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내 인생에는 3번의 전환점이 있었다.
첫 번째로 10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유산은 어머니가 사기를 당해 모두 날렸다.
재산을 잃은 날 밤, 어머니는 술에 잔뜩 취해 내게 말했다.
“넬리. 나는 다른 사람하고 결혼할 거야. 새 남편은 나한테 애가 있는 걸 몰라. 그래서 더는 널 키울 수 없어.”
“그럼 저는 어떡해요, 엄마?”
“네가 선택해. 혼자 지낼래, 아니면 외삼촌네로 갈래?”
고작 10살짜리한테 혼자 살라니. 지금 생각해 보면 웃긴 말이다. 하지만 나는 멋모르는 어린애였고 혼자 살기 무서웠다.
“외삼촌네 갈래요.”
갑작스러운 변화가 두려워 목 놓아 울어도 바뀌는 건 없었다.
나는 외삼촌네에 맡겨졌고, 다 기울어진 작은 집에서 살게 되었다. 그런 집에 남는 방이 있을 리가.
나는 거실과 부엌을 전전하며 지냈다. 손님이라도 오는 날에는 마구간으로 쫓겨났다.
남은 음식으로 키우면서도 외삼촌은 밥값을 하라고 요구했다. 그래서 삯바느질과 심부름을 하며 돈을 벌어 살림에 보탰다.
그렇게 7년을 살았다.
그리고 17살이 되던 해에 두 번째 전환점을 맞이했다.
“이, 미친 인간! 그걸 다 날리면 어떡해!”
외숙모의 외침이 집 안에 쩌렁쩌렁 울렸다. 나는 거실에 앉아 두 사람이 싸우는 걸 구경했다. 들어 보니 외삼촌이 도박으로 재산을 다 날린 모양이었다.
여기서 더 지낼 수 있을까? 걱정하는 사이 외삼촌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 생각이 있으니까 걱정 마! 옆 동네에 다 죽어 가는 돈 많은 늙은이 있잖아? 넬리를 거기로 시집 보내면 돼. 그 늙은이가 죽으면 유산은 전부 우리 거라고!”
저건 또 무슨 개소리인가 싶었다. 내가 왜 얼굴도 모르는 노인이랑 결혼해? 당연히 내 대답은 하나였다.
“싫어요.”
“뭐?”
외삼촌이 탁자를 거세게 내리치며 소리 질렀다.
“삼촌도 딸 있잖아요. 걔한테 결혼하라고 하세요.”
“이게 뚫린 입이라고! 이제껏 먹여 주고 재워 준 은혜는 갚아야 할 거 아냐?”
“그건 지금까지 드린 돈으로 충분히 갚은 것 같은데요? 사실 삼촌이 날린 돈도 제 돈이었잖아요.”
“뭐? 이 년이!”
외삼촌이 손을 치켜들었다. 그렇지만 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의자를 들어 올리자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그러고는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소리쳤다.
“네가 그동안 돈 훔쳐 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그러더니 내가 모아 두었던 돈주머니를 가져와 흔들었다.
“빈손으로 당장 꺼지든, 순순히 결혼하든, 둘 중 하나 선택해!”
내 돈인데 어떻게 훔친 게 되지? 어이가 없었지만 저 돈 때문에 발목 잡히고 싶진 않았다.
나는 의자를 옆으로 집어 던지고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동안 감사하진 않았어요. 그 돈은 적선한 셈 칠게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그래, 가! 어디 한번 나가서 살아 봐! 너 따위가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하루도 지나지 않아 집구석으로 기어들어 올걸? 그때는 각오하라고!”
뒤에서 비웃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외삼촌네를 떠났다.
그렇게 몇 년 동안 여기저기를 전전하며 닥치는 대로 일을 해 겨우겨우 먹고 살았다.
하지만 젊은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은 한정적이었다. 그렇게 4년간 방랑하듯 살았다. 잘 곳도 먹을 것도 마땅치 않았다.
