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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제발 좀 망하세요 (11)화 (11/130)

11화

레반스는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빵을 건네던 넬리의 얼굴을 떠올렸다.

“벌써 뒷조사까지 할 필요가 있습니까? 그렇게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습니다.”

“드러나지 않는 게 더 무서운 법이지.”

과거의 배신을 곱씹는 듯, 라이오넬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레반스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아레트에게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라이오넬이 고개를 끄덕이고 펜을 들었다.

그는 톰이 기록한 장부와 넬리가 작성한 보고서를 대조해 보았다. 그러다 장부의 글씨가 중간중간 심하게 삐뚤어진 것을 보았다.

누가 봐도 쓰다가 존 것 같은 글씨였다.

“관리인이 감독관을 더 뽑고 싶다던데. 그쪽으로 예산을 잡아 놔.”

“예?”

레반스는 제 귀를 의심했다.

라이오넬은 믿을 수 있는 소수의 인원만으로 영지를 운영하길 바랐다.

그래서 그들도 인원을 늘리자고 함부로 말하지 못했던 것이다.

“진심이십니까?”

라이오넬은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서류를 보았다. 제럴드의 장부 또한 잠에 취한 듯한 글씨로 쓰여 있었다.

“수상하긴 하지만 감독관을 걱정하는 건 진심인 것 같더군. 그리고 효율이 오를 거라고 했으니 시도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대신 뽑힌 사람들이 어떤 자들인지 철저히 조사해서 올리도록.”

“예, 각하.”

레반스는 깍듯하게 대답하고 한동안 라이오넬을 관찰했다. 장부를 보는 시선에 희미한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레반스가 깃펜을 들며 작게 한숨 쉬듯 중얼거렸다.

“저렇게 기특해하실 거면 뒷조사는 왜 하라고 하신 건지…….”

라이오넬이 크게 말하라는 눈으로 쳐다보자 레반스가 능청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 * *

이상하다. 왜 마차가 안 흔들리지?

몽롱한 눈을 깜빡이다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뭐야……. 내가 왜 방에 누워 있지? 그것도 침대에! 분명 라이오넬하고 저녁을 먹었던 것 같은데?

‘꿈인가?’

싶었는데 입안이 찝찝했다.

시간을 확인하니 10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아무래도 마차에서 기절하듯 잠든 모양이었다.

왜 방에서 깨어난 건지 의아하긴 했지만, 일단 일어나 욕실로 갔다. 칫솔에 가루 치약을 바르고 이를 닦으며 생각했다.

‘라이오넬이 데려다줬나?’

예전에는 정원에서 쉬다가 잠들면 라이오넬이 나를 종종 방에 데려다 놓기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만한 친분이 없는데. 하인을 시켰겠지, 뭐.

그래도 나중에 보면 고맙다는 말이라도 해야겠다.

기지개를 켜고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대로 다시 자려는데 잠이 오지 않았다.

일할까,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복수 계획을 짜자!’

침대에서 나와 책상 앞에 앉았다. 촛불에 불을 붙여 앞에 두고 종이와 펜을 꺼냈다.

그리고 일단 라이오넬이 신경 쓰는 것을 적었다. 그중에 사람은 전부 제외했다.

‘엄청난 지략가도 아니면서 사람을 내 뜻대로 움직이려 하다니. 너무 오만했어.’

그러고 나니 곧 여왕 폐하께서 재배하라고 명령하실 작물과 대규모의 연회가 남았다.

하나는 이국에서 들여온, 이름도 제대로 생각나지 않는 작물이었다. 연회는 내가 아니라 집사와 레반스가 도맡아서 준비하니 망치기 힘들었다.

‘그럼 일단 이 작물을 망치자!’

고개를 끄덕이고 작물에 동그라미를 여러 개 겹쳐서 칠했다. 이대로 보관하고 싶었지만 누구한테 들키면 의심을 살 것 같았다.

무엇보다 라이오넬의 의심은 정말 지긋지긋했다.

나는 벽난로에 종이를 넣어 태우고 침대로 들어갔다.

한숨 푹 자고 일어나서 아침을 먹고 곧장 관리소로 향했다. 들어가자마자 소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관리인님!”

3년 만에 처음 들어 보는 밝은 목소리였다.

“좋은 아침이에요, 소피.”

소피가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성큼성큼 걸어와 내 손을 덥석 부여잡았다.

“자고 일어나니까 비어 있던 장부가……! 관리인님 소행이신가요?”

