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라이오넬의 새빨간 눈동자가 나에게 겨눠졌다. 완벽한 모양의 입술이 비틀려 올라가며 옅은 곡선을 그려 냈다.
또 울컥 화가 치밀었다.
“천막도, 농기구 교체도, 감독관을 더 뽑는 것도, 결국 영지 경영에 도움이 되지 않았나요?”
“그대가 신임을 얻는 것에 도움이 되었겠지. 처우가 좋아졌다는 소리가 나왔지만 그뿐이다. 아직 수확 전이니 수입에 직결된 것은 없어. 오히려 예산만 두 배로 들었지.”
“…….”
“그리고 대놓고 믿어 달라고 요구하는 게 오히려 더 수상해 보인다고 생각하지 않나?”
말문이 턱 막혔다. 그동안 내가 그를 너무 편하게 대하고 있었나 보다.
죽기 전보다 더 쉽고 빠르게 다른 사람들의 신뢰를 얻어서 라이오넬 역시 나를 믿어 줄 줄 알았는데.
전부 내 착각이었어.
확인 사살이라도 하듯 라이오넬의 차가운 목소리가 비수처럼 날아들었다.
“내가 관리인의 만용을 어디까지 용인해 주어야 하지?”
졌다. 지금은 드러눕는다고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거야.
여기서 말싸움해 봤자 라이오넬의 불같은 의심병에 기름을 부어 주는 꼴이었다.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
고분고분하게 사과했지만 라이오넬의 미간은 오히려 더 찌푸려졌다. 그는 긴 숨을 내쉬고 손을 휘저었다.
“나가.”
“예, 공작님. 쉬세요.”
새하얀 서류를 일부러 지르밟으며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성큼성큼 성을 빠져나왔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울분이 치솟았다.
인적이 드문 곳에 도착하자마자 분통이 터졌다.
“으아아아아악!”
분해! 분해 죽겠어!
손해 보는 것 같아도 프레르를 봐서 도와주려고 했더니만! 내 속도 모르고 또 의심하고!
그래. 내가 너무 설렁설렁 복수했지! 그동안 너무 공작 놈 좋은 일만 했지!
씩씩거리며 서 있다가 크게 숨을 내쉬었다.
“안 돼? 10년 연장이 안 된다고?”
그럼 되게 만들면 되지.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지는 법이다.
목장지기 눌러앉힌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넬리 페퍼, 포기를 모르는 여자!
“두고 봐, 라이오넬!”
땅을 라이오넬의 잘난 면상이라고 생각하며 쾅쾅 밟아 댔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일 끝나면 귀여운 꽈당이라도 만나야겠어!
속에 쌓인 울분을 콧김으로 다 쏟아 내고 성큼성큼 걸었다.
일단 관리소로 돌아와 해가 질 때쯤이 되어서야 일을 마치고 목초지로 갔다.
“꽈당아!”
내 목소리에 풀을 뜯고 있던 당나귀가 강아지처럼 뛰어왔다.
꽈당이의 새하얀 주둥이를 쓰다듬어도 분노가 가라앉지 않았다.
까만 털이 라이오넬의 까만 머리카락과 닮은 탓이었다. 덩달아 그의 잘난 얼굴과 새빨간 눈동자도 떠올랐다.
“라이오넬…….”
혼자 씩씩거리는데 꽈당이가 나를 버리고 제 무리로 돌아가 버렸다.
붙잡진 않았다. 나도 할 일이 있으니까! 성난 걸음으로 목장지기의 오두막 문을 두드렸다.
“프레르! 있어요?”
“있어요.”
얇은 문 너머에서 힘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저 들어가요!”
문을 벌컥 열자 벽에 진열된 온갖 무기가 보였다. 하지만 내 관심사는 프레르였다.
오두막은 좁았기에 조금만 시선을 돌려도 프레르가 보였다.
손에 든 편지를 벽난로에 집어 던진 그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뭐라고 구시렁거리는데 잘 들리지 않았다.
다가가자 프레르가 고개를 들었다.
