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날 밤을 책임져 (84)화 (84/88)

특별외전 13화

김정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인이 뒤만 졸졸 쫓아다니는 덩치 큰 시후가 웃기면서도 저 둘이 알콩달콩한 모습이 왜 이리 보기 좋은지 김정수는 자꾸만 웃어댔다. 

“수인이 엄마가 저 모습 봤으면 참 좋아했을 거야. 사위도 멋지다고 업어 줬을 텐데.”

“그랬을 거예요. 저도 현 선생님 볼 때마다 얼마나 좋은지요. 어쩜 저렇게 한결같이 수인이 껌딱지인지 모르겠어요.”

김정수는 먼저 떠난 아내가 생각나서 코를 훌쩍였다. 어느새 김정수의 머리에는 아내 기억에 아프게 떠올랐다. 

아내는 사람들에게 비난받는 김정수를 대신해 죗값을 치르겠다는 유언을 남기고 먼저 세상을 등졌다. 

제 잘못인데 여리고 여린 사람이 죗값을 치르며 김정수 곁을 떠났고 김정수도 수인도 한동안 정처 없이 흔들렸다. 

그대로 주저앉을 수 없던 이유는 먼저 보낸 아내의 소원 때문이었다. 그녀가 지독하게도 존경했던 김정수라는 의사에게 남은 생은 낮은 곳에서 봉사해 달라는 그녀의 마지막 소원, 그 하나를 지금까지 지키느라 김정수는 자선 의원을 이끌고 있었다. 

하루아침에 엄마를 잃은 수인이었지만 심지가 굳건하고 밝은 성격 덕에 잘 견뎌주었다. 그래서인지 수인은 어린 나이부터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이 남다르게 넓고도 깊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수인의 그 남다른 배려심에 시후가 홀딱 반한 건 아닌지 싶었다. 

그래서 먼저 간 아내가 늘 수인이를 지켜 줄 거라 김정수는 믿었다. 그러하니 저리도 사랑해주는 남자를 만나 여자로서 더없이 행복하게 사는 거라 확신했다. 

“아버지. 저희 점심 먹고 갈까요?”

필요한 물건들을 다 사들인 수인이 적당한 식당을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우린 우리 대로 약속이 있어. 그러니 현 서방하고 둘이 먹어라.”

김정수는 주말인데도 애를 써주는 시후와 수인에게 미안해서 약속을 급조해냈다. 그런데 박 간호사와 양 선생도 합창하듯 입을 모아 가담했다. 

“그래. 우리 저. 거 뭣이냐, 오리 백숙 먹으러 가기로 했어.”

“오리 백숙이요? 와. 맛있겠다. 근데 우리 둘은 왜 빼세요?”

수인이 억울한 얼굴로 물었지만, 박 간호사가 말을 가로채고 나섰다. 

“한 마리만 시켰어. 근데 부원장이랑 현 선생까지 같이 먹자 덤비면 우리는 국물에 밥 말아 먹어야 하잖아. 그러니까 둘이 다른 거 먹으러 가.”

“아. 치사해. 두 마리 시키면 되잖아요~”

시후는 이들이 나누는 대화를 들으며 웃었다가 안타까워하다가 표정이 가관도 아니었다. 김정수나 박 간호사, 양 선생이 못 볼 리 없었다. 세 사람은 웃음이 나는 걸 억지로 참고 수인을 밀어냈다. 

“오리 두 마리가 돈이 얼만데~ 안 돼. 일단 아랍 왕자님이 아무리 후원금 많이 주셔도 아껴야 해. 그러니까 둘이 좀 알아서 먹어.”

수인은 기가 막혀서 입도 다물지 못하고 서 있는데 시후가 얼른 수인의 손을 잡았다. 

“그럼, 저는 봉사하는 날 뵙겠습니다.”

“그래. 수고 많았다. 현 서방.”

“수고 많았어요. 현 선생님.”

다들 일사천리로 인사를 하고 마무리에 들어갔다. 그때까지도 억울한 얼굴인 수인을 보고 박 간호사가 9회 말 쐐기 홈런을 날렸다. 

“둘이 간만에 데이트 좀 하던가. 바로 남산이잖아. 돈가스를 먹던 뭘 먹던지 둘이 먹을 거 없겠어? 내 보기엔 안 먹어도 배가 부르겠구만.”

