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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제발 좀 망하세요 (1)화 (1/130)

1화

‘죽을 것 같아.’

벌써 이틀이나 밤을 지새웠다. 그런데도 아직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수확제 만찬에도 가야 하는데.’

생각이 끝나기가 무섭게 하녀인 메리가 방으로 들어왔다. 꾸벅꾸벅 졸면서 이리저리 끌려다니다 보니 어느새 드레스 차림이 되었다. 그리고 떠밀리듯 방 밖으로 나왔다.

가기 싫다. 그냥 자고 싶어.

울먹거리며 걷는데 멀리서 라이오넬 알터우드 공작이 보였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공작님!”

그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깔끔하게 뒤로 넘긴 검은 머리 밑으로 우뚝 솟은 콧날과 붉은 눈동자가 보였다.

“영지 관리인이군.”

그래, 영지 관리인이다! 나는 다짜고짜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격식 없이 매달릴 정도로 절박했다.

“공작님. 제발 휴가 좀 내주세요. 저 정말 밤낮없이 일했잖아요. 이러다 저 죽겠어요.”

“안 죽어.”

어휴. 진짜 공작이라 때릴 수도 없고!

가슴을 쾅쾅 두드리며 씩씩거리는데 앞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성난 고슴도치 같군.”

“시비 거세요?”

정중하게 물었건만 무시당했다. 나는 몸을 돌려 걸어가는 라이오넬의 등에다 대고 주먹을 흔들었다.

눈치 빠른 라이오넬이 뒤를 돌아봤다. 나는 시치미를 뚝 떼고 그의 뒤에 바싹 붙었다.

“딱, 한 달만. 따악 한 달만 쉬다 올게요!”

“한 달?”

“그럼 3주! 아니 아니, 2주! 2주만요. 저 정말 죽겠어요. 눈 밑에 그늘 좀 보세요. 삭신도 쑤시고, 잠도 제대로 못 자요. 그리고 여기! 입안도 헐었어요!”

라이오넬이 걸음을 멈췄다.

나는 이때다 싶어 입술을 잡아당겨 보여 줬다. 그가 내 입술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한 걸음 다가왔다.

시야가 역삼각형 몸에 완전히 가려졌다. 묘한 위압감에 마른침을 삼키고 있는데 라이오넬이 허리를 숙였다.

“잘 모르겠는데.”

혼을 쏙 빼놓을 정도로 잘생긴 얼굴이 불쑥 가까워졌다. 숨결이 입술에 닿을 정도였다.

당황스러워 한 발 뒤로 물러서자 라이오넬이 한 발 더 다가왔다.

그러더니 커다랗고 거친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내 아랫입술을 눌렀다. 부드러운 압박에 입술 안이 드러났다.

“거짓말은 아니군.”

입술에 온 신경이 집중되었다. 심장이 거세게 뛰고 얼굴이 뜨거웠다. 나는 주춤 물러나며 애써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 그렇다니까요.”

라이오넬이 나를 빤히 보다가 입을 열었다.

“한 달은 너무 길어.”

저건 휴가를 허락한다는 말인가? 얼굴을 활짝 피며 라이오넬을 보자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3일 주지.”

“3일이면 아무 데도 못 가잖아요.”

“꼭 어딜 가야 하나? 성에서 쉬어.”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공작성에는 허투루 일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 다들 바쁘게 지내는데 어떻게 나만 맘 편히 놀 수 있겠어?

바람 쐬러 나갔다가 곧 죽을 것 같은 몰골로 돌아다니는 동료라도 만나 봐. 나도 모르게 일하게 될 거라고!

……설마 그걸 노리는 건가?

라이오넬이라면 그러고도 남았다. 야속한 마음에 노려보다가 애써 웃었다.

“그러지 말고 조금만 더 시간을 주세요. 가까운 곳에서 쉬고 올게요!”

“나가면, 돌아온다고 장담할 수 있나?”

이전에 일했던 영지 관리인 중 몇 명이 휴가를 간다고 떠나서는 돌아오지 않았다고 들었다.

