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병에 대해서도 해박하고, 약초를 잘 다루더라고요. 영지에 이렇다 할 의사가 없으니까 많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라이오넬은 여전히 썩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차라리 잘되었다.
라이오넬이 내 말에 설득당해 흔쾌히 프레르의 거주를 허락한다면 실망스러웠을 것이다.
나는 라이오넬이 싫어하는 것을 억지로 하고 싶은 거니까! 그를 설득하고 싶은 게 아니니까!
사실 조금 더 싫어해도 괜찮을 것 같다.
“그런데 새로운 목장지기가 오면 전 목장지기가 안 떠났다고 싫어할 수도 있겠네요. 안녕히 계세요.”
“넬-!”
뒤에서 날 부르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지만 후다닥 걸음을 옮겼다.
좋아. 만족스러워.
환하게 웃으며 가벼운 걸음으로 응접실을 나왔다.
* * *
내 기억대로 영지에는 새로운 목장지기, 로만이 왔다.
로만이 터무니없는 민간요법으로 마을 사람들을 해치지 않을까 하는 걱정 반, 그의 꼬투리를 잡아 쫓아내려는 마음 반을 담아 쉬는 날마다 프레르와 함께 로만을 감시했다.
하지만 알아낸 것은 별로 없었다.
로만 역시 프레르와 마찬가지로 항상 조금 멍한 표정을 짓고 다닌다는 것 정도?
“혹시 저 표정이 목장지기 기본 표정인가요?”
“맞아요. 저 맹한 표정을 완벽하게 마스터해야 진정한 목장지기라고 할 수 있죠.”
분명 같이 농담한 건데 옆에서 맹한 표정으로 저런 말을 하니 진짜 같다. 내가 빤히 쳐다보자 그가 구시렁거렸다.
“장단 맞춰 준 거잖아요.”
“알죠.”
생긋 웃고 다시 로만을 감시했다.
그는 느긋하게 누워 풀피리나 불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사고를 칠 정도로 활달한 사람이 아닌 것 같았는지 프레르가 불안한 기색을 내비쳤다.
“만약 저분이 사고를 안 치면 어떻게 되죠?”
“칠 거예요. 분명히.”
그렇게 말하면서도 사실 자신이 없었다.
사람들이 로만의 민간요법에 손을 댄 이유는 영지에 이렇다 할 의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떡하니 프레르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게다가 사람들과 사이도 좋았다. 소화불량만 생겨도 프레르를 찾을 지경이었다.
잠깐, 그러면 이제 로만 때문에 사람들 생명이 위태로워질 일은 없는 건가?
그럼 못 쫓아낼 수도 있는데.
“……그냥 의사로 있는 건 어때요?”
“저는 목장지기인데요.”
쓸데없이 정체성이 확고하다.
“그런데 의사도 나쁘지 않죠?”
“개 열 마리를 키우면서요?”
“…….”
“벡시에게 저를 돌려주겠다면서요.”
“생각해 보니 꽈당이는 프레르가 없어도 저만 있으면 잘 살 것 같아서요.”
“그건 완곡한 추방령인가요? 저 가요? 떠나요?”
“아니, 잠깐, 잠깐만요!”
나는 프레르의 어깨를 붙들었다. 그와 실랑이를 벌이다가 고개를 돌렸는데 로만이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기울이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무리 봐도 양들을 지키는 개들과 당나귀밖에 보이지 않았다.
‘순식간에 어디로 간 거람?’
입 밖으로 말을 꺼내지도 않았는데 프레르가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막 오두막 밖으로 나온 로만이 누가 봐도 수상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나는 프레르의 손목을 잡고 수풀 뒤로 숨었다.
“뭘 하는 걸까요?”
내 질문에 프레르가 눈을 가늘게 뜨고 로만을 자세하게 관찰했다.
“손에 뭘 들고 있어요.”
로만에게 들키지 않게 주의하며 그를 관찰했다.
