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레반스가 말도 안 된다는 눈으로 라이오넬을 보았다.
라이오넬이 말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자 레반스가 그의 뒤통수에 대고 소리쳤다.
“각하께서 자꾸 의심하고 갈구니까 영지 관리인들이 두 달을 못 버티고 도망가는 거 아닙니까!”
라이오넬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다 가르쳤다 싶으면 도망가고, 익숙해지려나 싶으면 도망가고! 잠깐 쉬게 해 달라고 해서 보내 줬더니 도망가고! 몸이 아프다고 도망가고!”
레반스가 악에 받쳐 소리쳤다. 그리고 멍이 들도록 가슴을 내리쳤다.
그대로 두면 혈압이 올라 기절할 것 같았다. 그 사실을 눈치챈 아레트가 냉큼 끼어들었다.
“맞습니다. 누가 영지 문제를 따지기 위해 이 시간에 찾아온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라이오넬이 생각에 잠긴 듯 잠시 말이 없었다. 이제야 말이 통하나 싶어 레반스의 안색이 조금 밝아졌다.
그러나 라이오넬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열정적인 놈이 있으면 소원이 없겠군.”
레반스는 혈압이 다시 치솟아 목덜미를 부여잡았다. 그를 보며 아레트가 고개를 저었다. 그가 눈빛으로 말했다.
‘각하는 답이 없어. 머리에 뇌 대신 영지를 부흥시키라는 여왕님 명령만 들어앉아 있으니 포기해.’
레반스는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는 얼굴로 집무실 문을 여는 라이오넬의 옷자락에 매달렸다.
“제가 내일 일찍 데려오겠습니다! 사람이 잠은 자야죠.”
“너랑 아레트는 자지 않고도 잘 견디잖아.”
“저희는 전쟁터에서 구르던 놈들 아닙니까! 똑같이 대하시면 또 도망갑니다. 그럼 진짜 끝이에요! 더 뽑고 싶어도 못 뽑습니다!”
레반스가 질질 끌려가며 고래고래 소리쳤다.
라이오넬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걸음을 멈췄다.
“알겠으니까 그만 떠들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레반스가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오넬은 못마땅한 눈으로 레반스를 보다가 방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내일 아침 식사 전에 데려오도록.”
레반스의 얼굴이 환해졌다가-,
“첩자인지 아닌지는 내가 직접 확인하지.”
바로 어두워졌다.
* * *
복도에 울리는 종소리에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이건 아침 식사를 알리는 종이다.
힘들게 일하면서도 내일이 오기를 기다렸던 이유! 그건 바로 공작성의 식사가 진짜, 정말, 엄청나게 맛있기 때문이었다.
‘빨리 가야지.’
옷을 갈아입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문을 힘차게 열었을 때였다.
달갑지 않은 얼굴과 마주쳤다.
“좋은 아침입니다.”
레반스잖아? 왜 이른 아침부터 찾아왔지? 설마, 라이오넬이 벌써 날 찾는 건 아니겠지?
불안한 마음에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가 뒤늦게 짧게 감탄하더니 특유의 친절한 미소를 지었다.
“보좌관 레반스 다니오라고 합니다.”
“넬리 페퍼예요.”
제발 공작이 찾는다고만 하지 마. 제발!
“공작님께서 찾으십니다.”
망했다. 전에도 툭하면 새벽부터 불렀다.
‘다녀오면 먹을 게 없을 텐데.’
새벽 훈련을 마친 기사들이 식당에 왔다 가면 남는 음식이 없었다. 물론 다시 만들긴 하지만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래서 새벽에 라이오넬에게 불려 가면 어김없이 공복으로 하루를 시작해야 했다.
운이 나쁘면 종일 굶기도 했었다.
……생각해 보니 짜증 나네! 그러니까 내가 과로사로 죽었지!
“아침 먹었어요?”
“네?”
내가 이런 것을 물을 줄 생각도 못 했는지 레반스가 멍청하게 되물었다.
“안 먹었으면 나랑 같이 아침 먹고 가요.”
“공작님이 아침 식사 전에 찾아오라고 하셨습니다.”
“공작님은 아침 식사 전이시죠?”
“……그렇죠.”
“그리고 제가 올 때까지 아침을 안 드시겠죠?”
“……제가 금방 데려오겠다고 했으니, 아마 그러시겠죠.”
“그럼 언제 가든 아침 식사 전이겠네요. 뭐 좀 먹고 가요. 배고파 죽겠어요.”
레반스 놈을 두고 식당으로 향했다.
뒤에서 따라오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레반스가 뭐라고 하든 나는 밥을 먹어야 하니까!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그동안 너무 멍청하게 굴었어. 진작에 챙겨 먹었어야 했는데.
혼자 고개를 주억거렸다. 내 옆으로 레반스가 재빠르게 따라붙었다.
“정말 아침을 드시고 가실 생각입니까?”
“다니오 님도 잘 챙겨 먹고 다니세요. 죽으면 먹고 싶어도 못 먹어요.”
“꼭 죽어 보신 분처럼 말씀하시는군요.”
그래, 죽어 봤다 이놈아!
웃는 꼴이 얄미워 노려보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식당으로 들어가 접시에 원하는 요리를 마음껏 담고 자리에 앉았다. 안 먹을 것처럼 굴던 레반스도 언제 그랬냐는 듯 며칠 굶은 사람처럼 밥을 먹기 시작했다.
‘……어쩌면 진짜 며칠 동안 굶었을지도 몰라.’
라이오넬하고 24시간 붙어 있을 텐데, 밥 먹을 시간이나 제대로 줬겠어? 생각해 보니 짠하네.