“공작님이 뭐라고 하세요?”
“아까는 당장 떠날 사람처럼 굴더니. 사람들 만나 보니까 좋죠? 정들어도 되겠다 싶죠?”
“네. 그런 것도 있고요.”
그가 맹하게 웃고는 뒷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사정이 생겨서 좀 오래 있어야 할 것 같아서요. 그래서 공작님은 연장해 주신대요?”
“아니요!”
당당한 어조에 프레르가 고개를 기울였다. 곧 리지가 가꾼 화분처럼 축 늘어졌다.
굉장히 실망한 듯 목소리가 시무룩했다.
“괜찮아요. 떠나는 건 익숙…….”
“아니요!”
문을 쾅 닫고 들어가 프레르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프레르는 여기 살게 될 거예요.”
“공작님이 안 된다는데 무슨 수로요?”
“라이오넬이 안 된다고 했으니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여기 살게 할 거예요!”
“네? 아니, 그것보다 공작님 성함을 그렇게 함부로 불러도 되는 거예요?”
“뭐 어때요. 없는 곳에서는 여왕 폐하 욕도 한다는데.”
“그거 사형…….”
“물론 나는 안 그러지만!”
프레르가 특유의 맹한 얼굴로 돌아와 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어, 어쨌든! 프레르를 100년 동안 고용하게 만들 거예요. 풍화돼서 뼈만 남을 때까지 일 시킬 거야!”
“저한테 억하심정이라도 있으세요?”
“이제 우리는 한배를 탄 거예요!”
프레르가 미묘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편이 되어 주겠다는데도 별로 기뻐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나랑 한배에 타는 게 싫어요?”
“아니요. 그냥 왜 이렇게 잘해 주나 싶어서요.”
“프레르도 나도, 같은 이방인이잖아요.”
“관리인님이요?”
그는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영지민들이 나를 좋아하니 저렇게 생각할 만도 하다.
하지만 예전에 배척당했던 기억 때문인지 주민들과 좀처럼 가깝게 지낼 수가 없었다.
게다가 복수가 끝나면 떠날 거기도 하고!
기간은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계약 때문에 머무는 거니까 프레르와 별반 다를 것 없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화제를 전환했다.
“혹시 따로 잘하는 거 있어요?”
“어, 약초를 좀 알아요. 응급처치 같은 것도 할 줄 알고…….”
“민간요법은 아니죠?”
“제대로 배운 거예요.”
프레르가 불퉁하게 대답했다.
약초. 약초라. 어떻게 하면 그를 눌러 앉힐까 고민하다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흐흐흐.”
내 웃음소리를 들은 그가 뒷걸음질 쳤다. 나는 그를 내버려 둔 채 오두막 문을 열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볼게요!”
“이렇게 가신다고요? 음흉하게 웃기만 하다가?”
“나만 믿어요!”
그러자 프레르가 작게 중얼거렸다.
“……도망쳐야 하나.”
등 뒤에서 이상한 말이 들리는 것 같지만, 모른 척해야지.
* * *
한 달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그동안 정기적으로 식물용 독을 만들어 뿌렸다. 꾸준히 하긴 했지만 일이 바빠서 경과를 자세히 살피진 못했다.
대신 프레르를 영지에 머물게 하는 것에 집중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법을 찾아봤다. 이곳저곳에 물어 다른 곳에서는 목장지기나 양치기를 어떻게 대우하는지도 알아봤다.
쉬는 날에는 영지를 돌아다니며 적당한 집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프레르의 계약이 종료되는 날, 라이오넬이 나를 찾았다.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새빨간 눈동자가 보였다.
“관리인.”
“예, 공작님.”
그가 골치 아파 죽겠다는 표정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러고는 영혼까지 내뿜을 기세로 한숨을 내쉬었다.
속으로 고소해하는데 라이오넬이 고개를 들었다.
“내가 준 드레스를 판 돈으로 작은 오두막을 구입했다지?”
“네.”
“거기에 전 목장지기를 살게 해 준 건, 나와 해보자는 건가?”