하지만 너무 멀어서 손에 뭘 들고 있는지는 잘 보이지 않았다.
“보여요?”
“네. 종이 같은데요. 그리고 하얀……. 음, 밀가루 반죽 같은 게 움직여요.”
움직이는 반죽 덩어리라고?
눈을 가늘게 뜨는데 갑자기 새 한 마리가 푸드덕 소리를 내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우리 머리 위를 천천히 비행했다. 덕분에 형태를 뚜렷하게 볼 수 있었다.
로만이 손에 쥐고 있던, 하얀 밀가루 반죽은 다름 아닌 전서구였다.
“방금, 봤어요?”
프레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리에 편지는 없었어요.”
“그럼 전서구가 아닌가?”
“모르죠.”
어깨를 으쓱이는 프레르를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하늘은 새 한 마리 없이 깨끗하기만 했다.
“기다려 볼까요? 전서구면 돌아오지 않나요?”
프레르가 고개를 저었다.
“귀소 본능을 이용한 거기 때문에 편도로 보내는 것만 가능해요.”
“흠……. 전서구에 대해 잘 아시네요.”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자 프레르가 맹하게 어이없어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로만을 가리켰다.
“그 눈빛, 이쪽이 아니라 저쪽에 보내야 하는 것 같은데요.”
맞다. 프레르는 나랑 같이 감시하는 쪽이었지. 라이오넬의 의심병이 옮았나 봐.
나는 그대로 고개를 돌려 가늘게 뜬 눈으로 로만을 노려보았다. 로만은 양들을 울타리 안으로 몰고 있었다.
나는 프레르에게 따라오라고 손짓하고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로만이 보이지 않을 곳까지 와서 들판에 털썩 앉았다.
“아까 비둘기는 귀소 본능이 있다고 했죠?”
“그렇죠.”
“여기서 기다려 볼래요. 새가 돌아오면 애완용이고 안 돌아오면 전서구겠죠!”
“다친 새를 돌봐 주다가 풀어 준 거일 수도 있잖아요.”
……그 생각은 못 했네.
“차라리 공작님께 알리세요.”
“안 믿을 것 같은데…….”
“불신이 엄청나네요.”
“그렇다니까요!”
프레르가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벌렸다가 이내 지팡이로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리고 나를 빤히 보다가 옆에 앉았다.
나는 드러누워 하늘을 빤히 바라봤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비둘기는 돌아오지 않았다.
날이 어두워질 즈음 프레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엉덩이를 툭, 툭, 털자 흙먼지가 내 얼굴로 날아왔다.
손을 휘저으며 몸을 피하는데 프레르가 특유의 맹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이제 약 만들러 가야 해요.”
“네. 가세요.”
프레르가 꾸벅 인사하고 몸을 돌려 걸어갔다.
나는 그의 등에 손을 흔들면서 소리쳤다.
“그리고 다음부터 엉덩이는 반대쪽에서 털어요!”
“예?”
“엉덩이 내 쪽으로 털지 말라고!”
“내키면요!”
“야!”
버럭 소리치다가 무언가 달려오는 소리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꽈당아!”
팔을 넓게 벌리자 꽈당이가 내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컥!”
오늘따라 환영이 격렬하구나!
기쁜 마음에 목을 끌어안으려는데 꽈당이가 휙 피했다. 놈의 입에는 당근 주머니가 물려 있었다.
꽈당이 간식으로 들고 온 거긴 한데, 막상 뺏기니 주기 싫어지네.
서운한 마음에 노려보는데 꽈당이가 주둥이로 주머니 입구를 벌리고 당근을 허겁지겁 먹었다.
“꽈당아. 며칠 굶었니?”
꽈당이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당연하지. 당나귀니까.
대신 느린 발소리와 함께 그다지 익숙하지 않은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서, 뭐 하십니까?”
김이 빠진 채 미적지근해진 맥주 같은 목소리의 주인공, 로만이었다.
