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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제발 좀 망하세요 (6)화 (6/130)

6화

가까이 가자 어김없이 술 냄새가 풍겼다. 밭에는 여전히 돌들이 굴러다니고 잡초가 무성했다.

관리가 안 된 꼴을 보자 독하고 불쾌한 냄새가 마치 허브처럼 느껴졌다.

‘그럼 그렇지. 내 안목이 틀렸을 리 없어.’

저절로 미소가 피어나 고개를 끄덕였다.

“뭐야, 왜 실실 쪼개?”

“일은 하지 않으셨나 봐요?”

“……뭐, 그러면 내가 건실하게 밭이라도 매고 있을 줄 알았나?”

파우트 씨가 픽 웃으며 건들거렸다.

이 사람……. 점점 마음에 든다!

“아니요! 당연히 일할 거라고 상상도 하지 않았죠. 잘하고 계세요.”

“뭐?”

파우트 씨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버럭 소리쳤다.

얼굴이 벌겋게 변했으나 술기운 때문인지 아니면 그냥 화가 난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지금 비꼬는 거냐? 어?”

“비꼬긴요! 진심으로 하는 말이랍니다. 저는 파우트 씨를 믿어요!”

믿는다는 말이 나오니까 라이오넬이 한 말이 떠올랐다.

‘아니, 생각해 보니까 웃기네. 낯선 사람이라 경계를 해? 3년이 지나도 경계할 거면서. 아무리 노력해도 안 믿을 거면서!’

열이 뻗쳐 씩씩거리자 파우트 씨가 뒷걸음질 쳤다.

도망치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하소연할 곳이 필요했기에 그의 옷을 덥석 부여잡았다.

“그렇지 않아요?”

“뭐가!”

“자기가 일을 시켰으면 믿어야 하잖아요! 그게 맞는 거잖아요!”

“왜 화를…….”

“그래요, 안 그래요?”

“그, 그렇지.”

“그러니까 의심병 말기인 누구랑 다르게 저는 파우트 씨를 믿어요! 암, 믿고 말고요!”

갑작스러운 내 폭주가 당혹스러웠는지, 파우트 씨는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그제야 흥분을 좀 가라앉히고 원래의 주제로 돌아왔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변하지 말고 이대로만, 쭉! 그냥 이대로만 해 주세요!”

그래 지금처럼만, 일 같은 건 생각하지 말고 술이나 마시고 농땡이나 피워 주세요. 제 둘도 없는 조력자가 되어 주세요!

신뢰를 가득 담아 바라봤다.

파우트 씨가 주춤거리며 옷을 잡아당겼다.

“그런다고 내가 일할 줄 알아? 나한테 일을 맡긴 걸 후회하게 될 거다.”

“그럴 리가요!”

앗. 속으로 생각한다는 게 입 밖으로 나와 버렸다.

근데 뭐, 상관없겠지. 저렇게 일을 망칠 의지가 확고하신데!

“사실 밭에 나와 계시는 것만으로도 놀랐답니다. 요즘 날이 뜨겁잖아요. 아! 차라리 천막을 쳐 드릴까요?”

“무, 무슨 소리야!”

“날이 더우니까요.”

“나 같은 놈한테 그렇게 할 필요까진…….”

“있어요! 해야 해요!”

그래야 예산을 더 청구할 수 있다.

파우트 씨뿐만 아니라 다른 경작인들한테도 천막을 쳐 줘야지.

이렇게 하나둘씩 쓰는 돈을 늘리는 거야. 그런데다가 농사까지 망쳐 벌이가 시원치 않아지면 공작 놈도 타격을 받겠지.

“흐흐흐.”

상상만 해도 묵은 체증이 확 내려가는 기분이다!

한참을 웃다가 내 웃음이 너무 음산하다는 것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아니나 다를까, 파우트 씨가 이간질을 꾸미는 간신배를 목격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뭐, 왜, 뭐!’

뚱한 얼굴로 쳐다보자 파우트 씨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몸을 틀어 마을을 향해 갔다.

“파우트 씨 어디 가세요?”

“퇴근한다, 왜!”

아직 해가 중천인데! 점심도 되지 않았는데! 게다가 관리인이 코앞에 있는데! 저렇게 바람직할 수가.

나는 감동을 감추지 못하며 크게 손을 흔들었다.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파우트 씨가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파우트 씨가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양손으로 머리를 거칠게 헤집은 그가 한숨을 푹 내리쉬었다.

뭔가 심경이 복잡해 보였지만 알 게 뭐람. 뭐든 좋으니까 일만 하지 마세요!

상쾌하게 파우트 씨를 보내고 돌아섰다.

그리고 며칠 동안 그를 찾아갔다. 파우트 씨는 아주 나날이 발전해 갔다.

밭에 앉아서 도박판을 벌이거나 술을 마셨다. 어떤 때는 아예 일터에 나오지도 않았다.

칭찬해 주면 더 잘하는 사람이구나 싶었다. 그래서 그가 보일 때마다 크게 손을 흔들었다.

“파우트 씨! 잘하고 계세요! 오늘도 힘내세요!”

물론 칭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파우트 씨의 표정이 구겨졌으나 알게 뭐람. 저러고 나면 더 막무가내로 나가니 나한테는 잘된 일이지!

‘이제 잡초를 뽑고 땅을 갈아 놔야 농사를 할 수 있는데. 이대로 두면 제일 비옥한 땅에서 수확할 수 있는 게 없으니 분명 올해 예산은 적자가 나겠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나는 오늘도 파우트 씨에게 맡긴 밭으로 향했다. 하지만 어디에도 파우트 씨는 보이지 않았다.