물론 나도 그런 상상을 안 했던 건 아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한 달도 안 돼서 도망친 사람들이다. 나만큼 오래 버틴 영지 관리인은 없다.

나는 그 사실에 자부심이 있었고, 도망칠 정도로 무책임하지도 않다. 돌아갈 곳도 없고 말이다.

게다가 경력도 없는 나를 받아 준 것에 감사하는 마음도 있었다. 지금은 일이 너무 힘들어서 거의 사라져 버리긴 했지만!

그리고 라이오넬과 영지 사람들하고도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었는데, 가긴 어딜 가겠어?

“당연하죠!”

“내가 그걸 어떻게 믿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달아올랐던 얼굴이 차갑게 식었다. 그러나 이내 다른 이유로 얼굴이 달아올랐다.

“지금 저를 어떻게 믿느냐고 하신 거예요?”

라이오넬이 드물게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난…….”

“저는 알터우드 공작령에서 3년이나 최선을 다해 일했어요. 그간 한 번이라도 공작님을 실망시킨 적이 있나요? 아니면 농땡이를 부렸어요?”

“넬리 페퍼.”

“어떻게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어요?”

공작 놈이 말문이 막힌 듯 가만히 있었다.

변명이 있으면 해 보라는 듯 보았으나 그의 입술은 열리지 않았다.

나는 성큼성큼 걸어 그를 지나쳤다. 그리고 만찬장으로 들어가 내 자리에 털썩 앉았다.

생각해 보니 내 바로 오른쪽이 공작 놈 자리였다. 방금 싸웠는데 붙어 있어야 한다니!

분이 안 풀려 씩씩거리는데 왼쪽에 앉은 레반스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공작님 심기가 불편해 보이시는데, 무슨 일 있었습니까?”

내 심기가 더 불편하거든! 나는 자리에 앉는 라이오넬을 노려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큰 소리로 욕하고 싶었다. 하지만 손님들이 가득한데 상관을 욕보일 순 없어 참았다.

‘진정하자. 진정해.’

깊게 심호흡하자 정수리까지 차오른 화가 좀 가라앉았다. 그래도 욕은 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나는 레반스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가 내 입가에 귀를 가져다 댔다.

귓속말로 라이오넬 욕을 우르르 쏟아 내자 레반스의 미소가 점점 굳었다.

반면에 내 분노는 좀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번뜩 좋은 생각이 났다.

“그러지 말고 레반스 님이 공작님 몰래 휴가 결재 서류에 승인 도장 좀 찍어 주세요.”

“그러다 걸리면 저 죽어요.”

“저번에도 거절했잖아요. 이번 한 번만, 응? 딱 한 번만요. 휴가 못 가면 제가 죽어요.”

“안 됩니다.”

칼 같은 거절이었다. 원망을 담아 그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레반스가 몸을 피하며 능청스럽게 웃을 때였다.

라이오넬의 목소리가 들렸다.

“레반스.”

레반스가 표정을 갈무리하고 몸을 틀었다.

“예, 각하.”

“할 말이 있으니 아레트와 자리를 바꾸도록.”

만찬 시작 직전에 자리를 바꾸라고 하다니. 레반스도 어이가 없었는지 멀뚱히 앉아 있었다. 그러자 라이오넬이 경고하듯 다시 한번 레반스의 이름을 불렀다.

“레반스.”

그제야 레반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공작의 오른쪽에 앉아 있던 아레트 덱스터가 왔다.

순식간에 주변이 조용해졌다.

기사단장인 아레트 덱스터는 지나치게 과묵한 편이었다. 3년간 대화한 게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래도 다들 담소를 나누는데 우리만 조용한 것도 웃겼다. 나는 고기를 썰다가 어색함을 이기지 못하고 말을 꺼냈다.

“날씨가 참 좋죠?”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창밖으로 번개가 번쩍였다. 하지만 아레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비 오는 날을 좋아하시나 봐요.”

“싫어합니다.”

“아. 그, 그렇구나. 하하.”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좋아. 대화는 포기하자. 그냥 밥이나 먹어야지.