훔쳐본 게 들킨 건가 싶어서 괜히 뜨끔했다.
아까 본 장면 때문인지 별거 아닌 눈빛이 어딘가 섬뜩해 보였다.
“하하하.”
긴장한 것을 티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꽈당이를 끌어왔다.
“꽈당이 만나러 왔죠!”
“아. 벡시아드리아 라렐리우스 말씀이십니까.”
잔뜩 굳어 있던 등과 어깨에 힘이 툭 풀렸다.
로만 씨는 왜 또 꽈당이를 그렇게 부르시죠?
프레르에게 당하셨나요?
“네, 뭐. 근데 얘 굶었어요? 먹을 거에 환장하긴 해도 이 정도로 환장하는 애는 아닌데.”
“오늘 좀 입맛이 없어 보였습니다.”
로만 씨가 꽈당이를 쓰다듬어 주려는 듯 손을 뻗었다. 그러자 꽈당이가 몸을 돌려 발길질하는 시늉을 했다. 그러더니 꼬리를 흔들며 돌아가 버렸다.
나랑 로만 씨만 두고 가면 어떡하니, 꽈당아!
애타게 쳐다봤지만 꽈당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로만 씨와 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하하. 아직 못 친해지셨나 봐요.”
“아무래도 전 목장 관리인이 계속 보이니 혼란스러운 것 같습니다.”
떠나간 애인을 못 잊는 사람과 연애하는 것처럼 아련하게 말하네.
그러면서 은근슬쩍 나에게 눈짓하는 게, 꼭 프레르를 이 근처로 데리고 오지 말라고 하는 것 같았다.
내가 모르는 척 먼 산을 바라보자 아주 대놓고 그렇게 말했다.
“앞으로 오지 마십시오.”
“음. 노력할게요.”
“네.”
“저는 자주 와야 할 것…….”
“안 됩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로만 씨가 고개를 저었다. 나는 의심스러운 눈초리가 드러나지 않게 잘 숨기며 목을 가다듬었다.
“제가 종종 아침에 밭일을 할 때가 있어서요. 당나귀가 필요해요.”
“공작님께서 허가하신 일입니까?”
“그, 그런 건 아닌데…….”
“그럼 곤란합니다.”
맹한 얼굴에 그렇지 못한 태도로 로만 씨가 나를 칼같이 잘라 냈다.
“그치만 이제껏…….”
“이제껏 허가도 없이 당나귀를 사용하셨다면 공작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허가를 받으려 노력하고 있다, 뭐 그런 말이죠. 하하하. 허락받아서 다시 올게요.”
로만 씨가 나에게 대충 인사하고 왔던 길을 돌아갔다.
나는 머리를 부여잡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망했어! 허락받을 수 있을 리가 없는데.
당나귀를 빌린다 그러면 분명 라이오넬은 대리석 같은 얼굴로 어디다 쓸 거냐며 꼬치꼬치 캐묻고 의심할 것이다.
‘상상만 해도 숨 막혀.’
역시 빠른 복수를 위해서라도 프레르가 필요하다.
의사는 무슨. 프레르는 천상 목장지기인걸!
그리고 치료야 목장지기를 하면서도 할 수 있고 말이야.
나는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걸었다.
프레르 말이 맞아. 라이오넬에게 말이라도 꺼내 봐야지. 그가 의심해서 로만의 뒤를 캐 보다가 뭔가를 발견할 수도 있잖아?
공작성으로 돌아가자마자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문을 열자마자 레반스가 보였다. 그에게 눈짓으로 인사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라이오넬이 나를 힐끗 보고는 서류를 정리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따로 드릴 말씀이 있어요.”
“해.”
나는 힐끗 레반스를 보았다. 그는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내 쪽을 보고 있었다.
“새로운 목장지기, 로만 씨가 수상해요.”
“근거는?”
“허공에 전서구로 보이는 비둘기를 날려 보내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