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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제발 좀 망하세요 (16)화 (16/130)

16화

리지가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소리가 더 커지기 전에 일단 오해부터 풀어야겠다.

“리지. 진정해요. 계약서를 바로 주지 않은 건 다른 제안을 하기 위해서예요.”

“제, 크흥! 제안이요?”

리지가 왼쪽 소매에 코를 흥 풀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리지의 오른편에 붙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관리소 말고 영주관에서 일해 보는 건 어때요?”

“제가 공, 공, 공, 공,”

고장 난 톱니바퀴가 헛도는 것처럼, 리지가 같은 말을 반복했다. 나는 황급히 양손을 내저었다.

“당장 가라는 건 아니에요! 오늘 보고하면서 말이라도 꺼내 보려고요.”

“……하지만 저 같은 게 괜찮을까요?”

“저 같은 거라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자신감을 가져요. 리지는 천재라니까요?”

리지가 감동한 얼굴로 나를 빤히 보다가 와락 안겨 들었다.

“그런 말씀을 해 주신 건 관리인님이 처음이에요. 이제껏 쓸모없다는 소리만 들었는데…….”

그러고는 말끝을 흐리며 내 허리를 꽉 끌어안고 울음을 터트렸다. 허리춤이 리지의 콧물로 축축해졌다.

나는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며 생각했다.

옷 갈아입어야지.

* * *

“넬리 님 오셨습니까?”

레반스가 다 죽어 가는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고개를 돌리니 라이오넬의 오른편엔 웬일로 아레트도 있었다. 그 역시 관짝에 들어갔다 나온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레트는 기사단장이기 때문에 서류 업무는 많이 보지 않는다.

그런 그가 저런 몰골로 라이오넬의 옆에 앉아 있는 이유는 하나다.

‘아레트의 곰 같은 손이라도 빌려야 할 정도로 일이 많다는 뜻이지!’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려는 음침한 웃음을 참고 라이오넬에게 다가갔다.

며칠간 제대로 먹지 못한 것인지 얼굴이 반쪽이다. 콧잔등에는 안경이 걸려 있었다.

라이오넬은 피로 때문에 시력이 떨어지면 가끔 안경을 썼다.

처음 보는 모습이 아니라 어색하진 않았다. 다만 인상이 두 배는 더 차가워 보여 말 걸기가 어려울 뿐이었다.

“보고해.”

역시나 목소리도 얼음장 같다.

나는 일단 그의 앞에 장부를 내려놓았다.

3일 동안 있었던 일을 보고하는 사이 그는 장부를 열었다. 훑어보는 표정이 뭔가 심상치 않았다.

보고를 마치자마자 아니나 다를까 라이오넬은 깔끔해진 장부를 언급했다.

“한결 보기 쉽군.”

“그렇죠?”

입꼬리가 천장을 향해 치솟았다.

잠시 나에게 시선을 준 라이오넬이 안경을 벗으며 피곤하다는 듯 얼굴을 쓸어내렸다.

“보고가 끝났으면 나…….”

“누가 정리했는지 안 궁금하세요?”

나가라는 명령이 입 밖으로 나오기 전에 냉큼 의자를 끌어다 그의 앞에 앉았다.

그리고 책상 위에 보고서를 펼쳐 두었다.

“이것 보세요. 보고서도 훨씬 깔끔하죠? 내용도 많고요. 일 처리 속도도 빨라졌어요.”

내 말에 레반스가 관심을 보였다. 그러더니 은근슬쩍 다가와 내 어깨너머로 서류를 힐끔거렸다.

“확실히 그렇군요.”

“레반스 님이 보시기에도 그렇죠?”

레반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오넬이 나와 레반스를 번갈아 보더니 왼쪽 눈썹을 미세하게 까딱였다. 그리고 서류를 그러모아 정리했다.

“상으로 월급이라도 올려 달라고 할 셈인가?”

“제가 한 게 아니에요.”

잉크 병에 깃펜을 담그려던 라이오넬이 나를 쳐다봤다.

그는 펜을 세워 두고 깍지 낀 손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더 이야기해 보라는 뜻이었다.

