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날 밤을 책임져 (87)화 (87/88)

특별외전 16화

“저 어르신, 저 아래 반 지하에 아이가 혼자 있는데, 그 아이를 아세요?”

“아는데. 별로. 그건 또 어떻게 봤대.”

대답이 영 꺼림칙했다. 수인은 문을 닫으려는 할아버지에게 오늘 이곳에 온 의료봉사자라 신분을 밝히고 아이를 보게 된 이유를 밝혔다. 

“어르신. 아이가 있는 환경이 너무 열악하던데. 이렇게 두면 안 되잖아요.”

“그걸 나더러 어쩌라고? 그냥 모른 척해. 우리도 어쩔 수 없이 모른 척하는 거야. 신고했다가는 걔 아비한테 해코지당해.”

기가 막혀서 수인은 숨이 막혔다. 

“그래도 신고를 해야지요.”

“거기 걔 고모가 가끔 먹을 거 던져 주고 가는데, 애 아비가 문을 잠가 두고 갔어. 우리도 어떻게 할 수가 있나? 부모가 있는 애를?”

할아버지의 무심한 이야기를 듣는 내내 수인은 가슴 한곳이 무너지듯 아파 왔다. 우리의 민낯을 보는 것 같았다. 

남의 일에 신경조차 쓰기 싫어하며, 해코지당할까 봐 남의 일에 관여하기를 꺼리는 현대 사회의 우리의 민낯. 

그러나 수인은 도하를 키우는 엄마로서 본 것을 못 본 척할 수 없었다. 복잡한 얼굴로 수인이 인상을 구기자 되레 할아버지는 경고 같은 말을 이었다. 

“쟤 아비가 완전 또라이야. 우리도 처음에는 막 뭐라 했어. 애를 왜 저렇게 두냐고. 그 애 아비 건드리면 무서워. 그래서 아무도 말을 못 해. 뭐 어쩔 수 있나. 지 새끼 지가 저리 하겠다는데.”

그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부모가 아이를 낳았어도 아이는 인격이 있는 존엄한 존재이다. 그 아이는 행복할 권리가 있고, 깨끗한 환경에서 보살핌을 받을 권리도 있다. 

수인은 심장이 막 떨려왔다. 어떻게든 이 아이를 구해내고 싶었다. 

“뭐 의료봉사 온 거나 잘하고 가슈.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고. 창문 열었다고 쟤 아비한테 엄청 두드려 맞지나 않을까 모르겠네.”

수인은 다리가 벌벌 떨려왔다. 어떻게 3층 계단을 내려왔는지도 몰랐다. 심장은 벌렁거리고 다리는 후들거렸다. 예쁨만 듬뿍 받아도 모자랄 저 어린아이에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그리고 그 아이에게 또 무슨 나쁜 일이 벌어질까 생각하니 수인은 견딜 수가 없었다. 수인은 열린 창문 사이로 잠이든 아이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경찰에 신고했다. 

수인의 신고로 출동한 경찰이 아이를 구출해 아동보호소로 데려간다 했다. 수인은 쓰레기 더미에서 나온 아이 앞에 허리를 굽혀 눈을 맞추었다. 

그리고 의사로서 간단히 아이의 상태를 살폈다. 건강에 큰 우려가 보이지는 않았지만, 아이는 나이에 비해 매우 작은 것 같았다. 

“아가야. 여기 경찰 아저씨들이 널 깨끗한 곳으로 데려가 주신대.”

아이는 수인의 말을 알아듣는 건지 가만히 수인을 쳐다보았다. 아이는 집 밖으로 나온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런 아이를 보는 수인의 눈에는 눈물이 자꾸 흘러내렸다. 

“보호자에게 연락을 했습니다. 그럼, 선생님. 아이는 저희가 아동 복지센터로 데려가겠습니다.”

“네. 잘 부탁드립니다.”

수인이 고개를 숙여 부탁했다. 수인은 경찰차에 오른 아이를 끝까지 배웅하고 얼른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걸음을 재촉해 링거를 놓아주었던 노인의 집에 들러 바늘을 뽑아주고 다시 잰걸음으로 임시진료소로 돌아왔다. 

시간이 꽤 오래 걸렸던지 진료시간이 끝나있었다. 너무 늦게 돌아온 수인을 보고 시후가 걱정인 얼굴로 다가왔다. 

