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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제발 좀 망하세요 (9)화 (9/130)

9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마차에 올랐다.

“내가 무슨 도마뱀이야? 탈피를 하게.”

작은 소리로 투덜거리며 라이오넬의 맞은편에 앉았다. 라이오넬의 옆에는 내가 가져왔던 서류가 쌓여 있었다.

그가 서류 뭉텅이를 집어 들었다.

브라슈테테까지 가려면 시간이 좀 걸린다. 그러니 가는 길에 보고를 끝내 버리면 밥은 편하게 먹을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라이오넬이 손에 든 것을 힐끗 보고 입을 열었다.

“요즘 늑대가 자주 보인다고 하더라고요. 아직 양을 잡아먹진 않았는데 조심해야 할 것 같다고 했어요.”

“흠…….”

가축에서 시작해서 내가 맡은 일들에 대해 모두 보고했다. 라이오넬은 보고서를 확인하며 내 말을 들었다.

최근 경작지의 상태까지 읊고 나자 라이오넬이 보고서를 내려놨다.

그가 마차 한쪽에 있는 서랍에 서류를 넣고 열쇠로 잠갔다. 그리고 열쇠를 품에 넣자 때마침 마차도 멈췄다.

‘좋아. 이제 마음 편하게 스테이크를 음미할 수 있겠어!’

라이오넬을 따라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화려한 불빛이 뿜어져 나오는 브라슈테테를 바라보았다.

‘내가 이런 고급 레스토랑에 오다니!’

감탄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머리 위에는 휘황찬란한 샹들리에 다섯 개가 빛나고 있었고, 기둥은 모두 대리석이었다.

벽도 대리석, 조각상도 대리석, 심지어 바닥도 대리석이다!

‘밟아도 될까? 내가 이 비싼 돌덩이를 감히 밟아도 되는 걸까?’

현관 위에 깔린 융단 위로 발을 내려놓으려다가 거둬들였다. 그리고 다시 용기 내어 내려놓으려다가 거둬들였다.

한참을 그러고 있자 앞서 들어가던 라이오넬이 고개를 돌렸다.

그는 내가 하는 것을 빤히 보다가 미소 비스름한 것을 입가에 띄웠다.

“춤을 추고 싶으면 무도회장으로 가도록.”

그러더니 몸을 돌려 빌어먹을 정도로 우아하게 걸어갔다. 나는 괜히 그의 뒤통수를 노려봤다.

‘재수 없어.’

잠시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대리석에 발을 디뎠다. 그리고 라이오넬 뒤를 바짝 쫓아갔다.

걷다 보니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라이오넬과 나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하긴. 초라한 차림새의 여자가 왕위 계승 서열 3위와 고급 레스토랑에 왔으니 저런 반응을 보일 만도 하지.

‘나도 신기한데 저 사람들은 얼마나 신기하겠어.’

아마 내일이면 사교계가 떠들썩하겠지?

물론 라이오넬은 별 신경도 쓰지 않겠지만 말이다. 만약 그가 평판을 신경 쓰는 사람이었다면 곤란해했을 텐데!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통쾌했다.

“흐흐흐.”

저절로 음흉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나는 혹여 누가 듣기라도 할까 봐 입을 막으며 고개를 숙였다.

막힌 입 때문에 어깨가 저절로 들썩였다. 한동안 조용히 웃다가 고개를 들었는데, 라이오넬과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그가 나를 오묘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뭐. 왜. 왜 쳐다봐.’

불손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라이오넬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나에게 다가왔다.

“내가 미처 신경 쓰지 못했군.”

“뭐를요?”

라이오넬은 어떻게 말해야 할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러다가 에스코트하듯 손을 내밀었다.

혹시 저번처럼 굳은살로 뭔가를 알아내려는 건가 싶어 손을 감췄다. 그러자 그가 내 손을 끌어 제 팔 위에 올려놓았다. 정말로 에스코트해 주려는 것처럼 말이다.