소행이라니. 소피 씨. 그렇게 말하면 꼭 내가 나쁜 짓 한 것 같잖아요.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충 끄덕였다.

이렇게 좋아하는 걸 보니 그동안 내 일만 하느라 도와주지 못한 게 오히려 미안해질 정도였다.

“앞으로 시간이 나면 조금씩 도와줄게요.”

라이오넬에게 같이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사이에 일 도와준 것쯤이야! 사실 그렇게 고마워할 일도 아닌…….

“관리인님! 아니, 넬리 님! 이렇게, 감독관을 위해 주는 관리인님은 넬리 님이 처음이에요. 앞으로 하늘처럼 떠받들겠습니다!”

이렇게 고마워할 일인가?

가만히 있으면 나를 업고 경작지 행진이라도 할 기세였다. 부담스러워 얼른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사실 감독관을 더 뽑을 거라 도와줄 일도 없을 거예요. 그냥 예의상 한 말…….”

“감독관을 더 뽑는다고요?”

“네. 어제 공작님께 허락을 받았어요.”

“허락이요?”

어째 점점 목소리가 커지는 것 같다.

고개를 돌리자 일을 하고 있던 톰과 제럴드도 놀란 표정으로 내 쪽을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두 사람이 좀비처럼 걸어 나왔다.

“감, 독관을 더…….”

“뽑는다는 게 사실입니까?”

뭐야! 무서워!

뒷걸음질 치며 고개를 끄덕이자 세 사람이 갑자기 나에게 달려들었다.

“넬리 님 만세!”

“관리인님 만세!”

붙잡힌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가 세 사람의 팔 위에 안착했다. 그리고 도망칠 새도 없이 다시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으악!”

처음 경험하는 헹가래에 비명이 저절로 나왔다.

무서워하는 기색을 보이자 세 사람이 나를 받아 무사히 땅에 내려 주었다.

안도의 숨을 내쉬자마자 소피가 다시 내 손을 붙잡았다.

“감사합니다. 정말, 넬리 님이 저희를 구원해 주신 겁니다.”

“구원이랄 것까지야…….”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빼내자 이번엔 톰이 내 손을 덥석 붙잡았다.

“저는 이대로 일하다가 말라 죽는 줄 알았습니다! 넬리 님. 저는 넬리 님이 하시는 일이라면 앞으로 무조건 뜻이 있으려니, 하고 생각할 겁니다.”

어느새 세 사람은 내 손을 잡기 위해 쟁탈전을 벌이고 있었다. 거기에 말도 안 되는 아부까지 한마디씩 더하면서 말이다.

“저는 넬리 님의 발 앞에 누워 인간 카펫이 되겠습니다. 저를 즈려밟고 다니십시오!”

“저는 발 닦개가 되겠습니다!”

“그럼 저는, 저는 발바닥을 핥겠어요!”

인간 카펫도, 발 닦개도 되지 말고, 내 발바닥 핥을 생각도 마세요!

나는 이상한 것으로 경쟁하는 세 사람의 손을 동시에 뿌리쳤다. 그리고 내 사무실로 도망치며 소리쳤다.

“됐으니까 감독관 뽑을 준비나 해 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세 사람이 큰 목소리로 동시에 대답했다. 문밖으로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혹시나 세 사람이 방문을 열고 쳐들어올까 봐 소리가 안 나게 문을 잠갔다.

그러고 나자 다리에 힘이 풀렸다.

미끄러지듯 그 자리에 주저앉아 화끈거리는 얼굴을 양손으로 감쌌다.

‘이렇게 격렬한 신뢰를 얻으려는 건 아니었는데!’

그냥 일이 얼마나 힘든지 아니까 도와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저런 광신도 같은 반응이 나올 줄 알았더라면 감독관을 더 뽑겠다는 말은 안 했을 것이다. 광신도보다는 사람한테 관심 없는 좀비가 나으니까!

‘아니야. 좋게 생각하자. 저 정도의 신뢰면 내가 눈앞에서 복수 계획을 짜도 눈치채지 못할 거야’

그래.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말도 있으니까!

깊게 심호흡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어제 널브려 놓은 채 나간 책상을 정리하려는데 등 뒤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자 레반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레반스 다니오입니다. 넬리 님. 안에 계십니까?”

“네. 들어오세요.”

아무 생각 없이 대답했는데 문에서 철컥거리는 소리가 났다.

