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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제발 좀 망하세요 (7)화 (7/130)

7화

관리소 쪽으로 걸으며 눈이 마주치는 사람마다 인사를 했다.

이전 관리인들에게 당한 게 많아서인지 대부분 떨떠름한 얼굴로 마지못해 인사를 받아 주었다. 간혹 못 들은 척 무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세상에 날도 더운데 왜 걸어 다녀요?”

“그냥 겸사겸사 인사나 나눌까 해서요. 일하는 데 불편한 건 없으시고요?”

“우리야 뭐, 그냥 참고 하는 거지.”

“그래도 불편한 게 있으면 꼭 말씀해 주세요. 세금이 너무 부담스럽거나 필요한 물품이 있다거나, 그런 거요.”

“세상에나…….”

관리인의 입에서 세금 이야기가 나올 줄은 몰랐는지 아주머니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그러면 곡괭이 좀 새로 구할 수 있을까요? 닳아서 그런지 영 밭매기가 힘들어서…….”

영지민들은 돌아가며 일정 기간 무보수로 공작 소유의 땅에서 일했다. 간혹 파우트 씨처럼 계약하고 보수를 받으며 경작하는 예도 있었지만 소수였다.

일반적인 영지민들은 수확 시기에 그해 겨울을 넘길 수 있을 만큼의 작물을 받아 가긴 했으나 그게 다였다.

무보수 노동 기간에 사용하는 우마나 농기구 역시 모두 공작의 소유였다.

그러니 망가지면 관리인이 교체해 주는 게 당연했다.

“그럼요! 제가 대장간에 알아보고 바꿔 드릴게요.”

“아유, 이제야 제대로 된 관리인이 들어왔네! 잠깐 기다려 봐요.”

그 당연한 일을 이전 관리인들은 해 주지 않았나 보다.

아주머니가 눈에 띄게 기뻐하며 어딘가로 달려갔다. 그러고는 곧 감자 하나를 들고 왔다.

“내가 출출하면 먹으려고 가져왔던 건데, 이거라도 먹으면서 가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고마워서 그래! 빨리 하나 들어요.”

“감사합니다.”

포슬포슬한 감자를 입에 물자 아주머니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아주머니와 인사를 나누고 다시 걸었다.

길을 가다 만나는 사람들도 직접 걸어서 영지를 돌보는 관리인은 처음이라며, 고생한다고 이것저것 챙겨 주었다.

그러나 관리소와 가까워질수록 영지민들은 냉담해졌다. 인사조차 제대로 받아 주지 않았다.

기분 좋았던 것도 잠시, 다시 내 마차를 탈취해 간 아레트의 만행에 분노가 치밀었다.

그렇게 장장 한 시간을 걸어 관리소 앞에 도착했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기운이 쪽 빠져 죽을 것 같았다.

‘아레트, 가만 안 둬!’

이를 갈며 사무실 문을 벌컥 열었다. 숨을 헐떡이며 그 자리에 주저앉자 소피가 고개를 들었다.

“관리인님?”

“소피. 물……. 물 한 잔만…….”

“일단 여기 앉으세요.”

소피가 나를 번쩍 들어 소파에 앉혔다.

소피, 힘이 세구나. 속으로 감탄하며 축 늘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피가 내게 물 한 잔을 가져다주었다.

나는 한 번에 물을 들이켜고 컵을 쾅 내려놓았다. 소피가 옆에 앉으며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아레트……. 허억……. 아레트, 개새끼…….”

가쁜 숨을 몰아쉬며 중얼거리자 소피가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목소리로 동조했다.

“그분이 좀 개새……. 헙!”

그러다 갑자기 입을 딱 다물고 주변을 홱홱 돌아보았다. 나도 혹시 아레트가 있나 싶어 같이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레트는 없었다.

“죄송해요. 훈련받을 때 욕하면 꼭 뒤에 계시더라고요.”

훈련? 고개를 기울이다가 예전에 들었던 걸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세 명 다 부상 때문에 기사 생활을 그만뒀다고 했었지.’

고개를 돌리자 책상 구석에 젖은 수건처럼 널브러져 있는 톰과 제럴드가 보였다.

