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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제발 좀 망하세요 (3)화 (3/130)

3화

소피의 말에 톰과 제럴드도 고개를 끄덕였다. 톰이 바로 말을 이었다.

“저는 숲, 목초지, 과수원. 소피는 광장이나 공공시설, 울타리. 제럴드는 양조장, 방앗간, 창고에 관한 일을 합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감독관이 하는 일은 담당 구역의 시설과 인부를 관리 감독하고 관련된 세금을 징수해 장부로 만드는 것이다.

나는 그 장부를 토대로 보고서를 작성해 라이오넬에게 보고하는 일을 주로 하고 말이다.

물론 경작지와 경작물, 주민을 관리 감독하는 것은 내 소관의 일이었다.

“혹시 관련된 일로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불러 주십시오.”

세 사람은 내 대답도 듣지 않은 채 자리로 돌아갔다.

다들 너무 죽을상이라 무시당한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나는 그들을 지나쳐 안쪽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이제 뭐 하지?’

전에는 소피와 제럴드, 톰에게 이것저것 물어 가며 실무를 배웠다. 하지만 지금은 3년이나 일했던 덕에 따로 배울 건 없었다.

그러니 내가 할 일은 하나다.

‘뭘 하긴. 라이오넬한테 복수해야지!’

분명 효과적인 방법이 있을 것이다. 영지민과 내 평판에는 피해가 없고 라이오넬이 죽고 못 사는 영지만 망칠 효과적인 방법이.

공작이 꼼짝 못 하는 사람과 손을 잡으면 편할 텐데. 영지민 중에 그런 사람이 있을까?

고민하던 차에 한 사람의 얼굴이 번쩍 떠올랐다.

‘파우트 레바브.’

영지민 사이에서 그에 대한 평가는 다음과 같다.

술과 도박으로 인생을 허비하는 망나니. 튼실한 몸으로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시비뿐인 한량!

행실이 그렇다 보니 주민들은 그를 믿지도, 일을 맡기지도 않았다. 이리저리 사고를 치고 다녀 재판에 회부된 적도 많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라이오넬과 그의 주변 인물들은 그에게 관대했다.

‘좋아. 파우트 씨에게 제일 큰 땅을 맡기는 거야!’

그는 일을 안 할 테니 당연히 그 땅의 농사는 망할 것이다. 시기만 놓쳐도 그 큰 땅이 그냥 놀게 될 테니까.

하지만 공작은 파우트에게 관대하니까 처벌을 내리지 않겠지?

처음 와서 그에 대해 몰랐다고 하면 내 평판에도 타격이 없을 거야.

‘좋아. 완벽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을 벌컥 열었다. 제법 큰 소리가 났다. 하지만 다들 일하느라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나는 일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근처에 대기하고 있는 마차에 올라탔다.

‘파우트 씨는 아침 댓바람부터 술을 마시니까 아마 선술집 근처에 있겠지?’

마을에 도착해 파우트가 있을 만한 술집 근처를 서성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팔과 가슴에 털이 수북한 남자가 술 냄새를 풍기며 나왔다.

커다란 덩치에 인생 따위 막살기로 한 것 같은 발걸음!

저건 분명 내 파우트 씨다. 내 조력자야.

“저기요!”

“뭐야!”

파우트가 꼬부라진 혀로 언성을 높이며 몸을 홱 돌렸다. 그리고 매우 불손한 눈빛으로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기분이 더러웠지만, 공작 놈에게 엿을 먹이기 위해서라면 이 정도쯤이야!

“뭐야? 나한테 관심이라도 있는 거야? 응?”

파우트가 빈정대며 다가왔다. 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관심 있어요.”

원하는 답을 들려줬음에도 파우트는 뭐 씹은 표정이었다. 심지어 뒷걸음질 치기까지 했다.

나는 그에게 성큼 다가가 목에 걸고 있던 금속 패를 꺼내 보여 주었다.

“새로 온 영지 관리인입니다.”

“그, 그, 그게, 뭐! 내가 말 좀 잘못했다고 감옥에라도 보내겠다는 거야, 뭐야! 어?!”

“설마요, 파우트 씨.”

발을 쾅쾅 구르며 성질을 내던 그가 움직임을 우뚝 멈추고 딸꾹질을 했다.

