”
“공작님이요?”
“높으신 분들은 이런 걸 드시는 건가 싶어서 말입니다.”
라이오넬이 이런 걸 잘 먹나?
물론 음식을 가리는 걸 본 적은 없었다.
그냥 주는 대로 먹는 편이었기에 즐긴다고 하기도 애매했다. 고개를 기울이고 있는데 파우트 씨가 고기를 먹으며 대답했다.
“사실 육류를 썩 좋아하시진 않지. 자주 남기시니까.”
“양이 많아서 그럴걸요? 공작님은 과식하지 않잖아요.”
“샐러드는 항상 다 드시는데?”
그렇긴 하지. 근데 샐러드가 없을 땐 굳이 찾지 않는다. 게다가 내가 가끔 샐러드와 다른 음식을 바꿔 주면 냉큼 받아먹었다.
그러니까 그건 좋아서 먹는 게 아니다.
“배 채우려고 먹는 거겠죠. 사실 공작님이 즐기시는 건…….”
그대로 공작 놈의 취향을 말하려다가 뒷골이 쭈뼛한 느낌에 입을 다물었다.
로만이 옆에서 흥미롭다는 듯 듣고 있었다. 그건 파우트 씨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의 표정에 별반 차이가 없는 걸 보면, 그냥 기우인가?
아무 말도 안 하고 멀뚱히 두 사람을 보기만 하자 파우트 씨가 탁자를 콩콩 두드렸다.
“빨리 말해 봐! 말을 하다 마니까 궁금하잖아!”
로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입을 열려다가 문득 레반스의 말이 떠올랐다.
‘음식 취향을 알면 독살하기 편하다고 했지.’
그런 시도가 있었냐는 말에 대충 얼버무리긴 했지만 괜히 찝찝했다.
안 그래도 의심받고 있는데……. 라이오넬이 가만있지 않을 거야.
추궁당할 걸 상상하니 절로 넌더리가 났다. 몸을 떨며 고개를 젓고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아니에요. 공작님께 또 무슨 소리를 들으려고. 아레트 님이 유령처럼 따라다닐 걸 생각하면 벌써! 으으…….”
“……그건 그렇지.”
파우트 씨가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을 줄 알았던 로만은 의외로 잠잠했다.
그는 묵묵히 맥주를 마시다가 나를 보았다. 눈두덩이가 유난히 깊어서인지,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다.
“관리인님은 공작님과 친하신가 봅니다.”
“그러고 보니 어떻게 그렇게 빨리 친해졌대? 우리 대장은 안 그렇게 생겨서 낯가림이 엄청 심한데.”
“낯가림은 무슨!”
코웃음을 쳤다. 그냥 의심병 말기인 거지!
지난날의 수모가 떠오르니 또 열불이 뻗쳐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
파우트 씨가 아저씨처럼 웃으며 내게 술을 따라 주었다. 아저씨가 맞지만. 저렇게 웃으니 일곱 배는 더 아저씨처럼 보인다.
“혹시 대장하고 둘이 뭐 있는 거 아냐?”
“있죠.”
“뭐?!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