입 다물고 포크와 나이프를 움직였다. 조금 지나자 식사가 끝났다. 다른 사람들의 접시와 달리 나와 아레트의 접시만 텅 비어 있었다.

소음을 들으며 가만히 앉아 있으니 졸음이 몰려왔다. 꾸벅꾸벅 조는데 하녀가 내 앞으로 디저트를 내려놨다.

“아, 고마워요.”

몽롱하게 대답하고 디저트를 봤다. 우유 푸딩 위에 라이오넬이 죽고 못 사는 딸기 콩포트가 올려져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라이오넬은 디저트가 탐났는지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제 디저트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기 힘든 모양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모습이 귀여워 보였다.

‘하여간. 저 얼굴만 보면 화도 못 내겠다니까.’

한숨 쉬듯 웃자 그의 얼굴에도 옅은 미소가 감돌았다. 라이오넬 나름대로 화해하자고 신호를 보내는 것이었다.

좋아. 내가 선심 쓰지 뭐.

나는 라이오넬이 손도 대지 않은 샐러드를 가리켰다.

“샐러드랑 바꿀래요?”

“……그러지.”

푸딩을 주고 라이오넬이 건네는 샐러드를 가져왔다.

배가 고프진 않았으나 마침 입이 심심했다. 포크를 들어 샐러드를 한가득 퍼 올렸다. 입에 가득 넣고 우물우물 씹자 시큼하고, 쓰고, 톡 쏘는 맛이 느껴졌다.

원래 맛이 이랬나?

좀 독특하긴 해도 상한 맛은 아니었다. 게다가 묘하게 입맛에 맞았다. 다시 한번 크게 떠서 입에 넣자 옆에서 라이오넬이 작게 웃었다.

“잘 먹는군.”

그러더니 하녀가 가져다준 샐러드를 다시 내게 건네주었다.

“감사합니다.”

우물거리면서 대답하고 다시 샐러드를 먹었다. 역시. 독특해. 감탄하며 먹는 사이 만찬이 끝났다.

몇몇은 떠나고 몇몇은 남아 대화를 나눴다. 나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와인을 마셨다. 서서히 몸이 무거워졌다.

‘피곤한데 술을 마셔서 그런가?’

머리도 깨질 듯이 아팠다. 며칠 밤을 새우면 으레 그렇듯 몰려오던 두통이었다. 갑자기 급격한 피로가 몰려들었다.

일 때문에 밤을 지새운 적은 많았지만 이렇게까지 피곤한 적은 없었는데?

그래. 어제 평소보다 조금 더 무리하게 일하긴 했다.

‘빨리 들어가서 약 먹어야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눈앞이 핑 돌았다.

“어?”

순간, 뒤로 넘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움직이려고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마치 팔다리에 돌덩이를 매달아 놓은 듯했다.

곧 쓰러질 것을 예감하고 눈을 질끈 감았을 때였다. 단단한 팔이 허리를 감쌌다.

“넬리!”

라이오넬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마치 누군가 내 폐를 꽉 쥐고 있는 듯했다.

사흘간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일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나, 죽는 건가? 이렇게 젊은 나이에? 그것도 과로사로?

순간 쉬지 못한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치며 분노가 확 치밀었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라이오넬의 옷깃을 붙잡았다.

“공작님, 살아……, 복수…….”

살아나면 반드시 복수하겠다고 말하고 싶은데, 목소리가 툭툭 끊겼다.

순간 심장이 콱 조여들었다.

이것 봐. 내가 진짜 죽을 것 같다고 했잖아!

억울함과 두려움에 눈물이 흘렀다. 흐릿해진 시야 너머로 라이오넬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크게 벌어지는 게 보였다.

“젠장!”

라이오넬이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숨이 옅어지고, 몸에 힘이 빠진다.

‘안 돼. 죽고 싶지 않아. 제발 살려 줘.’

간절하게 기도했지만 눈이 점점 감겼다. 다급하게 의사를 찾는 라이오넬의 목소리도 점차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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