나는 한껏 미소 지으며 그에게 제안했다.

“저랑 같이 일해 보지 않으실래요?”

파우트 씨가 멍청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푸하하하하!”

그러더니 별안간 커다란 목소리로 나를 비웃었다.

“이봐. 내가 누군지는 알고 하는 소리요?”

물론 알다마다.

공작령의 망나니, 시비꾼, 사기꾼, 술꾼, 게으름뱅이!

3년간 일하면서 그가 재판에 회부 되었다는 소문만 수십 번도 넘게 들었다.

출근 첫날에 가장 먼저 들은 충고도 파우트 씨에 관한 것이었다. 빈둥거리고 싸움 걸기 일쑤인 사람이니 절대 일을 시키지 말라고 말이다.

즉, 지금 내게 꼭 필요한 인재라는 뜻이다. 영지를 망가뜨려 줄 장본인!

나는 미소를 감추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오세요, 파우트 씨.”

“뭐? 정말이야? 어? 정말이냐고?”

나는 그를 조용히 마차 안으로 밀어 넣고 영지 관리소로 돌아왔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감독관들이 나를 쳐다봤다. 등 뒤에 귀신 붙은 사람이라도 발견한 듯한 표정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회심의 미소를 지어 보이고 내 사무실로 들어왔다.

“여기 앉으세요, 파우트 씨.”

“이보쇼. 젊은 아가씨가 처음 와서 아직 뭘 잘 모르는 모양인데, 후회할 짓 하지 마쇼.”

젊은 아가씨 운운하는 게 딱밤을 때려 주고 싶을 만큼 마음에 안 들었다.

하지만 그는 내 공범이 될 테니 자비롭게 넘어가 주기로 했다.

“여기 계약서예요. 저는 파우트 씨에게 5000평의 땅을 맡길 예정이에요.”

“뭐, 뭐요?”

“내일 당장 시작하시고, 임금은 먼저 지급하고 나중에 수확물로 돌려받을게요.”

“임금을 먼저 준다고?”

“네. 혼자 하기 힘드시면 사람을 쓰셔도 좋아요. 단, 같이 술 마시고 놀던 사람들만 데려다 쓰셔야 해요.”

“미쳤구만, 미쳤어!”

맞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영지를 망칠 생각이 아니라면 절대 제시할 리 없는 조건이지.

하지만 나는 영지를 망칠 생각이다.

“그래서, 안 하실 건가요? 돈이 나오는데?”

“해야지! 나중에 물러 달라고 울지나 마쇼.”

파우트 씨가 계약서에 지장을 꾹 찍었다. 그러고는 내 눈치를 보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내 그는 거친 걸음으로 관리소를 나갔다.

마치 내가 계약을 파기라도 할까 봐 무서워하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깍지 낀 손으로 입을 가렸다.

“흐흐흐.”

음흉한 웃음이 잇새로 흘렀다. 내가 듣고도 깜짝 놀랄 정도였다.

혼자인데도 괜히 민망했다. 그래서 재빨리 표정을 갈무리하고 계약서를 서랍에 넣었다.

* * *

늦은 새벽, 아레트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서류를 보다가 반쯤 잠이 든 레반스가 고개를 들었다. 보고서를 검토하던 라이오넬 역시 아레트를 보았다.

아레트가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입을 열었다.

“각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뭐지?”

“새 영지 관리인이 오늘 파우트에게 경작을 맡겼다고 합니다.”

레반스가 고개를 들고 아레트에게 물었다.

“파우트라면, 그 파우트?”

“그래.”

가만히 듣고 있던 라이오넬의 표정이 심상치 않게 변했다.

파우트는 원래 라이오넬이 지휘하던 군대의 기사였다. 레반스, 아레트와 함께 라이오넬의 가장 가까이에서 싸웠다.

전쟁 중에 라이오넬은 가족보다 가깝게 지내던 친우 타티아손이 적국에 정보를 팔아넘기고 있다는 보고를 들었다.

그는 보고만으로 친우를 죽일 순 없었다. 사실을 확인하는 데에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고, 전쟁은 그만큼 길어졌다.

그사이 파우트의 아내가 세상을 떠났다.