“네에? 아니요오?”
말끝을 늘리며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깜빡이자 라이오넬의 얼굴이 구겨졌다.
웃음이 피어오르려는 걸 참으며 최대한 순진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라이오넬의 눈에도 순진해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어요.”
레반스가 웃겨 죽겠다는 표정인 걸 보면 마냥 순진해 보이진 않는 모양이다.
반면에 리지는 라이오넬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공작님은 왜 항상 넬리 님을 미워…… 읍!”
물론 말을 다 꺼내기도 전에 레반스에게 끌려 나갔다.
주변이 조용해지자 라이오넬이 다시 입을 열었다.
“계약이 끝난 목장지기는 떠나야 해.”
“그런 법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관습이다.”
대체로는 그랬다. 그들은 결국 이방인이었다.
게다가 프레르가 인정한 것처럼 독특한 사람들이 많았다. 사고를 칠 가능성이 있기에 계약이 끝난 뒤에 목장지기가 머무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 외에도 새로운 목장지기와 시비가 붙는 경우도 더러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프레르는 그럴 성격이 아니었다.
“머물 곳이 있고 세금도 내고 주민들하고도 친해졌는데 굳이 쫓아내야 할까요?”
“쫓아내겠다는 게 아니라,”
“살게 해 주시겠다는 뜻이죠?”
“떠나는 게 당연하다는 뜻이다.”
“사람이 꼭 당연하게 살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니 할 말이 없는지 라이오넬이 입을 다물었다.
역시. 이성적인 사람을 논리적으로 이기지 못할 땐 무논리로 나가야 하는 법이다.
말싸움은 말이 통해야 이길 수 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라이오넬이 환장하겠다는 표정으로 숨을 깊게 내쉬었다.
“만용 부리지 말라고 했을 텐데?”
“아니죠. 만용을 어디까지 용인해 주어야 하는지 물어보셨죠.”
“질문이 아니라 경고였다.”
알지, 알고말고.
“그랬나요? 오래돼서 기억이 잘…….”
“한 달밖에 안 된 일인데.”
“일이 많아서 요즘 한 달이 일 년 같더라고요.”
“감독관을 더 못 뽑게 했으면 내 이름도 잊었겠군?”
“네!”
생긋 웃자 라이오넬이 인상을 찌푸렸다. 관자놀이를 꾹, 꾹, 누르는 그에게 다가갔다.
책상을 짚고 상체를 쭉 빼자 코가 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의외로 가만히 있던 라이오넬이 뒤늦게 인상을 찌푸리며 의자를 뒤로 뺐다.
불쾌해서 저러나? 불쾌하라고 한 행동이니까 상관없지만!
“정말 프레르를 내보내실 건가요?”
“…….”
“목장지기에 대한 편견 때문에 가엽게도 떠돌아다녔대요. 최선을 다해 일하면서도 연장은 절대 안 했대요. 정 붙이면 떠나기 힘드니까!”
“그게 나랑…….”
“그런 사람을 이유도 없이 쫓아내시려는 건가요? 계약이 끝났다고? 알터우드 공작령에 정붙인 사람을?”
“후…….”
“공작님 그렇게 무자비하고, 잔악무도하고, 무정하고, 모질고, 피도 눈물도 없고, 냉혈하고 야박하신 분이셨나요?!”
“하!”
라이오넬이 기가 막힌다는 듯 짧게 웃었다.
나는 굴하지 않고 얼굴을 더 들이밀었다.
“그런 분이셨나요? 정말로요?”
인상을 찌푸린 라이오넬이 손등으로 내 얼굴을 옆으로 밀어냈다.
그의 얼굴에는 체념의 빛이 어려 있었다. 죽기 전에도 느꼈던 거지만 라이오넬은 감정적 호소에 은근히 약했다.
본인은 모르는 것 같지만 말이다.
즉, 이번 싸움은 나의 승리라는 뜻이었다.
생각이 끝나기가 무섭게 라이오넬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뭘 할 줄 알지?”
좋아, 다 넘어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