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놀라서 다가가자 이번에는 등을 바닥에 마구 문지른다.
닿지 않은 곳이 간지러운 것 같기도, 고통에 몸부림치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왜 이러죠? 설탕을 너무 많이 먹어서 발작이 일어났나?”
걱정스러운 눈으로 꽈당이를 안으며 프레르를 보았다. 그러자 그가 맹한 얼굴로 꽈당이를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 불길한 고갯짓은 뭐야! 무슨 의미야!
“심각한가요?”
“이대로 두면 좋아 죽겠는데요.”
“죽어요?!”
“좋아서요. 좋아서 죽는다구요.”
“아…….”
멍하니 감탄하다가 희미하게 웃고 있는 프레르를 노려봤다.
“아니, 왜 애 목숨 가지고 장난치고 그래요. 놀랐잖아요.”
꽈당이를 따라 일어나며 투덜거리자 프레르의 맹한 표정이 조금 묘하게 변했다.
왜 그러냐는 듯 쳐다보자 그가 잠시 뜸을 들였다가 입을 열었다.
“……관리인님은 동물을 진심으로 아끼시나 보네요.”
“꽈당이 귀엽잖아요.”
“우리 벡시는 멋진 편인데요.”
“멋지기도 하고요.”
꽈당이의 새까만 털을 쓰다듬었다. 프레르는 잠시 침묵하다가 손을 뻗어 당나귀의 커다란 귀를 문질렀다.
“당나귀는 귀를 만져 주면 좋아해요. 청각이 예민한 동물이거든요.”
프레르가 해 보라는 듯 손을 치웠다. 나는 조심스럽게 양손으로 꽈당이 귀를 문질러 주었다.
그러자 꽈당이가 나에게 주둥이를 비비며 푸르릉 푸르릉 웃었다.
“프레르.”
“네?”
“계약 기간이 얼마나 남았다고 했죠?”
“한 달 정도요.”
“그럼 꽈당이는 어떻게 돼요?”
“여기 있는 가축들은 전부 공작님 소유예요. 개들만 빼고요. 제가 떠나면 다른 사람이 와서 돌보겠죠.”
큰일이다. 프레르 다음에 온 목장지기들은 다 이상했었는데. 그럼 그 사람들 손에 꽈당이를 맡겨야 하는 거잖아!
“계약 연장할 순 없나요? 제가 노력해 볼게요.”
프레르가 지팡이 끝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어딜 가도 알터우드 공작령보다 좋은 대우를 받긴 힘들 것이다.
게다가 꽈당이도 프레르랑 정이 든 것 같고…….
“아니면 떠나야 하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어요?”
“그런 건 아닌데…….”
늘어지는 말끝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프레르가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맹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정들까 봐요.”
“정들면 좋은 거 아니에요?”
“목장지기는 계약이 끝나면 떠나야 해요. 정들면 떠나기 힘들어져요.”
고개를 기울이고 예전의 일을 천천히 되짚었다.
프레르 다음에 온 목장지기는 이상한 민간요법을 맹신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민간요법으로 영지민의 생명을 위태롭게 했다.
덕분에 원래의 계약 기간인 3년을 못 채우고 6개월 만에 떠났다.
그다음에 온 목장지기는 1년 계약을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인근 나라 카터스의 이교도였다.
교주에게 제물로 넘기기 위해 영지민을 납치하려다가 발각되어 추방당했다. 그다음 사람도 추방당했던 거 같은데.
……목장지기들 상태가 다 왜 이렇담?
“혹시 프레르.”
프레르가 특유의 멍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봤다.
“혹시 도벽 있거나, 저주를 걸거나, 이상한 종교에 심취해 있거나, 민간요법을 맹신하나요?”
내 말에 프레르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더니 매우 상처받은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관리인님도 그렇게 생각하세요? 떠돌이들은 다 미치광이라고?”
“아니요. 여러 번 목격한 적이 있어서 확인차 물어본 거예요.”
슬쩍 본 프레르는 굉장히 시무룩해 있었다.
“미안해요. 프레르가 그런 사람 같아 보여서 한 말은 아니에요.”
“뭐, 목장지기 중에 이상한 사람이 많은 건 사실이니까요.”