“새로 고용한 감독관 중에 리지라는 아이가 있는데, 천재예요! 손도 정말 빠르고, 보세요. 장부도 엄청 깔끔하게 정리한다니까요?”

은근슬쩍 라이오넬이 정리한 서류를 엉망으로 펼쳐 두었다.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서류를 그러모았다.

“그래서?”

“공작님의 보좌관으로 써 주세요! 보좌관이 부담스러우시면 업무 보조나, 뭐 그런 직책으로 두셔도 좋을 것 같은데…….”

빤히 바라보는 눈빛에 말끝이 목구멍 안으로 기어들어 갔다.

저렇게 볼 건 뭐람. 사람 무안하게. 입술을 삐죽이는데 언제 의자를 끌고 왔는지 레반스가 내 근처에 앉았다.

“그렇게 일을 잘하면 감독관으로 넬리 님 밑에 두는 게 편할 텐데요.”

리지가 일을 잘하긴 해도 편한 부하는 아닌데. 괜히 양심이 따끔거려 목을 가다듬었다.

“그렇긴 한데, 감독관은 이제 충분하니까요. 그런데 영주관은 아니잖아요. 사람이 잠자고 먹을 시간은 있어야죠.”

앞에서 묘한 비음이 들렸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달라붙는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턱을 괸 채 나를 보던 라이오넬과 눈이 마주쳤다.

“충분히 잘 먹고 잘 자고 있어.”

“……공작님 거울 안 보시죠?”

라이오넬이 노골적으로 심기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표정 지어도 소용없는데! 오히려 나는 짜릿한데!

물론 라이오넬을 설득해야 하기에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내리눌렀다. 그리고 걱정스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얼굴이 반쪽이 되셨잖아요.”

기껏 걱정해 줬건만 공작 놈은 눈살을 찌푸렸다.

……연기가 너무 어색했나? 힐끗 레반스를 봤다. 감흥 없는 눈동자와 형식적으로 휘어진 입꼬리가 보였다.

표정을 보니 알겠다. 연기는 하지 말아야지.

“근데 얼굴이 반쪽이 된 건 진짜예요. 레반스 님하고 아레트 님 얼굴도 수척해졌고요.”

레반스와 아레트를 언급하자 라이오넬이 짧게 숨을 내쉬었다. 게다가 미간 역시 여전히 찌푸려져 있었다.

땀나면 미간으로만 흐르겠네.

속으로 투덜거리는데 옆으로 아레트가 다가왔다. 그는 라이오넬이 정리해 둔 보고서를 한번 훑었다.

“저보다 나을 것 같습니다.”

“한 명 더 있으면 숨이라도 돌리지 않겠어요? 리지는 진짜 인재예요!”

좀 다른 의미의, 인간 재해라는 뜻의 인재이긴 하지만! 어쨌든 인재는 인재니까.

“제가 추천하는 사람이라 미덥지 못하면 미리 알아보세요.”

라이오넬의 손끝이 움찔거렸다. 그러더니 추궁하는 눈으로 나를 물끄러미 보았다.

뭐. 왜. 뭐.

눈을 피하지 않고 일부러 더 부릅떴다. 그러자 라이오넬이 고개를 약하게 젓고 장부를 돌려주었다.

“삼 일 뒤에 데려와.”

“네! 후회하지 않으실 거예요!”

환하게 웃으며 말하자 턱을 괸 라이오넬이 픽 웃었다.

“두고 보면 알겠지.”

라이오넬의 말이 옳다. 정말 두고 보면 알게 될 것이다.

“흐흐흐, 흠! 흠.”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 웃음을 헛기침으로 마무리하고 장부를 끌어안았다.

“그럼 삼 일 뒤에 뵐게요!”

* * *

“정말 괜찮을까요?”

리지가 안절부절못하며 내 옷깃을 꼭 붙잡았다.

“괜찮다니까요!”

“정말 저를 데려오라고 하셨어요? 일을 맡기신다고요?”

고개를 끄덕이고 리지의 손을 잡은 채 성큼성큼 걸었다. 리지가 발을 동동 구르며 내 뒤를 따라왔다.

“제가 잘할 수 있을까요? 또 실수하면 어쩌죠?”