맞다. 문 잠갔었지. 괜히 헛기침하며 빠르게 걸어 문을 열어 주었다.

문고리를 보고 있던 레반스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의뭉스럽게 웃었다.

“문을 잠가 두셨군요.”

그게 무슨 문제라도 되나? 고개를 기울이자 그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뒤로 사람 상체만 한 상자를 든 하인들이 줄지어 따라왔다.

“저게 다 뭐예요?”

“각하께서 보낸 드레스입니다.”

“저한테요? 왜요?”

“어제 본의 아니게 무안을 주어 미안하셨나 봅니다.”

무안? 아. 어제 일 때문인가 보다. 이런 일로 드레스를 사 주다니.

내가 해진 옷이나 짧은 옷을 입고 나갔으면 전속 디자이너라도 붙여 주려고 했겠네.

……나쁘지 않은데? 다음에 시도해 볼까?

라이오넬은 금전보다는 한 해의 수확량이 늘었는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니까 가능할 수도 있겠다.

“흐흐흐.”

시답지 않은 생각을 하며 웃다가 레반스와 눈이 마주쳤다.

괜히 목을 가다듬는데 레반스가 하인들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하인들이 동시에 상자 뚜껑을 열었다.

드레스에 달린 보석들이 빛을 반사하며 매우 반짝거렸다.

눈이 부셔 고개를 돌리는데 레반스가 뿌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드레스가 있다면 말해 주십시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을 리 없다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얼굴이 조금 얄미웠지만 사실 몇 벌만 놔두고 다 팔아 버릴 생각이었기 때문에 디자인은 상관없었다.

“공작님께 감사하다고 전해 주세요.”

“예.”

레반스가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하인들에게 드레스를 내 방에 가져다 놔 달라고 부탁했다.

얼마 안 가 하인들이 우르르 빠져나갔다. 하지만 레반스는 여전히 소파에 앉아 있었다.

“안 가세요?”

“네.”

“왜요?”

“그냥 넬리 님과 함께 경작지라도 둘러볼 생각입니다.”

“왜요?”

“……친분이라도 쌓아 볼까 해서요?”

말 사이에 공백을 보니 급조한 이유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레반스를 보았다.

“친분? 왜요?”

같은 질문이 짜증 날 법도 하건만 레반스는 뺀질뺀질하게 웃는 얼굴로 궁둥이를 붙이고 앉아 있었다.

보나 마나 공작이 나에 대해 뭘 알아 오라고 했겠지.

레반스는 아주 능구렁이 같은 놈이니 말리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그러려면 둘이 있는 것보다는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게 나았다.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척하면서 레반스를 무시할 수 있으니까!

“그럼 말 나온 김에 경작지를 둘러보러 갈까요?”

“좋습니다.”

사무실 밖으로 나가자마자 소피와 톰, 제럴드가 미어캣처럼 고개를 들었다.

“넬리 님, 어디 가십니까? 호위해 드릴까요?”

“넬리 님, 마차를 불러 드릴까요?”

“넬리 님, 제가 시원한 음료를 준비했습니다!”

너무 열렬한 반응에 당황스러웠다. 레반스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걱정스러워 돌아보지도 못하겠다.

“호위와 마차, 음료는 필요 없어요.”

단호하게 거절하자 세 사람이 순식간에 시들었다.

나는 세 사람이 다시 생생해지기 전에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나가면 영지민들이 말을 많이 거니까 레반스와 대화할 시간이 없겠지?

완벽한 계획에 스스로도 감탄할 지경이었다.

흐뭇하게 웃으며 밖으로 나가자 아니나 다를까 레반스가 말을 걸기 시작했다.

“저 녀석들과 제법 가까워지셨나 봅니다.”

“네, 뭐.”

“경작지는 항상 걸어서 다니십니까?”

“그럴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어요.”

“다행입니다. 날이 곧 더워질 테니 다음부터는 마차를 타시는 게 좋겠습니다.”

“아, 네, 뭐.”

레반스의 말에 최대한 심드렁하게 대답하며 나에게 말을 걸어 줄 사람이 없나 두리번거렸다.

그때, 멀리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관리소를 향해 오고 있는 게 보였다. 잘됐다 싶어 다가가려는데 그들이 나를 먼저 발견했다.

“관리인님이다!”

“뭐? 어디?”

“아이고, 관리인님!”

뭐, 뭐야! 왜 갑자기 나한테 달려오지? 폭동인가? 나 아직 아무것도 안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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