“무슨 일 있었어?”

“있었어요.”

수인은 조금 전 여자아이의 이야기를 했다. 듣고 있던 사람들이 다 같이 한탄스러운 표정으로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일 봉사할 곳은 다른 동네이기 때문에 짐을 챙기는데, 어디선가 거칠고 무서운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야! 내 딸 맘대로 데려간 인간이 누구야!”

험상궂게 생긴 남자가 손에는 쇠파이프를 들고 진료소로 거의 달리다시피 다가왔다. 모두가 놀라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쇠파이프를 손에 쥔 남자는 다짜고짜 임시진료소를 때려부셨다. 덩치도 커서 위협적이었고, 휘두른 쇠파이프에 진료소 물건들이 큰 소리를 내며 박살이 났다. 모두가 갑작스러운 공격에 당황해서 소리를 지르고 피하기 바빴다. 

시후는 수액 봉지를 움켜잡았다. 그리고 남자를 향해 힘껏 던졌다. 남자가 뒤통수에 수액 봉지를 맞고 뒤돌아섰다. 그리고 제게 던진 사람이 시후임을 확인하고 시후에게 덤벼들었다. 

시후는 쇠파이프를 자신에게 내려치는 남자를 재빨리 피했다. 시후가 피하자 남자는 쇠파이프를 옆으로 휘둘렀다. 

이번엔 시후가 남자의 옆구리를 발로 차 넘어트렸다. 넘어지면서 쇠파이프를 놓친 남자는 이젠 맨몸으로 시후와 뒹굴었다. 

보고 있던 재건과 진창욱도 달려들었다. 남자는 잡히지 않으려 발버둥을 치고, 시후가 남자의 몸에 올라타 결국 제압을 했다. 

“오빠! 괜찮아요?”

“어머 어머. 현 선생님~”

“현 서방!”

남자는 제압을 당한 채 바닥에 몸을 붙이고 있었다. 누군가 재빨리 경찰을 불렀다고 소리쳤다. 그리고 모두가 힘을 합해 남자를 붙잡았다. 

“경찰 오고 있대요.”

“이거 놓지 못해? 이 새끼들아. 내 딸을 어디로 빼돌린 거야? 어?”

남자는 땅에 엎드린 채 악을 질러댔다. 수인은 남자에게 다가갔다.

“딸은 아동복지센터에 있어요. 경찰 오면 딸에게 데려다 달라고 할게요. 그러니 제발 진정해요.”

“내 딸을 맘대로 데려가냐고! 왜?”

남자는 거의 짐승 같은 소리를 내며 울분을 토해냈다. 남자는 이성적인 대화가 불가능했다. 흥분한 눈에는 초점이 없었고, 힘을 쓸 수 없게 되자 이상 반응을 나타내었다. 극도로 흥분해서 그런지 입에서 거품을 뿜어내며 벌벌 떨어댔다. 

“수인아! 거즈!”

눈을 뒤집으며 남자는 사지가 제멋대로 비틀렸다. 수인은 시후의 외침에 재빠른 동작으로 붕대 뭉치를 집어 들고 남자의 입에 재갈을 물리듯 밀어 넣었다. 

남자는 뇌전증 환자의 증세를 고스란히 보였다. 마침 의사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기에 곧장 처치에 들어갔다. 

남자는 응급조치를 받은 후 간이침대에 눕혀졌다. 결국 경찰과 119까지 동원되어 남자를 데려갔다. 

엉망진창이 된 임시진료소는 전쟁터 같았다. 남자가 휘두른 쇠파이프에 부서진 물건들 하며, 남자와 몸싸움을 한 흔적으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수인은 그보다 얼굴과 손을 다친 시후가 걱정이 되어 눈물이 나왔다.

“오빠.”

“괜찮아. 조금 긁힌 거야.”

수인은 응급 키트를 들고 시후와 마주 앉았다. 그 상황에서 시후가 아니었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다쳤을 게 분명했지만, 수인은 너무 속상했다. 

“왜 만날 맨몸으로 싸워요? 예전에 칼 가지고 있는 환자 보호자 하고도 그러고. 그러다 자기 다치면 나 어떡하라고?”

“별로 안 다쳤잖아. 그리고 생각할 겨를이 없었어.”