프레르가 지팡이 끝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혼자 정처 없이 떠돌다 보니까 이상한 곳에 의지하는 사람도 있거든요.”
맞다. 그래서 인식도 그다지 좋지 않다. 그런 데다가 금방 떠나니 마을 사람들도 이방인이라고 생각해 거리를 두었다.
갑자기 측은하네. 나도 처음 왔을 때 눈총 많이 받았었는데.
물론 지금은 2회차여서 사람들과 빨리 친해졌지만 말이다.
“그럼 계약 연장해요!”
“네?”
맹하니 눈을 껌뻑이던 프레르가 심드렁하게 코를 한번 훌쩍였다.
“사실 계약 연장 제안을 받았는데 거절했어요.”
“네? 왜요?”
프레르가 입을 열었다가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다물었다.
“연장해서 사람들하고 친해졌는데 다음에 해고당하면 슬프잖아요?”
“왜 해고될 생각만 해요!”
“보통은 그러니까요. 그래서 아예 연장 자체를 안 해요.”
나는 깊은 동질감을 느꼈다.
외삼촌 집에서 쫓겨나 몇 년간 떠돌이처럼 살아 봐서 안다. 소속감이 없는 건 괴롭다.
처음에는 어딘가에 안주하고 싶어 하다가도 계속 실패하고 외로움에 시달리다가 보면 체념하게 된다.
‘짠해……. 불쌍해…….’
안 되겠다. 복수에 집중하기로 했지만 어쩔 수 없지. 어린 시절의 내가 생각나서 두고 볼 수가 없다.
그리고 꽈당이의 친구는 내 친구니까!
‘그치, 꽈당아?’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얼굴을 비비고 있던 꽈당이는 없었다. 고개를 돌리자 다른 당나귀들과 미친 듯이 뛰어다니는 게 보였다.
“……제가 공작님을 어떻게든 구워삶아 볼게요!”
“쉽게 요리될 분이 아니신 것 같던데요.”
“그으-렇긴 한데! 해 볼게요!”
“아니요. 안 그러셔도 돼요. 사실 더 머물 이유가 없기도 하고…….”
“나만 믿어요!”
“필요 없…….”
“믿어요!”
프레르가 곤란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거절하는 이유 다 알아요! 괜히 기대했다가 실망할 게 두려운 거겠지. 일단 사람들하고 정 붙이게 해 줘야겠다.
“흐흐흐.”
한참 웃다가 고개를 들었다.
프레르는 멀리 떨어져서 지팡이를 검처럼 들고 있었다. 나는 의미심장하게 웃어 보이고 그에게 다가갔다.
“선술집에 가요!”
“대낮이에요.”
“그럼 광장!”
꽈당이와 인사하고 무작정 그를 끌고 광장으로 갔다.
눈이 마주치자 마을 사람들이 인사를 해 왔다.
“이게 누구야! 관리인님 아니야?”
“관리인님! 방앗간 이용료가 너무 비싸요.”
“맞아. 화덕 이용료도 그렇고!”
인사와 불만 사항이 뒤섞여 몰려왔다.
“네. 다 검토해 볼게요! 제가 다녀오는 동안 프레르 씨 좀 챙겨 주세요.”
“누구? 아, 목장지기 아니야?”
“목장지기라고?”
사람들이 서로의 눈치를 봤다. 나는 사람들 사이에 프레르를 밀어 넣었다.
“정말 괜찮은 사람이에요.”
“아니, 저는…….”
프레르가 어색한 듯 손을 내저으려 했으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말이 끊기고 말았다.
“관리인님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하면 괜찮은 사람이겠지.”
“그동안 멀리해서 미안해요.”
“이리 와! 저기 가서 뭐라도 먹자고. 술 할 줄 알아?”
“아, 아니…….”
갑작스러운 인파에 휩쓸린 프레르가 나에게 손을 뻗었다. 엄청난 기세에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고 말았다.
“관리인님! 살려 주세요! 관리인님!”
이래서 프레르가 도망쳤구나. 나는 뒷걸음질 치면서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못 살려요!”
“안 살리는, 으악!”
프레르는 단말마를 마지막으로 내 곁을 떠났다. 시냇물에 떨어진 나뭇잎처럼. 그렇게 떠내려가고 말았다.
