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뛰어요!”
우르르 몰려오는 게 무서워 일단 레반스를 잡고 무작정 달렸다. 하지만 내 체력은 쓰레기였고, 얼마 되지 않아 따라잡히고 말았다.
그러고는 다짜고짜 나를 붙잡고 울음을 터트렸다.
“감사합니다, 관리인님!”
“뭐, 허억, 뭐가, 후우……. 뭐가요?”
숨을 겨우 고르며 묻는 사이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 나를 에워쌌다.
“관리인님 덕분에 제 아들이, 제, 흡, 제 아들이! 흐어엉…….”
“정말, 이 아들을 어떻게 갚아야 할지!”
아들은 갚지 마세요.
“제 아들은 술을 끊었습니다! 맨날 미친놈처럼 술만 처마시던 놈이, 아침에, 일을……, 흑, 한다고……!!”
아무래도 이분들은 파우트 씨가 데려온 헝겊 인형 4인방의 부모님들인 모양이다.
나는 몸 둘 바를 몰라 안절부절못하다가 레반스를 봤다.
레반스 놈은 멀찍이 떨어져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이쪽을 구경하고 있었다.
‘누가 공작 놈 똘마니 아니랄까 봐! 내가 아침도 챙겨 줬는데…….’
배신감에 레반스를 노려보고 있는데 눈앞에 불쑥 포대 자루가 들이밀어졌다.
“이것 좀 받아 주세요, 관리인님. 제가 너무 감사해서 옥수수 좀 가져왔습니다.”
나는 깜짝 놀라 손사래를 치며 뒤로 물러났다.
“예? 아, 아니에요.”
“그러지 말고 받아 주세요! 여기 이 양반은 호박도 들고 왔어요.”
“저는 감자를 가져왔습니다.”
불쑥불쑥 내밀어지는 자루들을 간신히 피하며 고개를 저었다.
“이, 이건 전부 파우트 씨 덕분인걸요! 그러니까 사례는 파우트 씨에게 하시는 게 어떨까요?”
좋은 마음으로 시작한 일이 아니었는데. 이렇게 감사해하니 도리어 죄책감이 느껴졌다.
“저는 공작성에서 나오는 음식을 먹으니까 괜찮아요! 우리 다 같이 파우트 씨에게 가요. 파우트 씨는 집에 아들도 있고, 건장하시고, 일도 많이 하시니까 음식이 필요할 거예요!”
생각나는 이유를 모조리 가져다 댔다. 그러자 날아오던 포대 자루들이 멈췄다.
그런데 헝겊 인형 4인방 부모님들의 표정은 오히려 아까보다 더 감동받은 것처럼 보였다.
‘조금 불안한데?’
생각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주머니 아저씨들이 눈물을 훔쳤다.
“어휴, 정말 주책이야.”
“파우트 씨 말이 맞네요. 이번 관리인님은 뭐가 달라도 달라.”
“그러게요. 파우트 식솔들까지 걱정해 주고.”
아니, 말이 왜 그렇게 되었죠?
나는 그냥 사악한 복수를 무사히 끝마치고 싶은 것뿐인데! 억울함에 가슴을 내리쳤다. 하지만 알아주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우르르 몰려왔다.
“관리인님 어디 아프신가요?”
“빨리, 어디 가서 약초라도 가져와 봐!”
“가슴을 두드리시는 거 보니까, 체하셨나?”
눈에는 호의가 가득했다. 내가 나쁜 의도로 벌인 일들이 잘 풀려 생긴 호의 말이다!
그러니까 다들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억울하다 못해 양심이 아프잖아요!
“맞, 맞아요, 체한 거. 근데 가슴을 내리치니까 싹 내려갔어요. 하, 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슬쩍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헝겊 인형 4인방의 부모님들이 다행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같이 파우트 씨에게 가자고 성화였다.
“관리인님이 같이 가면 얼마나 좋아하겠어!”
“그래그래. 은인이잖아.”
“아마 지금보다 더 고마워할걸?”
그럴까 봐 같이 못 가는 거예요!
질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헝겊 인형 4인방 부모님들이 헝겊 인형처럼 축 처졌다.