사람이 굶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실감하던 중에 한 공고문을 보게 되었다.
[알터우드 공작령에서 영지 관리인 모집. 나이는 17세 이상. 성별, 경력 상관없음. 글을 읽고 쓸 줄 알며 사칙연산 가능한 자.]
공고문을 보고 혹시나 하고 찾아갔다. 그때는 몰랐는데 일이 힘들기로 악명 높은 곳이었다더라.
몇 달째 지원하는 사람이 없어 골머리 썩던 중에 내가 왔다고 했었다.
어쩐지 면접장에 아무도 없더라! 그때 도망쳤어야 했는데.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좋아하기만 했다.
그렇게 간단한 면접과 시험을 통과한 후, 출근 첫날 나는 라이오넬을 만났다.
“새로운 영지 관리인이라고?”
그래, 저 질문! 저 질문이 내 인생의 세 번째 전환점이었다.
그리고 다시 살아나서 처음 듣는 말이기도 했다.
과로사로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눈 떠 보니 과거로, 그것도 출근 첫날로 돌아와 있었다.
‘관리인이 되기 전으로 돌아가면 공작성 쪽으로는 오줌도 누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는데!’
막상 닥치니 새로 온 관리인이냐는 말에 ‘아니다, 이 악마야!’라고 소리칠 수 없었다.
지금 나가면 과로사 해서 죽진 않겠지.
하지만 나는 올해 겨울이 얼마나 추운지 이미 겪어서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은 먹을 것도, 입을 것도, 비바람을 피할 곳도 마땅치 않았다.
대답을 망설이는데 라이오넬의 목소리가 들렸다.
“혹시 모르니 미리 말해 두지. 나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 환심을 사거나 신뢰를 얻을 생각은 하지 말도록. 쥐 죽은 듯이, 아무것도 하지 말고 시키는 일만 해.”
저 말을 들으니까 또 열불이 뻗쳤다. 저 망할 놈의 불신!
애당초 내가 돌아올 거라고 믿고 휴가를 내줬으면 됐을 것을. 그러면 내가 과로사로 죽는 일도 없었을 거 아니야?!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라이오넬을 노려보다 깨달았다.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는 법! 내가 첫 번째, 두 번째 전환점이 아닌 세 번째 전환점으로 돌아온 것에도 분명 이유가 있을 거야.’
그리고 죽기 전에 했던 말을 떠올렸다. 살아나면 반드시 라이오넬에게 복수하겠다던 다짐을 말이다.
그걸 이루라고 신께서 나를 과거로 보내신 거야!
‘이유 없이 나를 믿지 못하는 놈에게는 그만한 이유를 만들어 줘야지!’
과로의 괴로움을 톡톡히 알려 줄 것이다. 그리고 라이오넬 알터우드 공작이 죽고 못 사는 영지를 아주 처참하게 망쳐 놔야지!
물론 나도 먹고살아야 하니 다음 직장을 구하는 데에 무리가 없을 정도로만!
라이오넬은 월급을 후하게 주는 편이니 3년만 허리띠를 졸라매면 산골에 작은 집 한 채 살 정도는 될 것이다.
3년 뒤에는 깔끔하게 복수를 마치고 정원이 딸린 작은 집을 사야겠다. 테라스에는 흔들의자가 있고, 갓 구운 빵 냄새를 맡으면서 아침을 맞이할 수 있는 곳으로 가겠어!
그리고 다른 지역의 영지 관리인으로 일하며 살아야지.
‘흐흐흐.’
속으로 음흉한 미소를 흘리면서도 겉으로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네, 공작님.”
정수리 위에서 라이오넬의 시선이 느껴졌다. 힐끗 쳐다보자 그가 말을 이었다.
“네가 할 일은 간단해. 숲, 과수원, 목초지, 경작지, 창고, 양조장, 방앗간, 울타리, 직물, 공공시설을 관리하는 것이다.”
