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날 밤을 책임져 (88)화 (88/88)

특별외전 17화

“그 아이 아빠와 아이가 다시 만나 잘 살 수 있도록 그 집을 좀 치워주는 게 어떨까?”

“그래요. 그거 좋은 생각이에요.”

수인은 박수를 쳐가며 기뻐했다. 딱 그 아버지의 그 딸 같다고 할까. 수인은 차기 자선 의원 원장으로 손색이 없었다. 

“그나저나 현 선생님, 격투 실력이 녹슬지 않으셨네요?”

훈훈하게 마무리가 되어가자 진창욱이 슬쩍 농담을 걸어댔다. 

“나는 사실 진창욱 선생이 가장 가깝게 있어서 그 남자를 먼저 제압하나 했습니다.”

“에이. 저는 당연히 현 선생님 믿고 있었죠.”

두 남자는 은근히 기 싸움하듯 말을 주고받았다. 그때 재건이 끼어들었다. 

“그 남자 덩치가 어마어마하게 좋아서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긴 하다. 암튼 현시후 엄지 척.”

“저도 인정. 현 선생님 오늘 멋졌습니다.”

재건의 말에 진창욱이 슬쩍 말을 보태었다. 

“수액 봉지를 나는 그런 용도로 쓰는 의사 선생님 처음 봤어요.”

최나리가 또 끼어들었다. 그 말에 모두 박장대소를 했다. 

“그래 맞아. 나도 날아가는 수액 봉지를 보면서 허걱했었다.”

“액션 영화의 한 장면 같았지?”

박 간호사와 양 선생까지 합세하여 그 장면을 떠올렸다. 

“와. 우리 현 선생님, 뭘 해도 그렇게 멋있냐? 우리 부원장이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할만하긴 해. 안 그래? 여보, 인정하지?”

박 간호사는 자신의 남편 양 선생을 압박하며 승복을 받으려 했다. 그러나 수인은 있는 대로 입을 내어 물고 항변했다.

“내가 무슨 자랑을 했다고 그러세요~”

“내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네 이야기의 90%는 현시후 선배 이야기뿐이잖아.”

수인의 항변에 이번엔 희윤이 가세를 하였다. 

“부럽다. 현시후.”

“네. 부럽네요. 현 선생님.”

재건과 진창욱은 수인의 사랑을 듬뿍 받는 시후가 부럽다며 입을 모았다. 흐뭇하게 보고 있던 김정수도 한마디 보탰다. 

“자랑해. 자랑해도 될 만큼 멋진 남자인 건 내가 보증한다. 그러니 수인아. 기죽지 말고 앞으로도 현 서방 자랑 많이 해.”

“역시 내 마음 알아주시는 분은 아버지밖에 없어요.”

김정수 원장이 수인의 편을 들어주니 얼굴에 활짝 미소가 번졌다. 

“수술도 4건이나 하고, 막무가내로 덤비는 남자도 제압하고. 현 서방. 너무 고생했다.”

“감사합니다. 아버님,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시후는 마치 군인처럼 충성을 다할 것 같은 목소리로 외친 뒤 수인에게는 윙크를 날렸다.

“아~ 미치겠다. 못 볼 것을 보았어. 내 눈~”

최나리가 손바닥으로 눈을 감싸고 극성을 떨어댔다. 그런 최나리를 박 간호사가 구박하며 말했다.

“보기만 좋구만. 괜히 야단이네? 어서 최나리 쌤도 괜찮은 남자를 만나.”

“그 동화에 나오는 파랑새 알지? 파랑새는 늘 가까이 있다고. 눈을 크게 뜨고 보면 보이지.”

부창부수답게 박 간호사의 말에 양 선생이 두둔하며 나섰다. 

“맞아요. 나리 쌤. 파랑새는 그렇게 멀리 있지 않더라고요. 눈을 한 90도만 돌려봐요. 아마 오른쪽?”

최나리의 오른쪽에 앉은 남자는 진창욱이었다. 이 자리에 미혼 남녀는 최나리와 진창욱뿐이었으므로 또다시 사람들의 시선이 총동원되었다. 

그 시선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서는 최나리가 더 야단을 떨어댔다. 

“아이. 어쩌라고요~”

“뭘 그렇게 망설여요? 진료할 때 보니까 진창욱 선생도 엄청 최나리 선생만 챙기던데.”

눈치 생기는 신약을 먹어야 한다고 늘 구박받는 재건의 입에서 나온 말이니, 여기 모인 사람 중에 모르는 사람은 없을 듯했다. 

“뭐 그게, 에효.”