갑자기 레반스의 반반한 얼굴이 수척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안쓰러운 마음에 따로 담아 뒀던 빵을 레반스에게로 밀어 주었다.
“감사합니다.”
“……많이 드세요.”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자 레반스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더니 씹어 삼키긴 하는 건지 의심스러운 속도로 순식간에 남은 음식을 해치웠다.
“빨리 가야겠습니다.”
내가 식사를 끝내자 레반스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접시를 치운 그가 바쁜 걸음을 재촉했다.
우리는 내가 머무는 서쪽 탑에서 나와 공작이 생활하는 본성으로 들어갔다.
무려 공작씩이나 되는 사람의 성이었지만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돌벽에서 흘러들어 오는 냉기를 막기 위해 걸어 놓은 태피스트리가 아니었다면, 감옥이라고 해도 믿을 만한 몰골이었다.
새삼스러운 눈으로 보며 걷는데 레반스가 걸음을 멈췄다.
“공작님 영지 관리인을 데려 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내가 분명 아침 식사 전에 오라고 했을 텐데?”
레반스에게는 당당하게 말했는데 공작의 시뻘건 눈을 보니 말문이 턱 막혔다.
그 와중에 얼굴은 또 환상적으로 생겼다. 마주하면 천년의 원한도 사라져 버릴 것 같은 생김새였다.
‘……안 돼! 얼굴에 홀려서 원한을 잊을 순 없어!’
고개를 슬쩍 돌려 시선을 피했다. 시야 끄트머리에서 라이오넬이 몸을 홱 돌려 방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나는 그 뒤를 죄인처럼 따라 들어갔다. 그리고 레반스는…… 얄밉게 웃으며 밖에서 문을 닫아 버렸다.
이, 이 배신자!
“레반스에게 식사 전에 오라는 소리 못 들었나?”
뒷골이 쭈뼛 설 정도로 듣기 좋은 저음이었다. 거칠고 갈라진 목소리는 이런 순간에도 조금 야릇하게 들렸다.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자 긴 다리를 꼬고 상석에 앉아 있는 라이오넬이 보였다.
“대답할 생각이 없나 보군.”
“들었습니다.”
서릿발 같은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라이오넬이 무릎 위에 깍지 낀 손을 올려놓으며 나를 빤히 응시했다.
“하지만 다 먹고 살자고 하는 건데 밥은 먹게 해 주셔야죠!”
“나를 보고 가도 식사할 시간은 충분할 텐데?”
“기사님들이 먹고 난 뒤에는 음식이 없어요. 다시 만들긴 하는데 출근 시간 후에 나온다고요.”
라이오넬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한 끼 정도 굶어도 돼.”
“아니요. 저는 아침 안 먹으면 쓰러져요.”
뻔뻔하게 거짓말하자 라이오넬이 옅게 조소했다.
“거짓말을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레반스와 아레트는 6년 동안 수면도 식사도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어. 그런데 아직 멀쩡하지.”
뭐?! 6년?
그런 말을 자랑스럽게 하다니……. 악마가 동족인 줄 알고 왔다가 혀를 내두르며 돌아가겠다.
“표정이 왜 그러지?”
조용히 경악하려고 했는데, 내 얼굴이 시끄러웠나 보다. 나는 시치미를 뚝 뗐다.
“제 표정이요? 왜요?”
라이오넬이 숨을 무겁게 내쉬었다. 답답해하는 걸 보니 조금 통쾌한 기분이 들었다.
미소를 감추고 있는데 라이오넬이 턱짓으로 앞에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앉아.”
일단 군말 없이 자리에 앉았다.
“파우트에게 토지를 맡겼다던데.”
“네.”
“그것도 5000평이 넘는 평야를.”
“그랬죠.”
“이유가 뭐지?”
당연히 파우트가 경작을 쫄딱 말아먹길 바라서이지!
본심이 어찌 되었든 일단 입을 다물었다. 죽기 전에는 제법 모아 놓은 돈이 있었으나 지금은 빈털터리다.
게다가 딱히 이렇다 할 재주도 없다. 가정 교사로 들어가기엔 인맥이 부족했다.
생각해 보니 농사에 대해서라고는 아는 것이 하나도 없는 나를 관리인으로 써 준 것이 용한 수준이었다.
‘아니야! 정신 차려! 무경력자에게 일자리를 줬다고 죽을 정도로 부려 먹어도 되는 건 아니잖아!’
게다가 공작성 사람들은 거의 다 평민 기사 출신이었다. 공작 밑에서 이제 막 글과 수를 배운 터라 관리인의 존재가 절실했다.
하지만 극악한 강도의 업무 탓에 지원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아마 읽고 쓰고 계산할 줄 아는 개구리가 찾아왔어도 그 개구리를 고용했을 것이다.
나는 마음을 다잡고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건장하잖아요.”
공작이 왼쪽 눈썹을 까딱였다.
“사지 멀쩡하고, 건장하고, 아들까지 있잖아요. 그런 사람을 술과 도박 좀 한다고 놀게 내버려 두다니. 인력이 너무 아까웠어요.”
“……그에게 아들이 있는 것과 술과 도박을 하는 건 어떻게 알았지?”
3년이나 일해서 깜빡했다.
어제가 첫 출근인데 영지민의 가정사를 알고 있는 건 좀 이상하지.
이걸 수상해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날카로운 것 좀 봐. 베이겠네, 베이겠어.
‘그나저나 뭐라고 변명하지?’
어제 나와 대화 같은 대화를 한 사람은 라이오넬뿐이다. 거짓말을 했다가 들키면 더 걷잡을 수 없다.
“원래 대답하는 데에 이렇게 오래 걸리나?”
라이오넬이 재촉하는 순간 번뜩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