‘간단’이 혹시 ‘간편한 단명!’의 줄임말이었던가?
할 일은 다시 들어도 경악스러울 수준이었다. 하지만 라이오넬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경작지와 농부들은 그대가 직접 관리하고, 나머지는 감독관이 징수한 세금 장부를 토대로 보고서를 작성한 뒤 삼 일에 한 번 나에게 보고하면 돼.”
역시 간단은 간편한 단명의 줄임말이 맞는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줄줄이 나열하면서 간단하다고 할 리가!
“아. 한 가지 더 해 줘야 할 게 있군. 선술집이나 광장처럼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나오는 말들을 모아서 나에게 보고해.”
이러니까 내가 과로사로 죽었지!
원망을 담아 쳐다보자 그의 미간이 좁아졌다.
“눈빛이 불손하군.”
“제가요? 눈빛이요?”
복수도 하기 전에 빈털터리로 쫓겨날 순 없었기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그러자 라이오넬이 금속 패 하나를 주며 턱짓으로 문을 가리켰다.
“일은 관리소에 있는 놈들에게 배우도록.”
나는 영지 관리인임을 증명하는 패를 받아 들고 밖으로 나왔다.
현관으로 나가자 마차 한 대가 준비되어 있었다. 올라타자 어디 가겠다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마차가 바로 출발했다.
알터우드 공작령은 성채를 중심으로 마을이 모여 있었다.
도개교를 건너 성벽 밖으로 나오면 광장과 선술집, 재판소가 나온다. 광장과 가까운 곳에는 공공시설이나 편의 시설이 있고, 더 지나면 민가가 있다.
그 주변으로 작은 규모의 밭이 군데군데 보였다. 영지민들이 개인적으로 경작하는 밭이었다.
대로를 그대로 달려 빠져나오면 알터우드 가문 소유의 거대한 경작지가 나오는데, 영지 관리소는 그 가운데에 있었다.
“도착했습니다.”
마부석에서 목소리가 들려서 커튼을 열어 밖을 보았다. 영지민들이 경작지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고개를 옆으로 더 돌리니 작은 성처럼 생긴 관리소가 보였다.
마차에서 내리자 일하던 사람들이 굽힌 허리를 세웠다. 나를 보는 눈빛이 그다지 곱지 않았다.
‘첫날이 생각나네.’
그때도 젊은 여자인 영지 관리인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게다가 전에 있던 관리인 중에는 영지민들에게 화풀이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들었다.
물론 나는 죽어라 일한 덕에 죽기 직전에는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진짜 죽었지!’
다시 한번 복수심을 불태우며 관리소 안으로 들어갔다.
2층으로 올라가자 소피, 톰, 제럴드가 보였다. 그들은 퀭한 얼굴로 힘겹게 반쯤 눈을 뜨고 있었다.
목과 팔은 축 늘어진 게 힘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도 손가락은 끊임없이 움직이며 장부와 보고서를 써냈다.
흑마법사한테 조종당하는 시체들처럼 말이다!
나도 죽기 전에는 저런 몰골이었다. 모르는 사람이 봤을 땐 여기가 무덤이나 귀신의 집인 줄 알았을 것이다.
사실 둘 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저 세 사람도 나처럼 죽으면 어떡하지? 그럼 진짜 여긴 무덤이 되는 거야.’
걱정스럽게 쳐다보는데 제럴드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한참 뒤에야 얼빠진 소리를 내었다.
“으어?”
진짜 좀비 같잖아!
눈물이 날 것 같아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세 명의 좀비가 나를 향해 걸어오는 걸 지켜봤다.
이내 좀비 세 명이 내 앞에 나란히 멈춰 섰다.
“새로 온 영지 관리인님이시죠? 저는 소피, 얘는 톰, 쟤는 제럴드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저희는 감독관이고, 관리인님 밑에서 일하게 될 사람들이니 말씀 편안하게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