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제 아빠는 파우트 레바브구요. 참, 어제는 맛있는 것도 사 오셨어요. 저는 그렇게 많이 먹어 본 거 처음이에요.”
파우트 씨 아들이잖아! 얘가 여긴 왜 온 거람?
“원래 아빠는 술 먹고 울기만 하거든요. 근데 어제는 안 그랬어요! 마을 아주머니들이 관리인님 덕분이랬어요.”
아까 한 말을 또 하고 있다. 말을 돌려야지. 안 그러면 같은 말을 토씨만 바꿔서 계속할 것 같았다.
“그래. 그렇구나. 그런데 그건 아빠한테 감사해야지. 술을 안 마신 건 아빠잖아.”
“그치만 아주머니들하고 아저씨들하고 아빠도 다 관리인님 덕분이랬는걸요! 관리인님 덕분에 이제 밥도 안 굶어도 된다고 했어요!”
양심을 쿡 쑤셨다. 파우트 씨가 해고당하면 저 애가 밥을 굶게 된다는 뜻이겠지? 파우트 씨 사정이 그렇게 안 좋았었나?
“게다가 이제 술도 안 마실 거래요! 일도 열심히 하고, 또, 또, 좋은 아빠가 된다고 했어요.”
그만! 알겠어, 안 자를게! 안 자르면 되잖아!
나는 아이의 어깨를 잡고 주저앉았다. 그러자 아이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내 손을 떼 내어 펼쳤다.
“그래서 이거 제가 만들었어요.”
손바닥 위로 토끼풀 두 송이를 엮어 만든 반지가 올라왔다.
“엄마가 예전에 만들어 줬던 거 따라 했어요. 저는 나중에 관리인님 같은 어른이 될 거예요!”
“그, 래……. 고, 고마워.”
“그럼 저는 갈게요!”
아이가 토끼처럼 뛰어 떠나갔다. 나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망했다.’
이제 파우트 씨를 해고할 수도 없게 되었다. 내 복수심을 채우자고 저 어린애를 굶게 할 순 없으니까.
‘야심 차게 준비한 첫 복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다니. 우울해.’
축 처져서 관리소 문을 열었다. 그러자 눈앞에 더 우울한 광경이 펼쳐졌다.
‘서류 지옥이 따로 없네.’
제럴드는 종이가 가득 쌓인 책상에 엎드려 있었는데, 기절한 건지 잠든 건지는 모르겠다. 소피는 책상에 머리를 박고 무언가를 작성하는 중이었다.
“톰은 어디 갔어요?”
내 목소리에 소피가 고개를 들었다.
“오셨어요……. 톰은 숲에 갔어요. 누가 허가 없이 버섯을 따 왔나 봐요.”
듣는 사람마저 기운이 쪽 빠질 정도로 의욕 없는 목소리였다.
눈 밑이 거뭇하고 표정은 몽롱했다. 마치 죽기 전의 나를 보는 것 같아 안쓰러움이 몰려왔다.
“잠은 좀 잤어요?”
“아…….”
소피가 긍정인지 부정인지 모를 감탄사를 느리게 내뱉었다.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나도 이런데 저 사람은 오죽할까 싶었다.
“나머지는 내가 할 테니까 눈 좀 붙여요.”
“……네?”
“나머지는 내가 정리한다고요.”
“……죄송해요. 제가 3일간 잠을 못 잤더니, 제 일을 대신해 주신다는 환청이…….”
얼마나 끔찍하게 시달렸으면 사람이 저 모양이 됐을까!
정말 눈물이 앞을 가린다. 양손으로 입을 가린 채 안타깝게 쳐다봤다. 그러자 그녀가 다시 펜을 들었다.
나는 일단 소피를 고문 의자 같은 책상 앞에서 끌어냈다. 소피가 종잇장처럼 팔랑이며 딸려 왔다.
“보니까 얼마 남지도 않았네. 일단 쉬어요.”
그리고 소피를 무작정 소파에 앉혔다.
소피가 혼란스러운 눈으로 두리번거렸다. 나는 그녀의 몸을 기울여 팔걸이를 베게 했다.
머리가 닿자마자 소피는 기절하듯 잠들어 버렸다.
‘내가 저 마음 잘 알지.’