죄책감 때문에 불편해 죽겠네. 어떻게든 이 상황에서 벗어나야겠다.
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생글생글 웃고 있는 레반스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생각해 보니까 제가 레반스 님과 경작지를 둘러보기로 해서요! 파우트 씨에게는 같이 못 가겠네요. 하하. 아쉬워라.”
마지막 말은 내가 듣기에도 전혀 아쉬워하는 것 같지 않았다. 다시 한번 아쉬운 척에 도전하려는데 옆에서 레반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맞습니다. 둘러보고 공작님께 보고도 드려야 해서요.”
얘가 웬일이지? 라이오넬이 나를 데려오라고 했을 때는 뒤통수를 치더니. 그게 미안했나?
내 감상이 어떻든 그의 변명이 통한 모양이다. 헝겊 인형 부모님들이 한발 물러났다.
“일을 방해하면 안 되지.”
“걱정하지 마세요, 관리인님. 파우트 씨한테는 우리가 잘 말해 둘 테니까.”
떠나면서 하는 말이 영 불길하다. 뭘 말한다는 걸까.
설마 내가 음식을 가져다주라고 했다는 말은 아니겠지?
“잠깐만요!”
사람들이 동시에 뒤돌아봤다.
반짝이는 눈이 부담스럽다. 그래도 불길한 건 확실하게 해 둬야지!
“제가 음식을 양보했다고 하지 말아 주세요! 파우트 씨가 부담스러워할 거예요!”
“아유, 관리인님이 원하시면 그래야죠!”
“생각도 깊으셔라.”
“걱정 마십쇼! 하하하! 입도 뻥긋 안 하겠습니다!”
헝겊 인형 4인방의 부모님들이 우르르 떠나갔다. 그 뒤로 흙먼지가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뿌옇던 앞이 맑아지고 나자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를 쫓아올 때만큼 놀라운 기세였다.
‘정신이 하나도 없네.’
고개를 저어 얼떨떨함을 떨쳐 내고 걸음을 옮겼다.
둘만 남으면 이것저것 물어볼 줄 알았는데 의외로 레반스는 조용했다.
물론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레반스를 보았다. 노려보는 모양새임에도 그의 미소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속셈이람.’
물어볼까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관리인님!”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데이지 아주머니가 보였다.
관리소 근처에서 경작하는 분으로, 오가며 인사를 제법 자주 나눈 사이였다.
“아주머니, 안녕하세요! 옆에 그건 뭐예요?”
아주머니 옆에 굴러다니는 나무 기둥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러자 아주머니의 얼굴이 밝아졌다.
“천막이지. 이거 설치하려고 관리인님이 애써 줬다며? 파우트한테 이미 다 들었어.”
파우트 씨는 왜 쓸데없는 말을 하고 다니는 거야!
민망한 마음에 어색하게 웃고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천막 쳐야 하죠? 레반스 님이 도와주실 거예요.”
“제가요?”
응. 네가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황할 줄 알았는데, 레반스는 의외로 순순히 팔을 걷어붙였다. 오히려 데이지 아주머니가 손사래를 치며 레반스를 만류했다.
“아유, 안 그래도 돼요! 곧 있음 남편하고 아들이 와서 칠 거예요.”
데이지 아주머니는 레반스를 돌려세워 밀어내더니 어서 가 보라는 듯 손짓했다.
레반스가 내 눈치를 보는 척했다. 그러자 데이지 아주머니가 나까지 돌려세웠다.
“귀한 분들께 험한 일 시킬 순 없지. 바쁘실 텐데 어서 가요, 어서!”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떠밀려 다시 걸었다. 걷다 보니 이미 천막을 친 경작지도 보였다.
여기저기서 인사가 들려 대답해 주고 가끔 가벼운 대화도 나누었다. 그 와중에도 레반스는 조용했다.
‘진짜 꿍꿍이 없이 그냥 둘러보러 온 건가?’
의심이 서서히 걷힐 즈음 누군가 말을 걸었다.
“관리인님.”
저번에 곡괭이를 바꿔 달라고 했던 아주머니였다. 경작지로 가는 길에 나를 발견하고 말을 건 모양이었다.