‘내가 그때 보고를 믿고 처형을 진행했다면 적어도 파우트가 임종을 지킬 순 있었을 텐데.’

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후회도 있는 법이다.

고향에 돌아와 아내가 이미 땅에 묻혔다는 것을 알게 된 파우트는 처참하게 무너졌다.

그는 수개월이 지나도 훈련에 참여하지 않았다. 술주정을 부리고, 벌컥 화를 내고, 방황했다.

파우트를 동정하던 이들도 점차 등을 돌렸다. 화를 내고 타일러도 봤으나 파우트는 폐인 꼴을 면하지 못했다.

그러다 결국 기사단에서 제명되고 말았다.

라이오넬은 그 모든 게 제 탓인 것만 같았다. 깊은 죄책감을 느꼈다.

“왜 하필 파우트지?”

“그러게나 말입니다. 주변에서 파우트를 피하라고 경고해 줬을 텐데 이상하네요.”

라이오넬은 파우트를 데려와 여러 번 일을 맡겼다. 그러나 그는 술을 끊지 못했고, 번번이 영지 관리인과 마찰을 빚었다.

하지만 파우트는 라이오넬의 아픈 손가락, 아니지, 그냥 아픈 손가락이 아니었다.

저주에 걸려서 부러졌음에도 쉴 틈 없이 꿈틀거리는 손가락 같은 존재였다.

그 파우트에게 경작을 맡기다니. 그것도 오늘 첫 출근인 영지 관리인이 말이다.

마치 처음부터 파우트가 라이오넬의 아픈 손가락이라는 것을 알고 있던 사람 같지 않은가.

“수상하군.”

낮게 읊조린 라이오넬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놀란 레반스가 얼떨결에 그를 따라 일어났다.

“어디 가십니까?”

“관리인에게 간다.”

“이 시간에요? 미치셨습니까?”

레반스가 후다닥 뛰쳐나와 라이오넬의 앞을 가로막았다.

“안 됩니다.”

옆에서 아레트가 거들었다.

“맞습니다. 이 시간에 숙녀의 방에 찾아가는 것은 기사도 정신에 어긋납니다.”

라이오넬은 한꺼번에 레반스와 아레트를 밀어 버렸다.

“나는 기사가 아니다.”

라이오넬은 14살에 부모님을 잃고 공작이 되었다. 방계 혈족들은 호시탐탐 그를 죽이고 작위를 차지하려 기회를 엿봤다.

살기 위해서라도 의탁할 곳이 필요했다.

라이오넬은 여왕을 찾아가 그녀의 명은 뭐든 따르는 대가로 신변을 보호받았다. 그렇게 14살 때부터 여왕의 명을 따라 전쟁터를 누볐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기사였다.

하지만 한때는 절친한 친우였던 배신자의 목을 제 손으로 벤 후, 그는 기사도를 버렸다.

라이오넬은 전쟁이 지긋지긋했다. 그렇기에 몇 년 전, 그는 출전하라는 여왕의 명령을 거부했다.

여왕은 그에게 물었다.

‘네가 사람을 베는 것 외에 할 줄 아는 게 있더냐? 만약 있다면 증명해 보여라.’

여왕은 라이오넬이 전쟁터를 누비느라 방치해 두었던 알터우드 공작령을 7년 안에 비옥하게 만들어 오라고 명령했다.

‘결과가 납득할 만하다면 전쟁터로 보내지 않겠다. 그러나 실패한다면 불복종의 죄를 물어 사형하겠다.’

라이오넬은 수락하지도 거절하지도 못했다. 여왕의 마음이 이미 굳어진 후였기 때문이다. 그는 무조건 따라야만 했다.

그리고 그에게 남은 시간은 이제 5년뿐이었다.

라이오넬은 잠시 시계를 보았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영지 관리인 또한 그냥 영지 관리인일 뿐 숙녀가 아니다.”

“곧 새벽 4시입니다. 이 시간에 사람에게 찾아가는 것 자체가 그냥 미친 짓입니다!”

“담소를 나누려는 게 아니야.”

“그럼 무슨, 심문하러 가십니까?”

“틀린 말은 아니군. 아델하르트 왕자가 나를 암살하기 위해 심어 둔 자일 수도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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