당황해 쳐다보는데 라이오넬이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신경도 안 쓸 줄 알았는데. 모욕감을 느꼈다면 내가 대신 사과하지.”

“모욕감이요? 제가요? 언제요?”

“아까 울지 않았나?”

“아!”

웃음을 참느라 고개 숙인 채 들썩거린 걸 운다고 오해했나 보다.

하긴 어떤 영애가 ‘흐흐흐’ 하고 웃겠어. ‘흐흐흑’ 하고 울면 몰라도.

물론 난 영애가 아니지만! 그래도 참, 그런 거로 내가 울 것같이 생겼나?

나는 심드렁하게 그를 보았다. 그래도 밥을 사 주는 사람이니 친절하게 오해를 바로잡아,

“대신 원하는 건 뭐든 시키도록 해.”

……줄 필요는 없지! 사람이 살다 보면 오해도 좀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암, 그렇고말고!

내가 열렬히 고개를 끄덕이자 라이오넬이 비웃음인지 뭔지 모를 미소를 남기고 나를 이끌었다.

자리에 앉자 종업원이 메뉴판을 가져다주었다.

“정말 뭐든 다 먹어도 돼요?”

라이오넬이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 메뉴들을 천천히 읽었다.

그리고 비싸 보이는 메뉴들을 줄줄 읊었다.

“송로버섯 양고기 스테이크하고, 철갑상어 알을 곁들인 오리 다리 콩테랑 굴 파스타랑 저온 숙성시킨 돼지 뒷다리 통구이랑…….”

거기까지 말하다 슬쩍 라이오넬의 눈치를 보았다. 표정이 여전한 걸 보니 부담스러운 금액은 아닌 모양이다.

인상이 찌푸려질 정도로 부담스러운 금액을 쓰고 싶은데!

나는 라이오넬의 표정을 살피며 메뉴판을 넘겼다. 비싼 것만 골라서 시키고 싶은데 가격이 적혀 있지 않았다.

나는 고민하다가 메뉴판 왼쪽 상단 모서리를 손으로 찍었다. 그리고 오른쪽 하단 모서리까지 대각선으로 쭉 그었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다 가져다주세요. 딸기 콩포트를 올린 우유 푸딩과 딸기 생크림 케이크는 빼고요!”

“그 두 개는 왜 빼지?”

“환심 살 생각하지 말라면서요.”

“흐음…….”

라이오넬이 묘한 비음을 흘리며 메뉴판을 닫았다.

“저기에 딸기 콩포트를 올린 우유 푸딩 추가해서 코스로 2인분.”

“예, 각하. 곧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종업원이 사라지자 침묵이 흘렀다. 라이오넬은 날 보고 있었다.

왜 저렇게 보는 거야. 어색해 죽겠네!

괜히 탁자 위에 있는 꽃잎을 만지작거리는데 병에 담긴 가루들이 눈에 띄었다.

세상에, 설마 이거 향신료야? 이 비싼 것들을 식탁 위에 그냥 올려놓다니!

‘여기 있는 설탕만 가져다 팔아도 드레스 한 벌은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누가 안 훔쳐 가나?’

조심스럽게 주변을 둘러봤다. 다들 향신료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솔직히 하나 가져가도 잘 모를 것 같았다.

물론 진짜 가져갈 생각은 없지만! 탐욕스러운 눈으로 설탕을 보는데 라이오넬이 말을 걸었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지?”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내가 설탕에 눈독 들인 걸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나는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무 꿍꿍이도 없어요!”

“그런 것치고는 심하게 당황하는군.”

“갑자기 물어보니까 그렇죠!”

“정말 아무 꿍꿍이도 없나?”

말할까? 잠깐 식탁에 있는 향신료로 드레스 몇 벌을 살 수 있을지 상상해 봤다고?

근데 진짜 훔칠 생각은 아니었단 말이야!

긴장되고 억울했다. 입술을 꾹 다물고 라이오넬의 시선을 피했다. 그가 새빨간 눈동자로 나를 꿰뚫을 듯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단순한 감으로 파우트에게 일을 맡겼다는 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납득할 수 없어서 말이야.”