“잘 지내셨어요?”
아주머니는 내가 인사하자마자 다가와 손을 꼭 잡았다.
“오늘 대장간에 갔더니 농기구를 만들고 있더라고. 나는 관리인님이 빈말하는 줄 알았는데. 약속 지켜 줘서 정말 고마워요.”
“아니에요. 제가 더 고맙죠.”
라이오넬 주머니를 털게 해 주셨는데!
천막과 농기구 제작으로 끌어다 쓴 예산을 생각하자 입꼬리가 치솟았다.
아주머니는 내 검은 속셈을 겸양이라고 생각하셨는지 또 삶은 감자를 주셨다.
안 그래도 걸어 다니느라 마침 배가 고팠는데!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흐뭇하게 웃은 아주머니가 작별 인사를 하고 앞서갔다.
나는 잠시 멈춰서 감자의 반을 뚝 떼어 레반스에게 내밀었다.
그가 따뜻한 감자를 받아 순식간에 먹어 치우고는 활짝 웃었다.
“넬리 님. 관리인이 되신 지 2주 좀 넘으셨던가요?”
“16일째에요.”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일을 하셨군요.”
그중에 복수다운 복수는 하나도 없었다. 그 사실에 괜히 속이 쓰리고 심통이 났다.
입술을 삐죽이며 “네, 뭐…….” 하고 대충 대답한 뒤 감자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배가 좀 차자 저절로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한 입 더 베어 문 감자를 씹어 삼키려는데 레반스의 질문이 날아들었다.
“각하의 취향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뭐, 컥! 콜록, 콜록!”
정공법을 쓰지 않는 놈이 정공법을 쓰니 숨이 턱 막혔다. 물론 내 숨을 막은 것의 진짜 정체는 감자지만!
기침을 쏟아 내는데 레반스 놈은 웃는 낯으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목에 걸린 감자를 기침으로 겨우 빼내고 고개를 돌렸다.
레반스 놈은 여전히 반반하고 뺀질뺀질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브라슈테테에서 각하의 취향을 정확히 맞추셨다고 들었습니다.”
취향? 무슨 취향 말하는 거지?
고민이 길어지기도 전에 머릿속에 뭔가 스치고 지나갔다.
“아아. 딸기?”
“역시 알고 계시는군요. 어떻게 아셨습니까?”
뭐야, 얘 무서워! 너 원래 이렇게 직설 화법 쓰는 애 아니잖아!
당황스러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가만히 있자 레반스가 한 발자국 다가왔다.
“공작님이 달고 짠 것을 좋아한다는 것은 저와 아레트, 집사 정도만 아는 건데요.”
그 괴이한 설탕 소금 스테이크가 라이오넬 취향이었구나.
어쩐지 너무 잘 먹더라.
“……도대체 그런 걸, 왜 좋아하시죠?”
“말을 돌리시는군요.”
“아니, 말을 돌리는 게 아니라 진짜 이상하잖아요.”
“그러니까 그 이상한 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건 실수였어요.”
“다른 건 실수가 아니시고요.”
하여간. 말꼬리 잡는 데 선수다. 아니, 근데 도대체 음식 취향 아는 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흘겨봐도 레반스 놈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말려 올라간 입꼬리가 얄밉다. 콱 꼬집어 줄까 보다!
“그래서, 그런 정보는 어디서 입수하신 겁니까?”
막역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3년을 알고 지냈다.
라이오넬은 좋아하는 게 있으면 눈을 떼지 못했다. 덕분에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티가 나니까.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 나는 과거로 돌아왔고, 지금은 영지에 온 지 2주가 조금 넘었을 뿐이다.
브라슈테테에 가기 전에는 밥은커녕 차 한 잔도 함께 마셔 보지 못했다.
‘대충 얼버무리면 의심하려나?’
그런데 의심하면 또 어쩔 거야. 어차피 라이오넬에게 의심받고 있는데. 레반스 하나 더한다고 크게 달라지겠어?
“그냥 오가면서 주워들었나 보죠.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레반스가 돌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중요합니다. 각하의 음식 취향을 알면 독살 성공 확률을 높일 수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