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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제발 좀 망하세요 (22)화 (22/130)

22화

그의 질문에 톰이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봤다. 그러다 라이오넬과 눈이 마주쳤다.

차마 그 시선을 피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던 톰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사실 약 일주일 전에 달걀 껍데기를 대량으로 가져다 달라고 하셨습니다.”

“흠……. 용도는?”

“어디에 쓴다는 말은 없었습니다.”

라이오넬의 표정이 좋지 않게 변하자 톰이 냉큼 넬리를 변호했다.

“분명 밭에 해를 끼치진 않을 겁니다. 넬리 님이 ‘흐흐흐.’ 하고 웃으셨거든요.”

“보통 ‘흐흐흐.’ 하는 웃음 뒤에는 음흉한 꿍꿍이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나?”

제정신이냐는 투에 감독관들이 손을 내저어 황급히 부정했다.

“하지만 넬리 님의 흐흐흐는 다릅니다!”

“맞습니다. 항상 음침하게 웃으신 뒤에는 좋은 일이 생겼습니다. 그치?”

“예, 맞습니다.”

제럴드와 소피까지 가세해 열렬하게 넬리를 싸고돌았다. 그래도 라이오넬의 표정이 풀리지 않자 톰이 다시 말을 덧붙였다.

“저희는 그래서 ‘행운의 흐흐흐’라고 부릅니다.”

“혹은 ‘흐흐흐 하셨다’라고 하거나요.”

이번엔 리지가 트로피를 자랑하는 듯한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라이오넬은 가만히 네 사람을 둘러보았다.

“뭔가 수상하지 않나?”

“무엇을 말씀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영지민들은 이제껏 관리인에게 적대적이었지.”

감독관들과 리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넬리 페퍼는 한 달 만에 영지민들에게 호의를 얻어 냈다. 너희의 신뢰 역시. 마치 작정하고 들어온 사람처럼 말이야.”

라이오넬의 말이 끝나자마자 감독관들이 말도 안 된다는 얼굴로 우르르 말을 쏟아 냈다.

“그건 당연한 일입니다. 이전 관리인들은 권위주의적이고 영지민들을 노예처럼 부리려고 했습니다.”

“거기다가 저희 이름을 외울 생각도 하지 않고 무례한 호칭으로 불렀습니다. 그렇지만 넬리 님은 다릅니다.”

“얼마 전에는 파우트가 술을 마시다가 넬리 님께 어떻게 은혜를 갚아야 할지 모르겠다며 오열했습니다. 넬리 님이 보답으로 받은 음식까지 전부 자신에게 주었다고요.”

“맞아요! 사실 제가 만든 보고서도 넬리 님이 만든 것처럼 공을 가로챌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셨어요!”

눈치를 보던 리지가 한마디 더 내뱉었다.

“그리고 제가 겁먹었을 때 공작님과 보좌관님들은 무서운 사람이 아니라고 변호해 주셨는걸요! 그런 넬리 님을 의심하시다니, 너무하세요…….”

리지가 울먹거리자 라이오넬은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그냥 넬리 님이 다정하고 성실하셔서 사람들의 신임을 얻은 거예요.”

다들 이런 식이니 이제 정말 자신이 넬리 페퍼에 대해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건가 싶었다.

혼란스러운 와중에 소피의 목소리가 라이오넬의 뇌리에 박혔다.

“넬리 님이 뭔가를 하신다면 분명 다 뜻이 있는 겁니다!”

그 한마디가 라이오넬의 정신을 번쩍 일깨웠다.

라이오넬은 고개를 들어 믿었던 부하 3명과 그다지 믿지는 않았던 업무 보조 1명을 보았다.

그들의 눈은 마치 광신도처럼 빛나고 있었다.

‘이놈들, 맛이 갔군. 타인을 아무런 의도 없이 이렇게 홀려 놓을 순 없는 법이지.’

역시, 넬리 페퍼는 수상하다. 그의 의심은 오히려 전보다 더욱 견고해졌다.

* * *

남자는 언제 일어났는지 양들을 풀어놓고 있었다. 나는 꽈당이를 끌고 남자에게로 다가갔다.

“목장지기죠?”

이름이 뭐였더라. 목장지기는 자주 바뀌어서 기억이 잘 안 난다.

이 남자는 내가 관리인이 되고 1년도 채 되지 않아 계약이 끝났다. 목초지에는 내가 직접 올 일이 없기에 사실 죽기 전에는 만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름이…….”