제가 바라는 게 바로 그거예요!

“쫓겨나면요? 관리인님 명성에 누를 끼치면요?”

“누를 끼칠 명성도 없는걸요.”

“저를 추천한 관리인님을 공작님이 안 좋게 보시면요? 공작님과 보좌관님 모두 무서운 분이라고 했는데, 일을 그르쳤다고 사형시키면 어쩌죠?!”

왜 우리 영지 사람들은 흥분하면 다른 사람 말을 안 듣는 걸까.

미소 띤 얼굴로 점점 목소리를 키우는 리지를 바라봤다. 허둥지둥하던 리지가 우뚝 멈춰 섰다.

“안 되겠어요. 죄송해요, 넬리 님!”

“어딜 도망가려고요!”

라이오넬 방이 코앞인데 도망치게 둘 순 없지! 리지의 손을 잡고 있어서 다행이다. 하마터면 인재를 놓칠 뻔했어.

나는 걸음을 멈추고 리지와 마주 섰다. 그리고 양손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소문만 그렇지 무서운 사람들 아니에요. 그리고 리지가 열심히 하면 분명 알아줄 거예요.”

“정말요?”

“정말요.”

필사적으로 변호한 효과가 있는지 리지가 순순히 나를 따라왔다. 문을 열자 바로 아레트가 보였다.

리지가 큰 덩치에 놀랐는지 내 뒤로 숨었다.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가자 리지가 실밥처럼 딸려 들어왔다. 나는 그녀를 똑 떼 내어 앞에 세웠다.

“제가 말했던 리지예요.”

“어려 보이는군.”

리지가 떨리는 손을 맞잡고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여, 열일곱 살입니다.”

혹시라도 라이오넬이 나이를 트집 잡을까 봐 냉큼 입을 열었다.

“어려도 일은 잘해요.”

그러자 일하고 있던 레반스가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어리지도 않습니다. 아레트와 두 살 차이밖에 안 나는데요.”

순간 그게 누구인가 했다. 그러다 그 아레트가 이 아레트라는 것을 깨닫고 놀라 고개를 돌렸다.

아레트가 매우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열아홉입니다.”

나보다 어리다니. 조금 충격적이지만 오히려 잘됐다. 적어도 어리다는 이유로 리지를 돌려보내진 않을 테니까!

당당하게 라이오넬을 쳐다봤다.

그는 나를 빤히 보다가 턱짓으로 아레트 옆의 책상을 가리켰다.

“며칠 지켜보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좋아, 됐어! 삼 일에 한 번씩 찾아와 초췌해지는 라이오넬의 얼굴을 실시간으로 구경해야지!

몸을 홱 돌려 리지를 와락 끌어안았다.

라이오넬이 진짜 영주관에서 일하게 해 줄 줄 몰랐는지 그녀는 얼빠진 얼굴로 서 있었다.

그러다 내가 놓아주고 나서야 꾸벅 인사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야 할 거야.”

리지의 얼굴이 금세 하얗게 변했다.

아니, 왜 우리 애 기를 죽이고 그런담? 라이오넬을 노려보다가 리지의 귀에다 속삭였다.

“괜찮아요. 괜히 겁주는 거예요.”

말은 리지에게 했는데 레반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속삭임치고는 조금 컸던 모양이다.

힐끗 라이오넬의 눈치를 봤다. 책상 위에 올려놓은 깍지 낀 손이 오늘따라 굳건해 보였다.

감정 상했다고 리지를 자르진 않겠지?

그렇게 변덕스러운 사람은 아니지만 밉보여서 좋을 건 없으니까. 나는 다시 리지의 귀에 속삭였다.

“리지 힘내라고 한 소리예요.”

이번에도 리지에게 말했건만 라이오넬이 한숨을 터트렸다.

그는 다 귀찮다는 표정으로 다시 안경을 쓰고 손을 휘저었다. 리지는 레반스의 안내를 받아 쭈뼛쭈뼛 빈 책상으로 갔다.

나는 그녀에게 힘내라는 의미로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그리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무실을 나왔다.

‘며칠 뒤에 오면 라이오넬이 환장하는 걸 구경할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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