“치사해요. 박 쌤. 그렇게 안 봤는데.”

투덜거리는 수인의 말은 듣지도 않은 채 세 사람은 종종 걸어서 급작스럽게 만들어진 약속을 향해 행진했다. 

“아. 진짜!”

“수인아. 오리 백숙 먹고 싶어?”

시후는 설마 하며 물었다. 둘이 데이트를 하라며 은근히 멍석을 깔아주어 고맙기만 한데 수인의 모습은 정말로 안타까워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수인은 고개까지 세차게 끄덕이며 눈을 반짝거렸다.

“응. 오리 백숙 먹고 싶다.”

천진난만하게 웃어 보이는 수인을 보고 시후는 귀여워서 웃음이 절로 나왔다. 수인의 어깨를 강하게 감싸 안으며 시후가 큰 소리로 말했다. 

“가자. 내가 오리 백숙 하나 못 사주겠냐? 오리 농장이라도 사달라면 사줄 수 있어. 가자. 김수인.”

수인은 정말 행복하게 웃었다. 

“우리 남편 짱 멋지다.”

한참 더워진 여름이 무색하게 둘은 서로를 거의 끌어안고 오리 백숙을 찾아 걸었다.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린 시후가 쓱 하고 수인을 내려다보았다. 

“내 참. 오리 백숙 사준다는 말에 멋있다니? 난 늘 멋으로 무장 한 남자란 말이야.”

“네네. 알죠. 알고말고요. 그래도 이 더운 날 오리 백숙 사준다는 남편, 너무 멋져요.”

뭐든 잘 먹는 수인이었지만 유난히 이 무더운 여름, 그 뜨거운 백숙이, 그것도 오리 백숙이 그렇게 먹고 싶은 게 또 이상하고 신기했다. 

아무튼 시후는 수인이 원한다면 그깟 오리 백숙이 문제일까 싶었다. 베이징덕을 원한다면 지금 당장 비행기 잡아타고 베이징으로 날아갈 수도 있는 시후였다. 

그렇게 오래지 않아 시후가 정말 백숙 집을 찾아냈다. 검은 능이버섯이 들어있는 미끈하게 잘 삶아진 오리 앞에서 수인은 두 손을 모으고 있었다. 

“뜨거우니까 호호 불어가면서 먹어.”

“아. 맛있겠다. 오빠도 얼른 먹어요.”

복스럽다는 표현이 무슨 말인지 시후는 수인을 보면서 확실히 깨달았다. 뭘 먹어도 예쁘기만 하고 많이 먹어도 사랑스러운 이 감정, 이게 대체 뭘까. 

수인이 오리를 발골 하며 뼈만 훑어내는 모습은 정말 눈물이 날 만큼 아름답기까지 했다. 

“오빠. 너무 맛있죠?”

“그래. 맛있네.”

땀을 뻘뻘 흘리고 한 마리 후딱 해치우고 나니 이열치열이 딱 떠올랐다. 수인도 흐르는 땀을 연신 닦아가며 만족한 얼굴이었다. 

“또 먹고 싶은 건 없어?”

“아. 배불러. 우리 둘이 이걸 다 먹었네요?”

찹쌀죽까지 바닥이 보이게 긁어먹어 버린 뒤라 수인은 수줍게 웃어댔다. 그렇게 먹고도 또 수인은 식당에 들어오다 눈여겨보았던 팥빙수 가게를 떠올렸다.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는데, 시후가 먼저 말을 꺼냈다.

“더운데, 우리 팥빙수도 한 그릇 먹자.”

어쩜 이렇게 이심전심, 일심동체일 수가 있을까. 치프와 레지던트 1년차로 함께 생활할 때부터 시후와 수인은 이렇게 죽이 척척 맞았다. 

왜 그땐 그게 특별하다는 생각조차 못 했을까. 직원 식당에서 밥을 먹고 남들은 아메리카노를 찾아 커피 전문점으로 향할 때, 시후와 수인은 자연스럽게 둘만 커피 자판기 앞으로 향했다. 설탕과 프림이 가득한 믹스 커피를 종이컵에 받아들고 둘은 호록호록거리며 맛있게 마시곤 했다. 