“흐흐흐.”

나도 모르게 흐뭇한 웃음이 흘렀다. 뿌듯한 얼굴로 농작지를 바라보는데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렸다. 마침 멀리서 걸어오는 파우트 씨가 보였다.

나는 환하게 웃으며 손을 크게 흔들었다. 파우트 씨가 걸음을 우뚝 멈춰 뒤를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슬쩍 몸을 트는 게 아무리 봐도 도망가려는 사람 같았다. 나는 일부러 큰 소리로 그를 불렀다.

“파우트 씨!”

“어…….”

그가 목덜미를 문지르며 달팽이처럼 걸어왔다.

게으른 걸음걸이가 마음에 들었다. 흐뭇하게 바라보자 그가 시뻘건 얼굴로 버럭 소리쳤다.

“뭐야! 왜 또 왔어?!”

“그냥 잘하고 계신지 확인하러 왔죠.”

고개를 돌려 경작지를 봤다. 라이오넬의 머리숱처럼 풍성한 잡초를 보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오늘도 잘하고 계세요.”

내 말에 파우트 씨가 인상을 확 찌푸렸다. 그러고는 경작지를 보며 뭐라고 중얼거렸다.

“네?”

제대로 듣지 못해 되묻자 파우트 씨가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씩씩거리다가 소리쳤다.

“그게 티가 나냐고!”

그게 티가 나냐니? 어떤 걸 말하는 거지?

게으름 피운 거? 작물 대신 잡초를 키운 거? 어제는 이 시간에 퇴근했는데, 오늘은 이 시간에 출근한 거?

셋 중 뭘 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티가 났다.

“그럼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파우트 씨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술 냄새가 안 나네. 혹시 술 마실 시간을 놓쳐서 금단증상이라도 온 건가?

나는 그의 손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힘들면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어제보다 훨씬 좋아졌으니까 내일도 더 잘하실 수 있을 거예요.”

“크흡.”

불길한 소리가 들렸다. 나는 허리를 숙여 파우트 씨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그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서 있었다.

뭐야. 내가 뭘 했다고 울어?

당황해 뒷걸음질 치는데 등에 뭔가 툭 부딪쳤다.

무심결에 뒤를 돌아본 나는 너무 놀라 비명을 지르며 넘어지고 말았다.

“으악!”

언제 왔는지도 모를 아레트 덱스터가 석상처럼 서 있었던 탓이었다.

“어, 언제 오셨어요?”

아레트는 말없이 나를 내려다봤다. 동시에 파우트 씨 쪽에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흐어엉!”

아레트와 눈이 딱 마주쳤다.

앞에서는 시선이, 옆에서는 울음소리가 들리니 정신이 없었다.

“관리인님이, 흡, 크흐흑. 내가, 잡초를……!”

응? 왜 갑자기 나를 언급하는 거야. 이, 이러면 꼭 내가 울린 것 같잖아!

나는 벌떡 일어나 파우트 씨의 팔뚝을 붙잡았다.

“아니, 제가 뭘 어쨌다고……. 울지 마세요! 뚝!”

“내, 내가, 크흑, 흡! 잡초……. 흐어엉. 뽑은 걸, 흐흐흑, 알아주니까!”

뭐라 그러는 거야? 코 먹는 소리와 흐느끼는 소리가 너무 커서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

뭘 알아야 해명이라도 하는데!

답답해 발을 동동 구르는데 뒤통수에서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그제야 아레트의 존재를 다시금 깨달았다.

“제가 울린 거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그러거나 말거나 아레트는 나와 파우트를 번갈아 보았다. 그러더니 퇴마당한 유령처럼 멀어졌다.

그는 라이오넬의 눈과 귀였다.

저렇게 유령처럼 돌아다니다가 알아낸 사실을 라이오넬에게 보고하곤 했다.

이 상태로 보내면 내가 파우트 씨를 울렸다고 보고할 게 뻔했다.

‘안 그래도 파우트 씨에게 접근했다고 경고 들었는데!’

울렸다는 보고가 들어가면 끝이다. 불려 가서 몇 시간 동안 해명해도 들어 주지 않을 거야!

“파우트 씨, 저는 일단 갈게요. 진정하고 오늘은 퇴근하세요. 알겠죠?”

파우트 씨는 대답할 정신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나 역시 대답을 들을 정신이 없었다.

나는 그의 어깨를 대충 다독이고 아레트를 향해 달렸다.

“저기요! 잠깐만요! 아레트 씨!”

무슨 놈의 사람이 저렇게 빨라! 저런 키와 몸을 가지고 저 속도로 움직이는 게 말이 돼? 생긴 건 석상 같아도 무게는 깃털처럼 가볍나?

아무리 뛰어도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숨을 헐떡이는데 아레트가 마차에 올라탔다.

나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깨달았다.

“야! 그거 내 마차잖아!”

그걸 네가 타고 가면 난 어떻게 돌아가냐고!

소리치며 따라갔으나 마차는 멈추지 않았다. 나는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혹시 아레트가 타고 온 말이나 마차가 있나 주변을 둘러봤으나 아무것도 없었다.

‘망할 아레트. 도대체 어떻게 온 거야!’

씩씩거린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파우트 씨가 있는 쪽으로 돌아갈까 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멀리 와 있었다. 게다가 관리소와 반대 방향이었다.

‘걸어가야 하나? 정말? 저렇게 먼 곳을?’

우마차라도 빌려 타고 싶었으나 오늘따라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다.

걸어가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씩씩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 이렇게 된 거 영지민들하고 얼굴이나 트지 뭐! 나는 다 아는 사람들이지만 그 사람들은 나를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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