“그냥 편한 대로 부르세요. 어차피 얼마 뒤에 떠날 건데요.”

남자가 맹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하품했다.

어색하게 볼을 긁적이다가 그에게 꽈당이를 넘겼다. 남자는 꽈당이의 고삐를 풀어 초원에 풀어 주었다.

“꽈당아. 내일 또 올게!”

“꽈당이요?”

“제가 지어 줬어요.”

“쟤 이름은 벡시아드리아 라렐리우스인데요?”

“왜죠?”

왜 당나귀 이름이 제 이름보다 멋있는 거죠?

“제가 그렇게 정했으니까요.”

할 말이 없다.

“편하게 벡시라고 부르세요.”

“알겠어요, 벡시.”

“제 이름은 프레르인데요.”

“알겠어요, 프레르. 프레르도 내일 봐요. 꽈당이 안녕!”

꽈당이에게 크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물론 꽈당이는 친구들과 풀을 뜯느라 나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나쁜 당나귀. ……매력적이야.

까맣고 하얀 꽈당이를 한 번 더 보고 관리소로 돌아갔다.

문을 열자마자 오크 통을 둘러싸고 있는 감독인들이 보였다.

잠깐, 오크 통?

“으악!”

비명을 지르며 달려가 오크 통을 끌어안았다. 등 뒤로 여러 개의 시선이 느껴졌다.

리지한테 비밀로 하라는 말을 안 해 두다니! 은밀하게 복수할 생각은 있긴 한 거야? 있긴 하냐고, 넬리 페퍼!

오크 통에 머리를 박으려는데 오크 통과 이마 사이로 손이 불쑥 끼어들었다.

“아침부터 요란하군.”

라이오넬이 왜 여기 있지? 아까는 없었잖아!

당황해 눈을 굴리는데 그가 손을 빼내고 일어났다.

“따라 들어와.”

그러더니 내 사무실로 들어갔다.

뭐야. 무슨 말 하려고 그러지? 오크 통에 관해 물어보려고 그러나? 그럼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안으로 들어갔다.

책상 위에 쌓인 서류를 들춰 보던 라이오넬이 내 자리에 앉았다. 그는 긴 다리를 멋들어지게 꼬고 무릎 위에 깍지 낀 손을 올려 두었다.

괜찮아. 긴장 풀자.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낮술 했나?”

“컥, 콜록, 콜록!”

사레들렸잖아!

격렬하게 기침을 하자 라이오넬이 상체를 뒤로 뺐다. 인상을 찌푸린 그를 향해 보란 듯이 기침을 하다가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자리에 앉아 시선을 피했다.

“낮술 안 했는데요.”

“그럼 오크 통은 뭐지?”

아니, 누가 술을 오크 통째로 마셔요. 억울하다는 눈으로 쳐다보자 그가 묘한 표정으로 나를 빤히 보았다.

눈치챘나? 물어보려나?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다리가 덜덜 떨린다. 괜히 무릎을 찰싹찰싹 내리치는데 라이오넬이 시선을 거둬들였다.

그리고 품에서 뭔가를 꺼내 내 앞에 두었다.

“이게 뭐예요?”

라이오넬이 대답 없이 열어 보라는 듯 턱짓했다.

나는 그의 눈치를 보다가 종이 쪼가리를 들어 올렸다.

고급스러운 종이 위, 수신자를 적는 곳에 내 이름이 쓰여 있었다. 그리고 발신자는…….

“아델하르트 왕자?”

왕궁에서 열리는 무도회에 초대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걸 왜 나한테 보내? 저번에 보니까 라이오넬하고 사이도 안 좋아 보이던데!

설마 이거 때문에 또 첩자로 의심받는 건 아니겠지?

“저는 왕자님하고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건 봐서 알아.”

“응?”

그럼 이건 왜 가져온 거람?

고개를 기울이고 가만히 있자 라이오넬이 초대장을 끌어와 한번 훑었다.

“나와 함께 가지.”

“제가요? 무도회를요?”

“그래.”

“공작님하고요? 왜요?”

“전부터 느낀 건데 나를 뭐라고…….”

“네?”

“…….”

라이오넬이 됐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가 잠시 침묵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무도회에 참석하면 좋을 텐데. 귀족 사회에 편입할 기회는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게 아니야.”

“관심 없어요.”

지금 내 관심은 오직 복수뿐이라고!

“진심인가?”

라이오넬이 턱을 괴고 물었다.