갑자기 최나리가 한숨을 내어 쉬었다. 그러자 수인이 진창욱을 한번 보고 최나리를 한번 보았다. 딱 느낌이 왔다. 최나리가 진창욱에 관심이 있고, 진창욱도 최나리에 관심은 있으나 진도를 나가지 못하는 안타까운 느낌. 딱 그 느낌이었다. 

“이거 내가 전문인데요. 최나리 쌤. 꼭 남자가 먼저 다가가야 하는 법은 없더라고요. 그냥 마음가는 대로 여자가 먼저 프러포즈해도 돼요.”

그 느낌이 얼마나 사람 피를 말리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수인이기에 진심이 불쑥 튀어 나왔다.  

“김수인. 애 낳더니 완전 용감해졌네? 여기서 자폭해 보시겠다? 아버님도 계신데?”

희윤이 친구로서 걱정되어 수인의 입을 틀어막았다. 이렇게 흘러가다가는 수인이 시후를 덮친 그 날 밤 이야기도 나올 것만 같았다. 수인도 정신을 바짝 차린 눈치로 시후를 슬쩍 쳐다보고 웃었다. 

“최나리 선생. 파이팅~ 와인 꼭 준비하시고요~”

시후가 손을 동그랗게 모아 입에 고깔을 만들어 말하곤 웃어댔다. 얼굴이 빨개진 최나리와 진창욱은 머쓱해하며 서로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화기애애하구만. 그럼 오늘은 이만 마무리하자고.”

“네~ 원장님.”

그렇게 김정수 원장의 마무리 말에 의료봉사 첫날이 지나갔다. 

마을회관에서 잠을 청했던 의료봉사단은 일찍 일어나 다음 마을로 향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제 사건 사고를 일으켰던 남자가 마을회관 앞을 서성거렸다. 

이 남자를 제일 먼저 발견한 건 수인이었다. 경계의 눈을 할 수밖에 없지만 이른 아침부터 찾아온 남자를 보니 이상하게 마음이 안 좋았다. 수인은 조심스럽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선영이 아버님 되시죠?”

남자는 주저하는 모습으로 조금 다가왔다. 그리곤 수인에게 인사를 꾸벅하였다. 

“어제는 죄송했습니다.”

“선영이는 잘 만나셨어요?”

남자는 아이 엄마와 헤어진 뒤,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할지를 몰랐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렇게 방임해 둔 것이 잘못인 줄 알지만, 보육시설이 나쁘다는 인식이 있어서 보호 요청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어제 상담받고, 선영이도 거기 있겠다고 해서요.”

“네. 잘하셨어요. 우리는 혼자가 아니잖아요. 힘들 때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면 또 힘낼 수 있고요.”

수인의 말에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악의는 없어 보이는 남자를 대면하니 수인은 또 울컥해졌다. 

“저희가 오후에 선영이네 집을 좀 치워드리기로 했어요.”

“네. 경찰한테 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엄두가 안 나서.”

그도 지저분한 환경이 아이에게 얼마나 나쁜 줄 인지한 듯했다. 그것만으로도 남자와 그의 딸은 이제 조금 더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남자는 그렇게 수인에게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떠나갔다.

그렇게 다른 마을에 있었던 의료봉사는 순탄하게 흘러갔다. 그리고 드디어 봉사단들이 고무장갑과 앞치마와 마스크를 두르고 비장한 모습으로 선영이네 집 앞에 섰다. 

“자. 쓰레기부터 꺼내고, 청소 끝내자고.”

“네~”

모두가 의료인이었지만 자신의 장점을 십분 발휘하여 모두가 열심히 청소를 시작했다. 점심도 거르고 인근 도시를 다녀왔던 시후는 새로 가구와 벽지와 장판까지 준비해 왔다. 

“오빠. 진짜 멋져요.”

“김수인이 자랑할 만한 남편이면 이 정도는 기본이지.”

시후가 아주 멋진 미소를 지어가며 엄지를 들어 올렸다. 수인은 그에 화답하듯 두 손 엄지를 다 치켜들고 몸을 흔들어대며 즐거워했다. 

3시간 만에 청소는 극적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누구 하나 싫은 내색하지 않고 성심을 다해 내 집처럼 치웠다. 그리고 시후가 사 온 벽지와 장판에서 양 선생의 실력이 빛을 발했다. 

“와. 이런 것도 할 줄 아세요?”

수인이 물으니, 보조를 하고 있던 박 간호사가 양 선생의 엉덩이를 툭툭 두드려 가며 칭찬을 했다. 

“그럼. 우리 남편은 못하는 거 빼곤 다 잘해.”

“그 말이 좀 이상한 거 아닌가?”

양 선생은 박 간호사의 말을 되새김질하며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자 박 간호사는 얼른 잡고 있던 벽지를 밀어붙이며 얼렁뚱땅 대꾸를 했다. 

