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외전 15화
“오늘은 미루나무 동네를 돌고, 내일은 살구꽃 동네를 돌기로 했어. 다들 스케줄 잘 숙지했지?”
“네~”
김정수 원장이 도착 직후부터 곧장 봉사가 행해질 것을 설명했다.
“예전엔 인구도 참 많은 도시였어. 그곳에 방직공장도 여럿 있었고, 섬유 수출도 활발했던 곳이었거든. 우리 어릴 때 말이야. 그런데 어느새 유령 도시 같은 분위기가 된 것 같아.”
오늘의 목적지를 두고 박 간호사가 추억을 더듬었다. 그 나이 연령들에게는 지나간 영광이 기억나는 듯했고, 시후와 수인에게는 낯설기만 한 이야기였다.
수인은 이 지역에 대해 아련하게 중 고등학교 때 배웠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교과서에서 배운 것 같네요. 우리나라 70년대 대표 섬유 공업이 발전했던 지역이라고요.”
“기억난다. 각 지역별로 특산품도 달달 외우고, 운송이 어쩌니, 도시 발달이 어쩌니 하는 거 매번 시험에 나왔었잖아.”
수인의 말에 시후도 기억을 보태었다. 수인도 얼른 대꾸를 하며 시후와 대화를 이어갔다.
“일반사회 과목이었나?”
“나. 그 과목 진짜 잘했는데.”
“오빤 뭔들 못했을까. 다 잘했겠지.”
그리고 둘은 서로를 마주 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런 둘의 뜨거운 시선을 뒤에서 보고 있던 박 간호사가 괜히 딴지를 걸어 댔다.
“무슨 이야기를 해도 결국에 우리 부원장은 저렇게 남편 자랑을 한다니까!”
“에? 자랑 아니고요. 사실이 그래서요. 우리 도하 아빠가 못하는 게 없잖아요.”
수인이 수줍은 표정을 지어가며 시후의 기를 한껏 살려주었다. 어깨가 으쓱해진 시후는 멋진 포즈를 해가며 웃어댔다.
뒤에서 그런 시후와 수인의 모습을 흐뭇하게 보고 있던 세 사람은 키득 웃음이 나오면서도 장난을 걸고 싶어졌다.
“아이고. 거참. 홀로된 나는 가슴이 사무치게 외롭구만.”
김정수의 말에 양 선생이 끼어들었다.
“원장님. 저는 와이프가 있는 데도 일평생 저런 칭찬 한번 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뭐어? 아니, 당신은 지금 여기서 나를 왜 디스 해? 그리고 당신이랑 현 선생님이랑 비교는 좀 그렇지.”
박 간호사가 나름 항변을 해댔지만, 양 선생은 되레 기분이 나쁜 얼굴로 기막혀했다. 그리고 평소에 쌓아두었던 감정을 꺼내는 듯 목소리가 좀 높아갔다.
“아. 현 선생님 때문에 나는 요새 애들 말로 만날 오징어 취급입니다. 당신도 그러는 거 아니야. 언제는 내가 제일 멋지다더니, 몇 년 전부터는 그런 말이 완전히 사라졌어. 그게 다 현 선생 때문인 거 다 알아. 나 너무 섭섭해.”
“어머, 이 남자 오늘따라 왜 이래? 부끄럽게?”
박 간호사는 괜히 오버를 해댔고, 양 선생의 갑작스러운 발언에 모두가 웃어댔다. 시후는 또 그 장단에 맞춰서 얼른 사과를 했다.
“양 선생님, 죄송합니다.”
“현 선생님. 조심 좀 합시다. 아무 데서나 매력 좀 흘리지 마세요. 나니까 참는 겁니다. 안 그랬음 신고하고도 남았습니다.”
과하게 시후를 띄워주었기에 시후도 수인도 마냥 좋게 봐주고 예뻐해 주는 어른들이 감사했다. 시후와 수인이 봉사활동에 참여해주는 것이 고마워서 해주는 립서비스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신고라니! 요새 저런 남자가 어디 있어? 오로지 김수인 하나만 저렇게 사랑하는 진정한 사랑꾼이구만.”