긴급 상황을 함께 겪었으니 이해를 못 하는 건 아니지만, 수인의 입장은 마냥 속상했다. 어쩌면 자신이 시작한 일이었기에 더욱 미안해서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에고. 씩씩이 김수인. 왜 이렇게 울어대니? 선배가 되레 미안하게 말이야.”

상처 소독을 도와주러 왔던 희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시후는 수인의 눈물을 엄지손가락으로 닦아냈다. 

“우는 것도 이렇게 예쁠 수가 있지?”

“아우. 내가 미치겠다. 아 몰라. 소독은 둘이 알아서 하시고요. 다들 기다리니까 얼른 나와요.”

달달하다 못해 애틋한 수인과 시후를 보고 희윤이 고개를 저어댔다. 그런 줄도 모르고 재건이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아직 멀었어?”

“우린 나가요. 아휴, 불꽃이 튄다 튀어. 보기만 해도 뜨거워서 데이겠어.”

희윤이 천막 악에 막 들어선 재건의 팔을 꽉 잡았다. 그러자 재건은 화들짝 놀라 되물었다. 

“이번엔 불도 났어? 어디 어디. 소화기. 소화기 찾아야지.”

“아우. 진짜. 우린 나가자. 여보. 예아 아빠. 우린 천막 밖으로 나가자고요.”

희윤이 소화기를 찾아 바쁜 눈을 돌리는 재건의 목덜미를 끌어안고 천막 밖으로 나갔다. 수인은 눈물을 흘려대며 시후의 상처에 소독을 하고 약을 발랐다. 

“어디 봐. 찢어진 데는 없어요?”

“없어.”

소독약으로 따가울 텐데도 시후는 수인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천사였어.”

시후의 말에 약을 바르던 수인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마음도 너무 예쁘고, 얼굴도 예쁘고, 안 예쁜 데가 없지. 우리 김수인.”

“이렇게 해봐요. 

수인은 시후의 얼굴이 바짝 다가오자 입을 삐죽거렸다. 

“꼬마 아이 구해낸 것 너무 잘했어. 우리 수인이 너무 멋지다.”

“아직도 가슴이 너무 아파요.”

시후는 수인을 꼭 끌어안았다. 

“자기가 내 여자라는 게 너무 자랑스럽다.”

“나도 오빠가 내 남자라는 게 너무 자랑스러워요.”

수인을 꼭 안았던 시후가 팔을 풀어내고 눈을 지그시 뜨고 수인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또 무슨 기겁할 소리를 할지 수인은 이제 감이 와서 인상을 살짝 구겼다. 

“그럼 뽀뽀 한번만 해줘.”

“내 이럴 줄 알았어. 꼭 잘 가다가 이런다니까. 얼른 나와요. 이렇게 다 찢어진 천막 안에서 이건 아니지.”

안 그래도 아까부터 다른 봉사자들이 자꾸 기웃거렸다. 수인은 엉큼 대마왕으로 변하기 직전인 시후를 이끌고 천막을 나왔다. 

봉사자들이 모두 모여 저녁 식사를 하는 자리로 이동했다. 온 힘을 쏟아 봉사를 해서 그런지 돼지갈비가 꿀맛같이 넘어갔다. 

“다들 고생 많았어. 특히 현시후 선생. 오늘 정말 멋졌다.”

김정수 원장의 선창에 모두가 박수를 쳤다. 봉사활동을 하면서 여러 일을 겪지만 이런 무력행사에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어서 다들 가슴이 철렁했었다. 

그러나 든든한 시후가 막아냈고, 여럿이 도와 큰 낭패 없이 일은 마무리되었으니 지금 먹는 저녁이 맛있게 넘어갔다. 

“그 애 아빠는 무사히 깨어났다 하고요. 애도 만났데요. 그리고 애는 당분간 보육시설에서 케어하기로 했다고 연락이 왔어요.”

양 선생이 오늘의 사건 결과를 보고했다. 

“다행이네요.”

“그 애기가 어떻게 김 쌤 눈에 딱 띄었을까요? 동네 주민들도 애기의 존재를 몰랐대요.”

“요새는 옆집에 누가 사는지 관심도 안 가지니까. 참 개탄스러운 일이지.”

김정수 원장은 가만히 듣고 있다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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