맺히지도 않은 눈물을 닦으며 그에게 손을 흔들어 준 뒤, 몸을 돌렸다.
그러다 뒤늦게 아차 싶었다.
‘그런데 계약 연장하려던 사람을 붙잡아 두면 라이오넬 좋은 일 시키는 거 아니야?’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프레르를 보며 잠시 고민했다.
‘에잇. 이미 약속한 걸 뭐 어쩌겠어! 혹시 알아? 망치려고 할 때마다 잘됐으니까 잘하려고 하면 망칠지!’
망치든 잘되든 어쨌든 프레르나 복수 둘 중 하나는 건질 수 있어! 그러니까 최선을 다해야지.
라이오넬도 계약 연장을 권유했다니까, 기간을 확 늘려 정착시키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고개를 끄덕이고 곧장 라이오넬에게로 향했다.
그런데,
“안 돼.”
라이오넬이 거절했다.
“왜죠?”
“그대야말로 이유가 뭐지?”
“네?”
“몇 번 보지도 않은 목장지기의 계약을 왜 연장해 달라고 하는 거지?”
어린 시절의 내가 떠올라서지만, 나를 믿지도 않는 라이오넬에게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진 않았다.
“꽈당이 친구니까요.”
“꽈당이?”
라이오넬이 그게 누구냐는 눈으로 고개를 옆으로 까딱였다.
……당나귀라고 하면 화내겠지?
“나, 나중에 소개해 드릴게요.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에요!”
나는 뒤에서 일하고 있는 레반스와 리지에게 도움의 눈길을 보냈다. 그러자 레반스가 목을 가다듬었다.
“각하. 목장…….”
“나가.”
그리고 말도 꺼내기 전에 쫓겨났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라이오넬은 리지를 물끄러미 보았다.
“저는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나가.”
조용하게 항변하던 리지가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보며 집무실을 나갔다.
괜찮아요, 리지. 다 이해해요.
고개를 끄덕이자 리지가 다시 달려와 나를 꽉 끌어안았다.
“넬리 님이 하시는 일에는 다 뜻이 있다구요!”
그러고는 라이오넬에게 소리친 뒤 후다닥 뒤돌아 문을 향해 뛰었다.
물론 제 다리에 걸려 휘청거리다가 서류를 엎어 버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놀란 리지가 허둥지둥 서류를 주우려 했다. 보통 리지가 수습하려고 하면 더 큰 일이 나기 때문에…… 내버려 뒀다.
잉크라도 엎어요, 리지! 펜을 다트처럼 날려 버려요!
속으로 응원했으나 안타깝게도 라이오넬이 입을 열어 그녀의 행동을 막았다.
“됐으니까 두고 나가.”
“네…….”
라이오넬이 바닥에 흩어진 서류를 보며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후…….”
속에서 열불이 나는 모양이다!
나는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겨우 붙잡아 두고 괜히 목을 가다듬었다.
“흠! 몇 번 안 봤지만 알 수 있어요. 원래 동물 좋아하는 사람치고는 나쁜 사람 없다잖아요.”
“나쁘진 않은데 미치광이일 순 있지.”
“프레르는 안 미쳤어요.”
“조용히 미친놈이 더 무서운 법이야.”
“프레르는 멀쩡해요. 그리고 이미 계약 연장하자고 하셨다면서요.”
“그래. 고작 1년이지. 그대가 요구한 것처럼 10년이나 종신 계약을 하는 게 아니라.”
“일단 그렇게 계약하고, 두고 보다가 이상한 사람이면 내쫓으세요.”
“중대한 이유 없이 계약을 파기하면 소송에 휘말릴 수 있다는 걸 모르나?”
어쩌지. 떼라도 써 볼까? 드러누워? 바닥을 힐끗거리는데 라이오넬의 목소리가 들렸다.
“관리인.”
“네?”
“목장지기에게 1년간 계약을 연장하겠다는 대답을 가져와. 그게 아니라면 말도 꺼내지 마.”
“그렇지만 프레르를 놓치면 후회하실걸요? 이다음도, 다다음도, 다다다음에 오는 사람도 이상한 사람들뿐일 거예요.”
“헛소리.”
“이제 절 믿으실 때도 됐잖아요.”
“믿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