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흐흐흐. 당분간 네 신세 좀 져야겠다, 당나귀야.”
흥얼거리면서 창고 안으로 들어가 커다란 오크 통을 가져왔다.
거기다 내가 만든 식물용 독극물을 전부 붓고 물도 한가득 부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이게 물인지 뭔지 알아보지도 못할 정도로 옅어졌다.
“이제 이걸 꾸준히 뿌리기만 하면 돼.”
온 경작지에 뿌리기엔 양도 모자라고 내 체력도 모자라니, 일단 가장 비싼 작물을 심어 놓은 곳을 공략해야겠다.
오크 통에 대형 분사기를 연결했다. 그리고 지렛대를 이용해 수레에 싣고 수레를 당나귀에 연결했다.
“당나귀야.”
계속 이렇게 부르니까 정 없어 보이네. 이제 나와 공범이 될 앤데!
음……. 이름을 뭐로 하지? 과묵한 당나귀니까……. 과당, 과당, 꽈당.
“좋아! 넌 이제부터 꽈당이야. 알겠지?”
“…….”
과묵해서 좋구나.
꽈당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고 다시 고삐를 잡았다. 꽈당이가 키힝 키힝 조그맣게 울면서도 나를 잘 따라와 주었다.
나는 꽈당이를 끌고 다니며 액체를 뿌렸다.
특히 라이오넬이 좋아하는 딸기밭에는 더 꼼꼼히 공을 들였다.
“무럭무럭 죽어야 한다!”
슬슬 해가 뜨기 시작했다.
오크 통을 되돌려 놓기 위해 관리소로 돌아왔다. 고생한 꽈당이에게 사과를 잔뜩 챙겨 주자 허겁지겁 먹었다.
그사이 날이 완전히 밝았다.
밝은 곳에서 본 꽈당이는 새까맸다. 다만 주둥이와 눈 주변에만 설탕이 묻은 듯 하얀색이었다.
‘귀엽네.’
흐뭇하게 웃으며 꽈당이를 쓰다듬었다. 맛있는 걸 주어서 그런지 눈빛이 순해졌다.
역시 사람이든 동물이든 먹는 거로 길들여야 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는데 별안간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여기서 뭐 하세요?”
화들짝 놀라며 돌아보자 리지가 보였다.
“리, 리지가 여긴 어쩐 일이에요?”
“그냥 넬리 님도 보고 싶고, 또 레반스 님이 이걸 전해 주라고 하셔서요. 예산에 관한 서류인데…….”
리지가 말끝을 흐리며 꽈당이를 힐끔거렸다. 그러더니 서류를 꼭 끌어안은 채 나와 꽈당이를 번갈아 보았다.
누가 봐도 의심하는 모양새였다. 그리고 나는 누가 봐도 수상하긴 했다.
이른 아침에 오크 통과 대형 분무기와 당나귀를 데리고 있으니까.
“리지, 이건…….”
마른침을 꿀꺽 삼키는데 꽈당이가 별안간 소리 질렀다.
“꾸아악!”
“꺄아악!”
리지도 같이 소리를 지르며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일단 꽈당이를 나무에 묶어 놓고 리지에게 달려갔다.
“괜찮아요?”
“괜찮, 괜찮아요. 제가 사실 털 달린 건 사람 빼고 다 무서워해서요.”
리지는 다른 걸 들여다볼 여유가 없는 것 같았다. 이대로 관리소 안으로 들여보내면 오크 통과 분무기는 까맣게 잊겠지?
“그렇! 구나…….”
나도 모르게 활짝 웃었다가 리지와 눈이 딱 마주쳐 급하게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말끝을 흐리자 그녀가 울먹이며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일단 안에 좀 들어가 있을래요? 저는 꽈당, 아니 당나귀 좀 목초지에 데려다 놓고 다시 올게요.”
“알겠어요, 넬리 님.”
“따뜻한 차 마시고 있어요.”
“네.”
리지의 어깨를 다독여 준 뒤 꽈당이를 데리고 목초지로 돌아갔다.
* * *
라이오넬은 저에게 전달된 두 장의 초대장을 바라보았다. 하나는 넬리 페퍼에게 온 것이었다.