그뿐인가, 노래방을 가면 딱 부르는 노래도 같았다. 누가 먼저 그 노래를 시작해도 결국 둘이 합창으로 끝내곤 했다. 

시후가 가자고 했던 팥빙수 전문점에 들어가자 마침, 기가 막히게도 시후와 수인의 전매특허 같은 노래가 흘러나왔다. 정말 어떻게 이런 우연이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와. 대박!”

“그대, 그래 줄 수 있나요~”

시후가 온 얼굴에 감정을 실어 노래 한 소절을 따라 불렀다. ‘남과 여’ 그때는 왜 둘이 이 노랠 항상 같이 부른 이유를 몰랐다. 그저 노래가 좋다는 이유라고 생각했다. 

둘의 목소리도 노래와 너무 잘 어울렸지만, 이 노래의 가사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존재인지 이제는 정확히 말할 수 있었다. 

감동에 젖어 수인이 시후를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우리 이 노래 왜 좋아했었는지 이제 알겠어.”

“그죠? 너무너무 신기한 일이에요.”

수인은 시후의 손을 꼭 잡았다. 시후도 그윽한 눈매로 수인을 바라보았다. 

“내가 그때 선배 얼마나 좋아했는지 아마 모를 거야.”

“아둔해서 미안했다.”

혼자 속을 태우던 그때가 떠올라서 수인은 인상을 찌푸렸다. 시후는 그런 수인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때 내가 눈치가 좀 빨랐더라면 우린 더 빨리 행복했을 텐데. 우리 수인이 혼자 속을 새까맣게 태웠을 걸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린다.”

시후는 콧잔등을 움켜잡고 눈물을 찍어내는 시늉을 해댔다. 

“아휴. 내가 말을 말아야지. 내가 참 미련한 것 같아요.”

“자기가 왜 미련해. 일편단심 어여쁜 민들레 김수인인데.”

턱을 손으로 괴고 사람 홀릴 것 같은 얼굴로 시후가 수인을 보았다. 

“우리 참 신기하긴 하다. 그렇게 오래 알아왔는데, 그리고 벌써 2년을 함께 살았는데.”

“살았는데?”

또 뭐가 그리 듣고 싶은지 시후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수인은 새침하게 표정을 지어 보이다 고개를 저었다. 이 남자에게 아까울 것이 무엇일까. 누가 밑지고 누가 이득인 게 무슨 소용 있을까. 수인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현시후 씨 보면요. 아직도 내 가슴이 떨려요.”

“수인아. 더 떨리게 해줄까?”

시후는 말을 하자마자 수인의 뺨을 두 손으로 감싸서 입술에 뽀뽀를 했다. 

촉.

부부가 되어 살을 맞대고 살고 있는 지금도 시후 때문에 이렇게 가슴이 떨렸다. 수인은 수줍어 얼굴이 핑크빛이 되어버렸다. 

“오빠, 너무 달콤하다.”

“그래? 더 달콤하게 해줄까?”

그 말까지는 하지 말았어야 했다. 팥빙수를 반도 먹기 전에 시후는 수인의 손목을 끌고 나섰다. 차에 타라기에 수인은 집에 가는 줄 알고 차에 올랐다. 그러나 집과는 정말 반대 방향 같은 곳으로 하염없이 달렸다.

“어디 가는 거예요?”

“호텔.”

단박에 대답이 나왔고, 그 대답에 수인은 기절할 듯 놀랐다. 

“왜? 왜? 갑자기 호텔?”

“집에 지금 도하랑 어머니 아버지 계시잖아.”

물론 그랬다. 수인이 자선 의원에서 봉사활동 떠날 준비물들을 구입하기 위해 주말인 오늘도 출근을 하였으니 당연히 집에는 도하를 봐주시기 위해 시후의 부모님이 와 계셨다. 

그래도 그렇지, 이게 무슨 소리인가. 수인은 시후의 팔뚝을 꽉 힘주어 잡았다. 

“왜 이래요? 너무 대낮인 거는 알고 있어요?”

“달콤하게 해달라며. 기대해.”

엄마야. 세상에. 내가 또 이 남자의 야수 본능을 누르고야 말았단 말인가. 수인은 호흡곤란이 올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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