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생각만 해도 짜릿해! 콧노래가 저절로 나온다!
나는 흥얼거리면서 관리소로 돌아갔다.
그렇게 3일이 지났다.
전날 밤은 라이오넬이 얼마나 수척해져 있을지 상상하느라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극상의 통쾌함을 위해 일부러 3일간 리지도 만나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 퇴근하자마자 라이오넬의 집무실로 달려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손에 힘이 들어갔는지 나도 모르게 문을 벌컥 열었다.
“넬리 님!”
리지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밝다.
불안한 마음을 안고 레반스를 봤다. 그의 얼굴도 지나치게 밝았다.
라이오넬도 컨디션이 괜찮아졌는지 안경을 안 쓰고 있었다.
그래. 아직 3일밖에 안 지났으니까 긴장이 안 풀려서 그러겠지. 관리소에서 일할 때도 그랬으니까.
아마 다음에 올 즈음엔 분명 혈압에 시달리는 라이오넬을 볼 수 있을 거야.
나는 보고를 마치고 나가며 리지를 응원했다.
“리지. 긴장 풀고 편하게 일해요!”
“네!”
시원하게 대답하는 리지를 보니 한결 마음이 놓인다.
하지만 리지를 처음 집무실에 데려다주었을 때만큼 발이 가볍지는 않았다.
‘불안해. 설마 또 라이오넬 좋은 일만 한 건 아니겠지?’
아니야. 이런 생각 하지 말자.
말이 씨가 된다잖아! 고개를 거칠게 휘저어 생각을 떨쳐 냈다.
3일 뒤엔 분명 난리가 나 있을 거야. 리지는 삼일천하, 아니 삼 일 천재니까!
이번에는 리지의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해 간간이 만났다.
내 예상대로 리지는 점점 시무룩해졌다. 이건 좋은 신호다. 리지가 실수한다는 신호!
나는 위로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내리누르며 리지의 손을 잡았다.
“리지. 무슨 일 있어요?”
“요즘 자꾸 실수를 해요……. 이러다 잘리면 어쩌죠?”
“그럼 다시 관리소에 나와서 일하면 되지 뭐가 걱정이에요! 리지가 직장을 잃는 일은 절대 없을 테니까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일해요.”
“넬리 님……!”
리지가 글썽이는 눈으로 나를 보다가 와락 안겨 들었다.
등을 토닥이는데 조금 죄책감이 들었다. 리지가 관리소로 돌아오면 전보다 두 배는 더 잘해 줘야지!
그렇게 다시 3일이 지났다.
한껏 기대를 품고 집무실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근처에 가자마자 비명이 들렸다.
“꺄악!”
까마귀가 맑고 또랑또랑하게 우는 것 같은 비명!
이건 분명 리지가 큰 실수를 저질렀을 때 내는 소리야!
빠르게 달려 문을 벌컥 열었다. 바닥에 잉크가 빗물처럼 고여 있었다. 라이오넬은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 있었다.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웃으면 안 되지.’
재빨리 입을 가리고 상황을 살폈다.
뭐 하나라도 망했어라! 기왕이면 라이오넬이 한 거였으면!
주문을 외며 둘러봤다. 하지만 서류는 멀쩡했다. 그냥 바닥에 잉크를 쏟은 게 다였다.
“리지. 괜찮…….”
“넬, 꺄악!”
나를 보고 놀란 리지가 황급히 움직이다가 팔꿈치로 서류를 쳤다.
좋아! 저대로 떨어지면 잉크 범벅이 될 거야!
기대하며 보고 있는데 아레트가 팔을 뻗어 서류를 턱 잡았다. 그리고 순식간에 툭툭 쳐서 정리했다.
저런, 아레트…….
“감사합니다, 잉크는 제가 치울게요!”
리지가 황급히 움직여 잉크를 닦기 시작했다. 그러다 레반스의 책상에 쿵, 부딪쳤다.
세워 둔 깃펜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떨어져! 떨어져! 서류 위로 떨어져!’
내적 박수에 맞춰서 깃펜을 응원하고 있는데 이번엔 레반스가 손을 뻗었다. 가녀린 깃펜이 레반스에게 붙잡혔다.
악덕 업주 같으니라고. 깃펜이 누워서 쉬겠다는데 다시 세워 놓다니! 깃펜이 서류를 이불처럼 덮고 자게 내버려 두란 말이야!