그런데 왕자의 전령이 모두 라이오넬에게 전달해 주었다.
의도가 뻔히 보이는 행동이었다. 넬리 페퍼의 소문은 이미 라이오넬도 들어 알고 있었다.
영지민들을 잘 챙길 뿐만 아니라 빈민을 걱정하는 여왕의 마음까지 헤아린다고 칭찬이 자자했다.
‘누군가는 넬리 페퍼를 탐낼 거라고 예상하긴 했지.’
영지를 가진 귀족들은 관리인으로 인한 고충이 많았다.
사실 관리인이 횡령한 뒤 도주하거나 영지 내에서 왕처럼 지내며 수탈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후자인 경우에는 그나마 기강을 바로잡는다는 이유로 처벌이라도 할 수 있었지만, 전자는 달랐다.
귀족의 체면이니 품위니 하면서 사기를 당해도 아무 말 못 했다.
그러니 귀족들이 성실하고 정직한 사람을 원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사람이 부하인 걸 싫어하는 사람이 있겠냐마는.
‘그게 아델하르트일 줄이야.’
라이오넬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내 관리인을 포섭하기라도 하겠다는 의미인가?’
선물 받은 드레스를 팔 정도면 돈으로 포섭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포섭해서 어디에 쓰려는 걸까?
왕자에게는 영지가 없다. 그러니 당연히 영지 관리인도 필요 없었다. 그리고 성실하고 유능한 사람은 그의 주변에 차고 넘칠 것이다.
그런데 초대장을 보냈다는 건, 넬리 페퍼에게서 무언가 특출난 점을 본 것인가? 아니면 단순히 내 것을 빼앗고 싶은 것인가?
‘하지만 골목에서 만났을 때만 해도 넬리 페퍼가 알터우드 공작령의 관리인이라는 것을 모르는 눈치였는데.’
역시 처음부터 아는 사이였던 걸지도. 연기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
“레반스.”
“예, 각하.”
“업무 보조는 어디 갔지?”
“리지 씨는 제 부탁으로 관리소에 서류를 전달하러 갔습니다.”
“흐음…….”
“또 왜 그러십니까?”
“그러고 보면 신기해. 그런 비상한 머리를 어떻게 감추고 살았지?”
“……정말 몰라서 물으십니까?”
레반스의 손가락이 벽 표면에 덧대 놓은 목조 실내장식, 랑브리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리지가 놀라 던져 버린 깃펜이 고스란히 꽂혀 있었다.
“굳이 감추려고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 같습니다만.”
라이오넬은 다트처럼 꽂힌 펜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넬리 페퍼는 그런 사람을 용케도 찾아냈군.”
서류를 보던 레반스가 작게 숨을 내쉬었다.
“설마 아직도 넬리 님을 의심하고 계신 겁니까?”
라이오넬은 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레반스는 대답을 알고 있었다.
그는 손에 든 깃펜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왜 그렇게 넬리 님을 의심하십니까?”
“내가 의심하지 않은 사람도 있었나?”
“목장지기인 프레르와 한 계약은 연장하고 싶으시다면서요.”
“목장지기 역시 완벽하게 믿는 건 아니야. 일을 잘하니까 더 두고 보려는 것뿐.”
“일은 넬리 님도 잘합니다.”
확실히 지금까지 보면 넬리 페퍼는 유능했다.
“그래서 내치지 않고 있잖아.”
레반스가 한숨을 감추며 제 상사를 빤히 보았다. 라이오넬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날 대하는 게 익숙해 보여.”
“하…….”
“그대와 아레트, 소피, 톰, 제럴드, 파우트에게도 친근하게 굴지.”
레반스가 그게 이유가 되냐는 눈으로 라이오넬을 보았다. 고민하던 라이오넬이 말을 덧붙였다.
“웃음소리가 기분 나빠.”
레반스의 눈빛에 아주 미약한 한심함이 깃들었다. 그 기색을 눈치챈 라이오넬이 다리를 꼬며 왼쪽 눈썹을 까딱였다.
“넬리 페퍼와 서로 이름을 부를 정도로 친해졌던데. 그래서 불손한 눈빛까지 닮아 온 건가?”