나도 죽기 전에 딱 저만큼 피곤했었던 것 같다. 일단 소피의 자리로 갔다. 그리고 그녀가 정리하던 것을 들어 올렸다.
내가 알기로는 소피, 제럴드, 톰 셋 다 평민 기사 출신이었다. 글자와 셈을 배운 것도 부상으로 기사를 그만두고 감독관으로 일하기 시작했을 때부터라고 했다.
그런 사람들 3명이 방대한 양의 장부를 작성하려니 버거울 수밖에.
‘사람 한 명 살리는 셈 치자.’
마침 급한 일은 어제 끝내 놓았다. 덕분에 밤을 새우긴 했지만 3일이나 지새운 소피보다는 상태가 나았다.
일단 소피가 하던 일을 마무리 지어야지. 그러고 나면 라이오넬에게 보고하러 갈 시간이 될 것이다.
‘오늘은 저녁 먹을 시간도 없겠네.’
한숨을 삼키며 장부를 펼쳤다. 그리고 소피가 정리하던 것을 이어 나갔다.
한참을 앉아 있자 목이 뻐근하고 허리에 감각이 없어졌다. 그대로 망부석이 되겠다 싶을 즈음 일이 끝났다.
‘으아, 죽겠다.’
자리에서 일어나 뻐근한 몸을 풀고 밖으로 나갔다. 소피는 여전히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걸어 그녀의 자리로 갔다. 그리고 정리한 장부를 내려놓으려는데, 소피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장부!”
얼마나 시달렸기에 장부를 외치면서 깨어나는 걸까?
안쓰럽게 바라보는데 소피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녀의 눈은 반쯤 감겨 있었다. 보아하니 아직 잠에서 완전히 깨어난 것도 아닌 모양이다.
나는 그녀의 책상 위에 장부를 내려놓고 뒤로 물러났다. 다 했으니 더 쉬라고 말하려는데 뒤에서 괘종시계가 울렸다.
‘라이오넬한테 보고할 시간인데!’
늦었다! 깨닫자마자 몸을 돌려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책상 구석에 보고서와 장부가 쌓여 있었다. 한가득 품에 안고 곧장 마차로 달려갔다.
“성으로 가 주세요! 빨리, 빨리요!”
소리치고 마차에 들어가 앉았다. 곧바로 마차가 출발했다.
‘이제껏 한 번도 늦은 적이 없었는데!’
지각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르겠다. 설마 자르진 않겠지? 지금 잘리면 안 되는데!
불안해서 다리가 달달 떨렸다. 달리는 것처럼 발을 동동거려 봐도 풍경이 지나가는 속도는 똑같기만 했다.
창문에 찰싹 달라붙어 있다 보니 성이 가까워지는 게 보였다. 나는 품에 있는 보고서들을 제대로 안았다. 그리고 마차가 멈추자마자 뛰어내렸다.
“관리인님, 오셨…….”
집사님의 목소리가 옆으로 스쳐 지나갔다.
“안녕하세요!”
나는 뒤늦게 소리치며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문을 벌컥 열자마자 얼음장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늦었군.”
“허억. 헉, 죄송, 허억. 후우……. 죄송합니다.”
겨우 제대로 말하고 허리를 세웠다. 라이오넬이 나를 빤히 보다가 손을 뻗었다.
정신없이 숨을 헐떡이다가 그의 행동을 한 박자 늦게 이해했다. 구명줄처럼 안고 있던 서류들을 허겁지겁 내밀었다.
라이오넬이 서류를 가져가며 물었다.
“왜 늦었지?”
여전히 숨이 벅찼다. 멀쩡한 사람을 앞에 두고 헐떡거리려니 민망했다.
최대한 숨을 고르게 쉬려고 노력하며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
“일에 너무 집중하는 바람에……. 죄송합니다.”
씨알도 먹히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라이오넬은 차가운 눈빛을 거두고 보고서와 장부가 일치하는지 비교했다.
나는 그사이 고개를 돌리고 숨을 훅, 훅, 내뱉었다.
좋아. 이제 제대로 말할 수 있겠어. 생각하는 순간 라이오넬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보고를 시작…….”
-꼬르륵.
그리고 내 배에서 나는 소리도 들렸다.
“풉.”
옆에서 레반스 놈이 작게 비웃었다. 저놈이, 내가 밥 먹여 준 건 기억 못 하고!