아, 뭐야. 그 말이었어?

갑자기 긴장이 확 풀렸다. 나는 마음을 놓으며 탁자에 팔꿈치를 올리고 턱을 괴었다. 그가 왼쪽 눈썹을 까딱였다.

“거기다 게으름 피우던 파우트를 격려하기까지 했다던데. 그건 내 환심을 사려는 행동이 아닌가?”

“공작님. 공작님 환심을 사면 월급이 오르나요?”

“뭐?”

라이오넬이 어이없다는 눈으로 나를 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심드렁한 눈으로 말을 이었다.

“월급이 오르는 것도 아닌데 공작님 환심을 사서 어디다 써요?”

“내 신뢰를 얻고 싶지 않나?”

가슴이 욱신거린다. 신뢰. 얻고 싶었지. 그런데 이젠 아니다. 어차피 안 줄 걸 아니까 바라지도 않을 거다.

‘내가 원하는 건 복수라고!’

나는 콧방귀를 끼고 고개를 돌렸다.

때마침 종업원이 음식을 가져왔다. 나는 종업원이 제일 먼저 내려놓은 오리 다리 콩테를 가져와 마구잡이로 썰었다.

‘맛있는 거 사 주기에 좀 예쁘게 봐주려고 했더니, 꼭 사람 마음을 뒤숭숭하게 만들어 놔야 직성이 풀리지!’

괜히 고기에 화풀이를 하는데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세상에. 탐욕스럽기는…….”

“왜 저렇게 많이 시킨 걸까요?”

“각하께선 왜 저런 여자를 데리고 다니시는 거람.”

물론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욕할 테면 하라지. 나는 내 길을 갈 거야. 여기서 공작 놈 돈을 왕창 쓰고 갈 거라고!

그리고 어차피 브라슈테테는 깨끗한 음식을 주변의 부랑자나 고아들에게 나눠 준다.

그러니 이 음식들도 굶는 사람들에게 돌아갈 것이다.

라이오넬의 돈으로 좋은 일을 하는 것 같지만, 괜찮겠지? 어차피 그 사람들은 음식의 출처를 모를 테니까.

만족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와중에도 옆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은 여전히 수군거리고 있었다.

“혹시 그런 거 아닐까요?”

“……요즘 폐하께서 걱정…… 부랑자…… 일부러 적선…….”

무슨 말이 드문드문 들렸으나 거기에 신경 쓰기엔 음식이 너무 맛있었다.

오리고기를 씹고 있는데 별안간 목소리들이 뚝 끊겼다. 눈이 마주치자 그들은 아까와 달리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야. 뭔데. 갑자기 왜 적대적인 시선이 사라졌지?

혹시 라이오넬이 무서운 눈빛이라도 보냈나 싶어 고개를 들었다. 그는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한참 동안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던 그가 스테이크를 썰어 한 조각 먹더니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소금.”

뒤에 ‘좀 건네주겠나?’라고 붙이면 혀가 반으로 토막 나기라도 하나?

라이오넬을 노려보며 산산조각 난 고깃덩어리 하나를 쿡 찍어 먹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라이오넬을 골탕 먹일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유리 향신료 안에 담긴 소금과 설탕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사실 잘 구분이 되지 않았으나 더 반짝이는 쪽이 설탕이라는 것 정도는 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척 설탕을 집어 건넸다.

“제가 뿌려 드릴게요.”

“내가 하지.”

“아니에요! 제가 해 드릴게요.”

라이오넬이 설탕을 채 가기 전에 재빨리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의 스테이크 위에 설탕을 듬뿍 뿌려 주었다.

드디어 라이오넬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나는 방긋 웃으며 팔을 거둬들였다. 그리고 고기를 먹은 그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잔뜩 기대하며 지켜보았다.

그러나 고기를 썰어 입에 넣는 라이오넬의 모습은 평온하기만 했다.

‘뭐야. 왜 저렇게 멀쩡해. 이거 혹시 소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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