“뭐 나는 사랑꾼 아닌가? 당신 기억 안 나? 나 당신한테 3년 동안 러브레터 단 하루도 안 빼고 썼던 나야. 이거 왜 이래?”
티격태격하는 박 간호사와 양 선생 때문에 목적지 도착 직전까지 차 안은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드디어 오늘 베이스캠프가 될 마을 회관에 도착했다. 이미 이곳에 재건과 희윤을 비롯하게 수인과 시후가 전에 몸담았던 수성의료원에서 진창욱과 최나리 간호사도 도착해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진창욱과 최나리는 과격하게 수인과 시후와 조우했다.
“얼마만이에요~”
“어머. 나리 쌤 엄청 예뻐지셨구나~”
“김 과장님이 더 예뻐지셨네요~ 아아. 이제 과장님 아니고, 부원장님이시죠?”
나리는 수인을 끌어안고 반가워서 몸을 떨어댔다. 진창욱도 시후와 인사를 하며 반가워했다. 그리고 김정수 원장은 작년부터 열심히 도와주고 있는 재건과 희윤에게 악수를 청했다.
오늘 스케줄을 모두 모여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의료봉사에 뜻을 함께 해 준 지역 정치인 일행이 도착했다.
“이렇게 우리 군까지 와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우리 시에서도 이곳은 좀 많이 낙후된 곳이라 저희도 신경을 쓰기는 쓰는데 참 어렵습니다.”
정치인은 자기 관할 구역에 의료봉사를 와준 것을 감사하다며 말을 꺼냈다. 모두가 겸허하게 듣고 있는데, 정치인은 갑자기 시후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대화를 금세 바꿔 버렸다.
“방송 잘 보고 있습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실물을 뵈니 정말 대단한 미남이시네요. 저희 집사람이 왕 팬입니다. 선생님.”
정치인은 일단 시후와 사진을 한 장 찍자 했다. 그래서 결국 단체 촬영부터 하고 봉사를 시작하기로 했다. 시후는 그러나 살짝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수인이 그런 시후에게 다가갔다.
“그냥. 오빠가 이해해요.”
“그래. 이해해야지. 그래도 도와주는 게 어디야.”
봉사를 와 준 것에 고마워하는 것 같기는 했으나 사진 찍는 일에만 너무 열을 쏟는 것 같아서 시후는 계속 인상을 구겼다.
그렇지만 그런 단편의 감정은 중요하지 않았다. 오늘부터 1박 2일 동안 이곳에서 의료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의 진료를 알차게 해주는 게 이번 의료봉사의 목표였다.
정치인이 이끌고 온 일행들은 3개 조로 나뉘어 배정이 이루어졌다. 국내 의료봉사로 한방이나 치과, 내과는 비교적 그 기회가 많으나 이렇게 외과 의사가 5명이나 참여하는 의료봉사는 좀 드문 편이기는 했다.
시후와 재건은 외과 시술을 주로 할 계획이었고, 희윤은 산부인과, 김정수 원장은 내과 파트를, 수인은 종합적인 진료를 담당하기로 했다.
홍보를 한 달 전부터 해왔던 터라 임시진료소가 차려진 마을 회관에 벌써부터 환자들이 줄을 섰다.
“자. 오늘도 최선을 다해 봉사합시다!”
김정수 원장의 구호 아래 모두가 열정을 태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모두가 자원봉사자들과 팀을 구성해 진료에 들어갔다.
그렇게 바삐 한두 시간이 흘렀을 때, 수인에게 어떤 노인이 다가와 간절하게 부탁을 하였다.
“선생님. 집에 우리 할마이가 누워있어요. 꼼짝을 못하니 데려올 수가 없었어요. 기력이 너무 없어 그런데 병 주사 하나만 놔주면 안 될까요?”
김정수 원장도 옆에서 듣고 있다가 그러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밀려드는 환자는 많으나 노인의 청이 너무 간절하여 수인이 왕진을 가기로 했다.
“제가 같이 가 드릴까요?”