그를 노려보는데 다시 배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꼬르르륵.
흡사 공기 가득 찬 도자기가 물 밑으로 가라앉는 소리 같았다.
미쳤네! 조용히 못 해? 몸을 돌려 배를 내리쳤다. 하지만 때린 게 아팠는지 배가 더 시끄럽게 울기 시작했다.
제발, 울지 마. 뚝! 우는 배를 달래기 위해 살살 문질렀다. 별짓을 다 하자 소리가 조금 잦아들었다.
“식사를 거르면 기절한다고 하지 않았나?”
마치 왜 아직 기절하지 않고 서 있냐는 말처럼 들렸다.
나도 마음 같아서는 기절하고 싶다고! 창피해 죽겠다고! 라이오넬을 노려보는데 그가 몸을 일으켰다.
“옷 갈아입고 오도록.”
“네?”
옷은 왜 갈아입으라 그러지? 별로 더럽지도 않은데. 먼지가 좀 묻어 있긴 하지만……. 근데 그건 보고랑 상관없잖아.
고개를 기울이는데 라이오넬이 책상을 돌아 나오며 말했다.
“보고는 식사하면서 듣도록 하지.”
“저랑 저녁을 드시겠다고요?”
“문제라도 있나?”
문제가 있는 건 아니지만, 나랑? 왜? 굳이?
저절로 떨떠름한 얼굴이 되었다. 차라리 보고는 건너뛰고 빨리 보내 주지. 밥 먹으면서 보고하라니. 체하겠다.
게다가 딱히 라이오넬과 마주 앉아 밥을 먹고 싶지도 않…….
“브라슈테테로 가지.”
“당장 옷 갈아입고 올게요!”
음식점 이름을 듣자마자 문을 박차고 나왔다. 브라슈테테는 공작령 인근 도시에 있는 음식점인데, 비싸고 맛있기로 유명했다.
코스 요리 하나에 내 석 달 치 봉급을 쏟아부어야 했기에 가 본 적은 없었다. 일하느라 갈 시간도 없었고 말이다.
‘죽기 전에도 한번 브라슈테테의 주방장을 초청해서 성대한 연회를 열었지.’
아직도 그 맛을 잊지 못한다. 정말 천상의 맛이었어. 거기를 데려가 준다는데 옷은 당연히 갈아입어야지!
당장 본성에서 나와 서쪽 탑으로 달려갔다.
나선형 계단을 빠르게 뛰어 올라가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숨을 헐떡이며 내가 가진 옷을 다 꺼내 침대에 늘어놓았다.
‘고급 음식점인 데다가 영지 밖으로 나가야 하니까 아무거나 입고 갈 순 없지!’
최대한 갖춰 입겠다고 다짐하며 꺼내 놓은 옷을 쳐다봤다.
“어디 보자. 이건 너무 헤졌고, 이건 좀 작은 것 같고, 이건 유행이 지났네.”
그리고 끝이었다. 참고로 말하자면 ‘유행이 지났네.’는 지금 입고 있었다.
나는 옷을 내려다보며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옷깃을 들어 냄새를 맡아 보았다. 다행히 불쾌한 냄새는 나지 않았다.
‘아무거나 입고 싶진 않았지만 아무거밖에 없으니 어쩔 수 없군!’
그래도 기분이라도 내고 싶어서 옷을 벗어 세게 팡팡 털고 다시 입었다. 머리도 손으로 빗어서 하나로 묶고, 가죽 신발도 헝겊으로 대충 닦았다.
좋아. 완벽해.
“브라슈테-테-! 브라슈-테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계단을 날 듯이 내려갔다.
다시 본성으로 가려는데 서쪽 탑 문 앞에 서 있는 마차가 보였다. 혹시나 해서 다가가자 창문으로 라이오넬이 보였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라이오넬이 일어나는가 싶더니 곧 마차 문이 열렸다.
“그 옷은 탈피해야 벗을 수 있는 건가?”
“말씀을 꼭 그렇게 재…….”
재수 없게 해야겠냐고 말하려다 공작 새끼의 황홀할 정도로 잘생긴, 그리고 딱 그만큼 살벌한 얼굴과 마주쳤다.
“재?”
“재치 있게 하셔야 할까요?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