“크흠! 죄송합니다.”
레반스가 사과를 하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고 보니 어느샌가 넬리는 레반스를 성이 아닌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다. 라이오넬의 말처럼 이상할 정도로 친근하긴 했다.
레반스는 묘한 기시감을 지워 내고 다시 대화로 돌아왔다.
“제가 감히 한 말씀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해.”
“제가 보기에 각하께서는 이미 넬리 페퍼가 수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내가?”
“그러니까 은연중에 넬리 님을 관리인이 아닌 넬리 페퍼라고 부르시는 거 아닙니까?”
라이오넬의 심기는 매우 불편해 보였다. 그러나 레반스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솔직히 배신당하신 상처 때문에 억지로 넬리 님을 안 믿으려고 애쓰시는 거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헛소리.”
차갑고 단호하게 대답한 라이오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반스는 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는 제 상관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를 뒤로한 채, 라이오넬은 무작정 밖으로 나왔다. 손에는 여전히 넬리 페퍼 앞으로 온 초대장이 들려 있었다.
‘나온 김에 초대장이나 주고 와야겠군.’
그는 옅은 한숨을 내쉬고 말에 올라탔다.
관리소가 보일 즈음 넬리도 보였다. 그녀는 당나귀를 끌고 숲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 옆에는 커다란 오크 통과 대형 분사기, 그리고 리지가 굴러다니는 중이었다.
라이오넬은 넬리를 부를까 하다가 리지에게로 말 머리를 돌렸다.
“여기서 뭐 하는 거지?”
“헉! 공작님!”
라이오넬은 말에서 내려서 오크 통을 살폈다.
“사고라도 친 건가?”
“아, 아, 아아니요!”
리지가 말을 심하게 더듬었다.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설명하라는 눈빛으로 바라보자 손을 휘젓던 리지가 말을 이었다.
“저는 그냥 넬리 님이 데리고 있는 당나귀를 보고 놀라서 그만…….”
“당나귀?”
“네! 당나귀한테 연결한 수레에 오크 통을 싣고 분무기로 작물에 물을 주고 계시더라고요!”
물이라니. 근래에 비가 오지 않긴 했지만 물을 끌어다가 뿌려 줘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오크 통을 열어 냄새를 맡았다.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오묘한 냄새가 났다.
“그래서 뭐 하시냐고 물었더니 엄청 당황하시던데, 아무래도 또 혼자 몰래 좋은 일을 하고 계셨나 봐요!”
라이오넬은 몸을 바로 세우고 오크 통을 내려다봤다.
‘믿을 만하면 수상한 짓을 하니, 믿고 싶어도 믿을 수가 있나.’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긴 숨을 내쉬었다.
출근하던 톰과 제럴드가 라이오넬을 발견하고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뒤이어 오던 소피도 긴장한 표정으로 라이오넬에게 인사했다.
라이오넬은 고갯짓으로 인사를 받고 딱딱하게 굳어 있는 세 명의 관리인에게 명령했다.
“들고 따라 들어와.”
“예, 각하!”
각 잡힌 대답 세 개가 동시에 들렸다. 빈 오크 통은 그다지 무겁지 않았기에 제럴드 혼자 들고 들어왔다.
톰과 소피 그리고 눈치를 보던 리지가 그 뒤를 따라 관리소로 들어왔다.
라이오넬이 소파에 앉자 제럴드가 그 앞에 오크 통을 내려놓았다.
“이게 뭐로 보이나?”
라이오넬의 질문에 톰이 손을 번쩍 들었다.
“빈 오크 통입니다!”
“안에 들어 있던 건?”
네 명의 사람들이 오크 통 안에 고개를 처박았다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굉장히 찝찝한 냄새가 납니다.”
소피가 진저리를 쳤다.
라이오넬이 가라앉은 눈으로 오크 통을 응시했다.
“넬,”
습관적으로 넬리 페퍼를 이름으로 부르려던 그는 레반스의 말을 떠올리고 재빨리 호칭을 정정했다.
“관리인이 오늘 여기에 들어 있던 액체를 밭에 뿌렸다더군. 혹시 최근 관리인이 수상한 것을 요구하지 않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