어떻게 부상으로 퇴역한 기사를 이렇게 부려 먹을 수가 있지?

안 되겠다.

이렇게 된 이상 예산을 왕창 끌어다 쓰더라도 인원을 과하게 보충해야겠어!

* * *

별안간 파우트가 눈물을 터트린 날로부터 사흘이 지났다.

이상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분명 파우트가 엉엉 울었다는 걸 아레트에게 전해 들었을 텐데. 라이오넬은 왜 아무 말이 없지?

심지어 내가 결재를 올린 천막 설치, 농기구 교체, 감독관 인원 증대 건도 승인됐다.

‘보고를 올리러 갔을 때도 아무 말 없고 말이야.’

찜찜한 마음으로 마차에 올랐다. 그리고 관리소에 들르지 않고 바로 파우트 씨에게 맡긴 밭으로 향했다.

‘그나마 다행이야. 파우트 씨가 울고 난 이후로 밭에 안 나와서.’

혹시라도 개과천선해서 열심히 일할까 봐 걱정했는데.

안도에 한숨을 내쉬는데 창밖으로 이상한 풍경이 보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잡초만 무성하던 5000평의 밭에 일정한 두께의 도랑이 파여 있었던 것이다.

“멈춰 주세요!”

창문을 열고 소리치자 마차가 천천히 멈췄다.

당장 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눈을 비비고 볼을 꼬집어 봤으나 아프기만 할 뿐이었다. 밭은 여전히 당장 작물을 심어도 쑥쑥 자랄 것 같은 상태였다.

“이게, 이게, 어떻게 된 거죠?”

고개를 돌리자 땀으로 흠뻑 젖은 파우트 씨가 보였다.

그의 옆에는 마을의 망나니로 유명한 4명이 헝겊 인형처럼 뒹굴고 있었다.

그들의 발과 몸은 엉망이었으나 눈빛은 아주 맑았다. 뿌듯한 얼굴로 하늘을 보며 숨을 몰아쉬거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왜 울고 있어, 왜!’

여기 무슨 마법이라도 걸려 있나? 혹시 터가 잘못됐나? 망나니를 개과천선시키는 터인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파우트 씨를 봤다. 그가 머쓱하게 웃으며 뒷덜미를 문질렀다.

어둠이 걷힌 듯한 미소를 보자 불길함이 엄습했다.

“놀라게 해 주고 싶었어.”

“여러 의미로 놀랍긴 한데…….”

허탈하다. 이러라고, 이렇게 열심히 일하라고 내가 매일같이 응원한 줄 알아?

이렇게 밭을 잘 갈아 놓으면 작물이 잘 자랄 거 아니야!

‘그럼 내 복수는? 내 복수는!’

아이고, 복수야! 어디 갔니, 내 복수!

엉엉 울고 싶었다. 다 커서 애처럼 울 순 없기에 꾹 참았지만, 코끝이 시큰하고 눈물이 핑 돌았다.

이를 악물고 서 있는데 옆에서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또 뭘 울고 그래!”

“……왜 이렇게 변하신 거예요, 파우트 씨.”

훌륭한 조력자였잖아요. 며칠 동안 나오지도 않았잖아요!

원망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자 파우트 씨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왜긴 왜야. 관리인님 덕분이지.”

무슨 뜻이냐는 눈으로 쳐다보자 파우트 씨가 얼굴을 시뻘겋게 붉히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사실 부끄럽더라고.”

이건, 그, 그런 분위기다. 고해 성사 할 분위기! 화제를 전환하기 위해 핑곗거리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다른 말을 꺼낼 틈도 없이 파우트 씨가 말을 시작했다.

“부인을 잃고 내가 너무 망나니처럼 살았어. 그러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일을 구해 보려고 했는데 잘 안 되더라.”

“그, 그러시구나. 하하. 그런…….”

“일을 구해도 자꾸 성질만 부리게 되고. 그러니까 내가 너무 쓸모없는 사람 같았어. 그래서 더 아무렇게나 살았지.”

대충 맞장구쳐 주고 화제를 돌리려는데 파우트 씨가 빈틈없이 끼어들었다.