안타까운 눈으로 깃펜을 보고 있는데 둔탁하고 짧은 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리지가 또 뭐를 쏟았나 싶어 고개를 돌렸는데 아니었다. 라이오넬이 멍하니 있는 나를 부르기 위해 책상을 두드린 것이었다.
“보고.”
라이오넬이 소금을 요구할 때처럼 재수 없게 말했다.
악의가 있는 건 아니다. 그냥 귀하게 자란 데다가 전쟁터에 오래 있어서 말이 짧은 것뿐이었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아무리 들어도 얄미운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목소리를 내리깔아 그의 말투를 흉내 내며 잘려 나간 뒷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라이오넬이 뭐라고 하기 전에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냉큼 이어서 대답했다.
“좀 해 주겠나? 네! 그럼요.”
뒤에서 리지와 레반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라이오넬이 나를 뜨거운 눈으로 쳐다봤지만 가볍게 무시했다.
……사실 무서워서 못 쳐다봤다.
“여기 장부와 보고서예요.”
그의 앞에 서류를 내려놓은 뒤 보고를 시작했다.
하지만 뒤에서 들리는 소리 때문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분명 서류 정리만 하는 곳인데 왜 대련하는 소리가 나는 걸까?
슬쩍 돌아봤다. 뒤에 펼쳐진 광경은 검술 고수들의 대련을 방불케 했다.
리지가 물건을 떨어트리면 아레트가 묘기에 가까운 손놀림으로 전부 받아 냈다. 그리고 리지가 넘어지려 그러면 잡아 주었다.
‘저게 바로 창과 방패……. 아니, 돌발 사고와 반사신경의 싸움인가?’
레반스 역시 만만치 않았다.
리지의 갑작스러운 몸통 박치기가 수차례 이어졌으나 그의 물건들은 전부 정리되어 있었다.
리지가 무언가 물어보거나 계산해 주기 위해 왔다가 실수하는 것도 모두 막아 냈다.
리지가 산사태라면 아레트는 돌벽이고, 리지가 파도라면 레반스는 방파제였다.
‘내 인간 재해가…….’
예방당하고 있어!
탄식하며 바라보는데 라이오넬이 보고에 집중하라는 듯 책상을 두드렸다.
“넬리 페퍼.”
정신이 확 들어 고개를 돌렸다.
“흠! 죄송해요. 어디까지 했죠?”
라이오넬이 손가락으로 보고서에 한 부분을 가리켰다.
나는 보고를 다시 시작하면서도 리지를 응원했다.
‘조금만 더 힘을 내! 관리소에서 했던 것처럼 다 휩쓸어! 라이오넬 똘마니들한테 지지 마!’
리지와 눈이 마주쳤다. 결의에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내 응원이 먹혔는지 리지가 울먹이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소강상태가 되었다. 지나치게 차분해졌다.
아니, 긴장하란 뜻이 아니었는데!
어깨를 늘어트리며 보고를 마무리하는데 라이오넬이 말을 걸었다.
“걱정되나?”
“아니요. 잘하고 있잖아요.”
“잘한다?”
라이오넬이 턱을 괴며 묘한 침음을 냈다.
혹시 잘못하고 있나? 리지는 라이오넬이 감당하기엔 버거운 사람인가? 기왕이면 매우 감당이 안 되는 사람이면 좋겠다!
반짝이는 눈으로 라이오넬을 보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없는 것보다는 낫더군. 적어도 먹고 잘 시간은 벌었으니.”
리지 폭풍에 정신이 없길 바랐는데 그렇진 않은가 보다. 애써 실망을 감추고 웃었다.
“다행이네요.”
그래.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리지 같은 천재가 합류했는데 먹고 잘 여유만 생긴 거면 다행스러운 일이지.
만약 더 여유가 생겼다면 라이오넬은 없는 일도 만들어서 했을 것이다.
물론 그를 걱정하는 건 아니다.
상사가 일을 만들면 아랫사람은 바빠지기 마련이니까!
“그럼 저는 이만 가 볼게요.”
라이오넬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이번에도 실패라니. 솔직히 맥이 빠진다. 터덜터덜 걷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래도 파우트 씨 때에 비교하면 장족의 발전이야.
라이오넬에게 엄청난 이득을 안겨 준 건 아니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을 위로하는데 리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넬리 님!”
뒤로 돌자 제 발에 걸려 넘어지려는 리지가 보였다. 재빨리 다가가 그녀를 잡아 주었다.
“괜찮아요?”
“네…….”