저 눈초리. 이미 알고 있다. 또 의심하는 거다.

“미리 말하는데, 저는 왕자님한테 붙을 생각도 없어요. 어쭙잖게 귀족들에게 잘 보일 생각도 없고요.”

“누가 뭐라고 했나?”

속에서 천불이 난다. 죽기 전에는 감히 무서워서 하지 못했던 말이 입 밖으로 줄줄 새어 나왔다.

“눈빛으로 뭐라고 하고 계시잖아요! 무슨 일 생길 때마다 떠보는 거 정말 서운하거든요? 남은 열심히 하고 있는데…….”

물론 지금 열심히 하는 건 일이 아니라 복수지만. 양심이 따끔거릴 타이밍인데 죽기 전에 당한 걸 생각하니 따끔하긴커녕 후련했다.

콧김을 흥 내뿜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 일 해야 해요!”

라이오넬은 묘한 미소를 머금고 초대장을 다시 품에 넣었다.

“그럼 나도 거절해야겠군. 마땅한 파트너가 없으니.”

저것 봐. 내가 무도회에 갈 마음이 있나 없나 또 떠보는 거. 진짜 미워 죽겠어.

“그러세요.”

문을 벌컥 열고 그의 등을 떠밀었다. 라이오넬은 의외로 아무런 말도 없이 얌전히 떠밀려 주었다.

일말의 양심은 있는 모양이다.

물론 그렇다고 얄미운 게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 * *

일주일이 더 지났다.

식물용 독은 첫날 너무 신나게 뿌려 댄 나머지 동이 났다. 덕분에 달걀 껍데기를 만족스러울 만큼 다시 모으는 데 시간이 조금 걸렸다.

그래서 아직 식물용 독은 제조 중이었다. 하지만 꽈당이와 만나는 건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빨리 가서 꽈당이랑 놀아, 아니지, 뇌물을 먹여야지!’

이럴 줄 알고 어제 메리에게 말해 거대한 설탕 과자도 어렵게 구해 놨다.

프레르의 말에 따르면 당나귀는 설탕에 사족을 못 쓴단다.

“흐흐흐.”

음침하게 웃다 보니 목초지가 보였다. 꽈당이는 오늘도 과묵한 당나귀답게 수다를 떨고 있는 친구들 사이에서 조용히 풀을 뜯고 있었다.

“꽈당아!”

소리치자 당나귀들이 일제히 나를 쳐다봤다. 한꺼번에 시선이 쏠렸지만 무섭지 않았다.

분명 콧방귀를 끼고 나를 무시, 무, 무시해야 하는데……? 왜 눈을 까뒤집고 달려오는 거야!

“으아악!”

소리를 지르며 뛰어가자 뒤에서 무시무시한 발굽 소리가 들렸다.

“프레르! 살려 주세요, 프레르!”

내 구조 요청을 들었는지 프레르가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답지 않게 크게 소리쳤다.

“못 살려 줘요!”

“뭐라구요?”

“당나귀 무서워! 못 살려 드린다고!”

“뭐?!”

버럭 소리치자 프레르가 못 본 척 강아지를 쓰다듬었다.

마음 같아서는 한걸음에 달려가 이 당나귀 태풍에 그도 휘말리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작고 소중한 내 체력이 버텨 주지 않았고, 나는 금세 태풍의 눈이 되고 말았다.

“악! 잠깐, 이 당나귀들! 우리 꽈당이 주려고 가져온 거라고!”

손을 하늘 높이 뻗어 버둥거리다가 당나귀 태풍 사이에서 눈이 뒤집힌 꽈당이를 발견했다.

“꽈당이 너마저……!”

뒤에서 숨넘어가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노려볼 틈도 없이 손에 든 설탕 과자를 조각내 뿌렸다.

당나귀들이 환장하며 주워 먹기 시작했다. 그 틈을 타 몸을 숙이고 당나귀 태풍에서 빠져나왔다.

“허억, 헉, 헉.”

숨을 고르고 있는데 프레르가 맹한 얼굴로 다가왔다.

“그러니까 왜 그런 걸 들고 오셨어요.”

“꽈당이랑 더 친해지려고 그랬죠!”

“더 친해진 것 같긴 하네요.”

고개를 돌렸다가 제정신으로 돌아온 꽈당이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꽈당이가 갑자기 픽 쓰러졌다.

“우리 꽈당이가 이렇게 꽈당하는 애가 아닌데. 점잖은 당나귀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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