“차라리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으면 내가 구제 불능이라는 좌절감도 안 들 테니까.”

우리가 이런 속내까지 터놓을 정도로 친한 사이는 아니잖아요.

부담스럽다고요!

그만하라는 뜻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파우트 씨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가 이마를 짚으며 웃었다.

“그래. 그렇게 살면 안 됐지.”

“그런 뜻으로 고개를 저은 게 아니라…….”

“적어도 나를 믿고 기회를 준 관리인님에게 실망을 안겨 주면 안 되는 거였어. 첫날 너무 부끄럽더라고.”

깨달았다. 이 사람, 지금 자기감정에 너무 심취해서 내 말은 들을 생각도 안 하고 있다.

“저번엔 뭐라도 해 보려고 일찍 나왔는데 의욕이 나지 않았어. 그래서 잡초 한 줌만 뽑았을 뿐인데, 그걸 알아봐 주고…… 크흡…….”

“제가요? 언제요?”

“모른 척할 필요 없어!”

모른 척이 아니라 정말 모르는 건데요!

“나를 계속 응원해 주고. 심지어 내가 술을 마시거나 게으름을 피워도! 이렇게 한결같이 날 믿어 준 건 관리인님이 처음이야.”

그런 식으로 믿은 거 아니라고요!

발을 동동거리며 울상을 지었다. 하지만 파우트 씨의 말은 멈추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헝겊 인형들까지 울기 시작했다.

너희는 왜 우는데! 울고 싶은 건 나라고!

“사실 그게 아니라…….”

라이오넬에게 복수하려고 한 건데. 라고는 절대 말할 수 없었다.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이걸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모르겠다.

허탈하게 웃을 수밖에.

“허허.”

넋 나간 얼굴로 서 있는데 파우트 씨가 털이 수북한 팔로 눈물을 훔쳤다.

“그래서 며칠 동안 저 녀석들을 설득했어.”

파우트 씨가 널브러진 망나니 4인방을 가리켰다.

“왜 그러셨어요. 왜…….”

“나 같은 놈들이 정신 차리면 관리인님이 뿌듯해할 것 같아서.”

파우트 씨가 환하게 웃었다.

“앞으로 책임지고 이 밭을 가꿀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건실하게 웃지 마! 책임지지도 말란 말이야!

내가 속으로 소리치거나 말거나 파우트 씨는 의지를 불태웠다.

그는 내 손을 덥석 잡고 몇 번 흔들었다. 그리고 망나니들을 이끌고 밭으로 들어갔다.

차마 내 앞에서 열심히 일하는 걸 두고 볼 수 없었다. 나는 눈물을 머금고 마차에 올랐다.

‘이제 어떡하지?’

이대로 두면 분명 경작이 잘될 텐데. 천막이나 감독관 인건비 지출 같은 걸로는 메꿀 수 없는, 어마어마한 이익을 가져다줄 것이다.

‘이렇게 라이오넬이 잘되는 꼴을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지켜만 봐야 하는 거야?’

그럴 순 없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파우트 씨의 경작을 막아야 해!

어떡하지? 파우트 씨를 해고해야 하나?

사실 그간의 행실을 보면 해고당해도 할 말이 없긴 했다.

‘그래도 잘한다, 잘한다, 칭찬하던 일을 꼬투리 삼긴 찔리는데.’

그럼 그거 말고 다른 거로라도 꼬투리 잡아서 해고해야겠다. 어떤 게 있을까? 고민하는 사이 마차가 멈췄다.

내려서 관리소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한 아이가 보였다. 아이는 현관 앞을 서성이며 안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영락없이 누군가를 찾는 모양새였다.

“얘.”

아이가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봤다.

“누구 찾아왔어?”

“안녕하세요! 저는 제롬이라고 하는데요. 새로 온 관리인님을 찾아왔어요.”

“나를?”

고개를 기울이며 묻자 아이가 환하게 웃었다.

저 미소,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빤히 보는데 아이가 내 손을 덥석 붙잡았다.

“관리인님! 정말 감사해요. 어제 아빠가 술을 드시지 않았거든요!”

아빠가 누구길래 나한테 고맙다고 그러지? 설마 파우트 씨는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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