리지가 시무룩하게 대답하고는 한 발 물러서서 내 손을 꼭 잡았다.
“다 넬리 님 덕분이에요! 보좌관님과 기사단장님의 반사신경을 알고 저를 공작성으로 보내신 거죠?”
아니요. 알았다면 보내지 않았을 거예요.
아련하게 미소 짓자 리지가 감동한 얼굴로 코를 훌쩍였다.
“저 반드시 넬리 님께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될게요! 지켜봐 주세요!”
그러고는 대답도 듣지 않고 뒤돌아 뛰어갔다. 물론 중간에 한 번 넘어지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전 괜찮아요!”
씩씩하게 일어나 소리치는 리지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 쉬듯 웃었다.
난 안 괜찮은데…….
* * *
영지는 잘 굴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내 복수는 그냥 굴러다니기만 했다.
라이오넬의 돈이라도 왕창 쓰려고 벌인 일들은, 알량한 속셈 때문인지 끝이 좋지 못했다.
천막은 영지민의 사기를 증진시켰다. 농기구 교체는 막대한 돈이 들었지만 그만큼 경작 속도가 빨라졌다.
리지는 무슨 방법을 쓴 건지 실수가 많이 줄었다. 덕분에 아레트 없이도 영주관의 업무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아레트는 본업에 집중해 경비를 강화했다. 치안이 좋아지자 라이오넬의 평판도 자연스럽게 높아졌다.
“역시 망했어…….”
우울하게 중얼거리며 책상에 엎드렸다.
내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던 소피가 깜짝 놀라 문을 열어 둔 채 달려왔다.
“넬리 님! 왜 그러세요? 어디 아프세요?”
동시에 책상 위로 머리들이 튀어나왔다.
“뭐? 넬리 님이 아프시다고?”
“어디요? 어디가 아프신데요?”
“쉬어야 합니다.”
“맞아요. 쉬세요!”
“쉬셔야 해요.”
“쉬세요!”
감독관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그리고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게, 꼭 ‘쉬세요.’라고 우는 참새 떼 같았다.
멀쩡하던 머리가 다 아플 지경이라 이마를 짚었다.
“머리가 아프신가 봐!”
“제가 두통약을 가져오겠습니다.”
“머리가 아프면 쉬셔야 할 텐데.”
“맞아요. 쉬세요!”
나는 손을 내저어 사람들을 진정시켰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일이 잘 안 풀려서…….”
“안 풀릴 땐 쉬셔야죠!”
……제발 ‘쉬세요.’를 멈춰 주세요!
말릴 힘도 없어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자 소피가 책상을 쾅 내리쳤다.
“다 조용히 해 봐요! 넬리 님이 정신없어하시잖아요!”
그러더니 조용해진 ‘쉬세요.’ 참새 떼들을 내 사무실에서 몰아냈다. 나는 그제야 한숨 돌리며 손을 내렸다.
“고마워요, 소피.”
“뭘요. 그런데 무슨 일 때문에 그러세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소피는 잠시 서운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그러다 내 손을 잡아끌었다.
“어차피 내일 쉬니까 오늘 일찍 퇴근해서 기분 전환이라도 하세요.”
“네? 하지만 아직 일이…….”
“그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근데 보고도, 오늘 보고도 해야 하는데……?”
“걱정하지 마시라니까요.”
소피의 손에 억지로 떠밀려 방으로 돌아왔다.
침대에 누웠는데 영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그냥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다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이렇게 있는다고 뭐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소피 말대로 기분 전환이라도 하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입을 만한 옷을 찾기 위해 문을 열었다. 그러자 라이오넬이 선물해 준 드레스들이 보였다.
‘맞아. 저것들 다 팔아 버리려고 했는데 바빠서 잊고 있었어.’
제일 수수한 옷 한 벌 빼고 전부 옷장에서 꺼냈다. 무겁긴 또 어찌나 무거운지 팔이 다 아플 지경이었다.
“메리 씨!”
뒤뚱뒤뚱 걸어 문을 겨우 열고 큰 소리로 메리를 불렀다. 그러자 감색 하녀복을 입은 내 또래의 여자, 메리가 우아하게 다가왔다.
“찾으셨나요?”
“큰 가방 좀 구할 수 있을까요? 저 드레스를 다 넣으려고요.”
힐끗 방 안을 본 메리가 사색이 되었다.
“무례인 줄 알지만 한 가지 여쭤봐도 될까요?”
“네!”
“도주하시는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