“이상하긴 뭐가 이상해요. 잘한다고 칭찬했더니. 꼭 이렇게 초를 쳐! 벽지 무늬나 잘 맞춰 봐요.”

“무늬가 안 맞나?”

또 그새 정신을 벽지로 몰아가니 양 선생은 순한 양이 되어 일에 최선을 다 쏟아 넣었다. 

그리고 방 밖의 작은 주방에선 의외로 전기 부분에 장점을 보여주고 있는 재건이 있어, 시후가 고개를 갸웃했다. 

“전기 만질 줄 알았어?”

“나 로봇 수술하는 의사야. 기계, 전기에 일가견이 좀 있지.”

재건의 자부심 가득한 말에 희윤이 이번엔 재건을 칭찬하고 나섰다. 

“우리 예아 아빠는 집에 있는 가전제품도 다 고치잖아요. 나는 가전제품 A/S를 불러 본 적이 없어요.”

재건은 희윤의 말에 어깨가 한 1미터쯤 치솟은 것 같았다. 

“곰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김재건. 달리 보인다.”

“내가 은근 매력이 있어. 우리 예아 봐라. 한 세기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하는 인형 외모 아니냐. 내 능력이 이렇다. 내가 그동안 숨겨 왔던 거지.”

이번엔 재건의 어깨가 2미터는 더 치솟았다. 딸 자랑에 그만 시후의 무릎에 힘이 쫙 빠졌다. 

“딸 있어서 너무 부럽다. 나도 딸 있으면 좋겠다. 딸. 아. 부럽다.”

혼자 중얼거리는데, 희윤이 슬쩍 시후에게 속닥거렸다. 

“아참, 내가 어제는 난리 통이라 깜빡했네요.”

희윤의 말에 시후는 긴장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어제 초음파 설치하면서 수인이한테 테스트해봤거든요.”

산부인과 진료를 준비하는 과정을 희윤이 이야기하는 듯했다. 그게 무슨 소리인지 궁금해진 시후가 미간을 구기며 꽤 심각해 했다. 

“김수인이 원래 둔하잖아요. 언제 알아채나 내가 두고 볼까 했는데, 이렇게 착한 일 하는 선배한테 제가 선물 하나 알려드리죠.”

갈수록 아리송한 대화라 시후는 희윤을 빤히 보았다.

“선배님과 수인이의 둘째가 딸이기를 주치의인 제가 간절히 소망합니다. 선배님, 축하합니다.”

“뭐? 둘째?”

그 말과 함께 시후는 방에서 도배를 도와주고 있던 수인에게 달려가 수인을 번쩍 들어 안았다.

“엄마야~ 왜 이래요?”

“아. 김수인 예뻐가지고. 둔한 것도 왜 이리 예쁘지?”

옆에서 벽지를 붙이던 박 간호사와 양 선생이 더 놀랬다. 

“선생님들~ 우리 수인이가 둘째를 가졌다 하네요~ 제가 좀 요란을 떨어도 너그러이 이해해 주십시오!”

“축하해. 축하해요.”

“어머나. 축하해.”

모두가 축하를 연발하는데, 정작 수인 본인은 놀란 얼굴이었다.

“김수인, 너 임신했더라. 내가 언제 알아채나 보려고 했는데, 현시후 선배님이 너무 딸 타령을 하셔서 알려드렸어.”

희윤이 빙그레 웃으며 수인의 둘째 임신을 공고히 하였다. 

시후는 수인을 끌어안고 360도 회전을 몇 번이나 돌고 또 돌았다. 

“와. 김수인. 와. 김수인. 고마워. 사랑해. 고마워. 사랑해.”

수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데, 그 모습마저 예뻐서 시후는 누가 보든 말든 수인을 끌어안고 키스를 미친 듯이 퍼부었다. 

“아우. 좋겠다.”

박 간호사와 희윤이 합창으로 시후와 수인을 보고 말해버렸다. 그러자 옆에 있던 그들의 남편들이 큼, 하고 기침 소리를 내며 돌아섰다. 

“하. 저. 현 선생님은 잘 가다가 꼭 저렇게 공공의 적으로 변한단 말이야.”

“저도 그게 늘 불만입니다. 아. 저 자식.”

그렇게 두 남자는 시후를 질투했지만, 시후는 지금 이 순간 세상을 다 얻은 표정으로 행복해했다. 그런 시후를 보니 수인도 너무너무 행복했다. 이 남자에게 행복을 줄 수 있는 여자라는 게 너무 행복한 순간이기도 했다. 

양 선생의 말처럼, 동화 속의 파랑새는 그리 멀리 있지 않았다. 함께 있어 행복하고, 나눌 수 있는 감정이 있어 행복한 이 순간, 수인의 가슴엔 파랑새가 푸드득 내려앉았다. 

-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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