진창욱이 따라 나서겠다 하였지만, 봉사자 중 의료인의 수가 부족하므로 그럴 수가 없었다.
“괜찮아요. 저 혼자 다녀올게요. 진 쌤 일보세요.”
수인은 노인을 따라 꼬불꼬불한 길을 한참 걸었다. 곳곳에 논과 밭이 뒤섞여 있고, 더러는 연립주택과 개인 주택이 섞여 있는 작은 동네였다.
큰길가에서 꽤 벗어난 곳에 있는 노인의 집에는 노인의 아내가 힘없이 누워있었다. 영양실조에 가까워 보여 수인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준비해간 수액을 놓아주었다.
“할아버지, 이거 다 들어가면요. 제가 다시 바늘 빼러 올게요. 혹시 제가 좀 늦으면 여기 솜 드릴 테니까, 이걸로 꾹 누르고 천천히 바늘 뽑으시고 한참동안 누르고 계세요. 아셨죠?”
“고마워요. 선생님.”
“제가 꼭 다시 올게요.”
수인은 그렇게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섰다. 올 때는 노인을 따라 왔는데, 되돌아가려니 길이 이상한 것 같았다. 분명 파란 대문을 지나왔는데 이번엔 길이 막다른 길이었다.
그래서 골목을 따라 다시 노인의 집으로 돌아가 이번엔 반대 방향으로 길을 찾아 내려갔다. 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평소에도 길치는 아니었고, 어디든 잘 찾아가는 수인이었다. 그런데 한참 길을 헤맨 것 같았다.
올 때 봐두었던 연립주택을 간신히 발견하고 그 앞을 지나가는데, 반지하 창살 안으로 쥐가 뛰어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수인은 너무 놀라서 왕진 가방을 바짝 들어 올리고 숨을 멈췄다.
분명 사람이 사는 집이었다. 그런데 아주 조그맣게 열린 창문 안에서 악취가 느껴지고 분위기가 이상했다.
그래서 들여다보다가 그 안에 웅크리고 있는 작은 여자아이를 딱 보고야 말았다.
수인은 기절할 것 같은 표정으로 다가갔다. 반지하 어두운 공간에 아이는 웅크리고 있는데, 온통 주변은 쓰레기로 넘쳐났고, 열린 창문 사이로 악취가 진동했다. 수인은 더욱 바짝 다가가 창살 앞에 몸을 기울였다.
“얘! 아가!”
수인이 부르자 웅크리고 있던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한 5살, 6살가량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는 형편없는 몰골로 수인을 쳐다보았다.
“아가야. 엄마는?”
아이가 고개를 저었다. 그때부터 수인의 심장은 미친 듯이 더 빨라졌다. 이 모습은 쓰레기장에 사는 아이의 모습과 똑같았다.
안은 어두웠지만 쓰레기나 다름없는 이불과 옷가지, 먹다 버린 음식물의 봉지, 그리고 차마 믿기 어려울 정도의 오물투성이인 곳이었다. 수인은 아이가 겁을 먹을까 봐 아주 조심하며 또 물었다.
“집에 다른 사람은 없어? 아빠나. 할머니나.”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수인은 어찌 된 일인지 이 아이를 이대로 두고 갈 수가 없었다.
“아가야. 집에 아무도 없어?”
아이는 이제 대답도 귀찮은지 쓰레기같이 오염된 이부자리 위에 휙 누웠다. 수인은 일단 집으로 들어가는 출입구를 찾았다.
내려가는 계단부터가 쓰레기와 함께 낙엽과 먼지가 뒤섞여 있고, 출입구를 열고 닫은 흔적이 거의 없었다. 고장 난 자전거를 한쪽으로 치우며 수인이 현관문 앞에 다가가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다시 힘을 다해 두드렸지만 똑같았다.
수인은 다시 계단을 올라 밖으로 난 창을 들여다보며 아이의 존재를 확인했다. 그리고 안 되겠다 싶어서 그 건물의 다른 집들을 두드려댔다.
거의 모든 집을 지났을 때, 제일 꼭대기에서 한 할아버지가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