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날 밤을 책임져 (83)화 (83/88)

특별외전 12화

눈빛은 누가 더 야한지 모르겠지만, 시후는 수인을 안아 올렸다. 그리고 방안 욕실로 성큼성큼 걸어가 내려놓았다. 

“마음 같아서는 샤워까지 시켜주고 싶지만, 아침부터 너무 99금일까 봐 참는다.”

“헉!”

돌아서는 시후에게 수인이 기가 막히다는 외마디를 지르자, 시후가 다시 돌아섰다. 

“샤워시켜 줘?”

“됐어요! 나 진짜 쌍코피 터질 것 같다고요.”

수인이 시후를 밀어내며 욕실 문을 닫았다. 

***

오늘도 어김없이 피난민 행렬에 동참했던 현진권은 도하를 끌어안고 아침부터 왈츠를 한바탕 추고 있었다. 

“아버지. 허리 괜찮으세요?”

워낙 잘 먹고 잘 자라는 도하라 돌쟁이치고는 꽤 묵직했다. 그런 도하를 안고 빙글빙글 거실을 도는 현진권을 보고 시후가 걱정이 되어 물었다. 

“도하 태어날 때부터 쭉 내 손으로 안아 키웠어.”

자부심이 대단하게 서려 있는 현진권을 보니 시후는 웃음이 나왔다. 

“아버지 믿고 저희 둘째도 얼른 가져볼게요. 미리 잘 부탁드립니다.”

“헛!”

며느리 수인은 뻔뻔하게 말하고 있는 시후를 보고 너무 놀라버렸다. 그런 수인을 보고 정민선이 쪼르르 달려왔다. 그리고 바짝 얼어있는 수인의 팔을 잡아 돌렸다. 

“수인아. 둘째가졌어?”

“예? 아. 아니요. 어머니.”

얼마나 기대를 했던지 이내 실망하는 눈빛이 어쩌면 시후와 똑같을까. 도하와 왈츠를 추고 있던 현진권마저도 기대하던 눈빛을 슬그머니 거둘 지경이었다. 

대체 이 대역죄인 같은 분위기 어쩔 거야. 수인은 이대로 밀릴 수 없어서 갑자기 웃음소리를 내었다. 

“호호호. 이제 도하 돌인데. 다들 너무 우물가에서 숭늉 찾으신다. 하하하.”

“너희 결혼식 할 때 아이 많이 낳을 거라 했잖아. 나 분명히 들었는데.”

정민선은 꽤 섭섭한 얼굴로 아침상을 마저 차리고 있었다. 수인은 정민선이 새벽부터 준비해온 반찬을 나르며 부끄러움은 혼자의 몫인가 했다. 

“아무튼 수인아. 생기면 고민할 필요 없이 그냥 낳아. 응? 엄마가 다 키워줄게. 응?”

“아. 그럼요. 생기면 다 낳아야죠. 하하하.”

웃음으로 때우지만 수인은 고개를 갸웃했다. 요즘 다들 아이 안 낳겠다 선언을 하고, 아이 낳아도 키워줄 사람이 없어서 고민이라는 기사를 심심찮게 읽었다. 그런데 이 분위기 대체 뭐람. 수인은 더덕구이를 접시에 담아내며 정민선에게 물었다. 

“어머니, 도하 키우시는 거 안 힘드세요?”

“어머? 얘! 이게 뭐가 힘드니? 도하가 너무너무 순해서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긴, 그런 면도 있었다. 시후를 안과 밖으로 닮아도 너무 닮은 도하는 울음소리도 길지 않았다. 

투정이라곤 모르고 이유식도 주는 대로 너무 잘 먹었고, 감기조차 잘 걸리지 않았다. 그렇기도 했지만, 도하는 사랑을 듬뿍 받아서 그런지 하는 짓도 너무 예뻤다. 

“그렇긴 해요. 제가 낳았지만 도하 같은 아들도 없어요.”

“어머? 김수인 완전 고슴도치 엄마 다 됐네~”

정민선이 웃으며 받아쳤다. 수인은 의기양양해서는 그런 정민선에게 윙크를 해대며 말했다. 

“어머니 닮았나 봐요. 고슴도치 엄마요.”

“얘. 난 고슴도치 할머니지. 시후 키울 때는 이 정도는 아니었어.”

어찌 간신히 하나 얻은 자식이긴 해도, 지금 손자 도하에게 쏟는 정성에 비하면 시후는 발로 키운 것 같았다. 

“근데 어머니는 왜 오빠 하나만 낳으셨어요?”

“그게 내가 제일 원통한 일이야. 애가 생겨야 말이지. 금슬이 그렇게 좋은 것도 아닌데, 삼신 할매가 눈이 삐었는지 점지를 안 해주더라고.”

귀엽게 말하고 정민선이 활짝 웃었다. 수인도 그저 따라 웃었다.

“그 삼신 할매가 큰 실수 하셨네요. 지금도 안 늦었는데. 어머니~”

“어머? 얘! 해괴망측한 소리를 다 한다. 너~ 도하보다 어린 시동생 감당할 수 있겠어? 행여 그런 소름 끼치는 소리 하지 말어~”

주방에서 고부가 정답다 못해 개그 콤비처럼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으니 궁금했던지 출근 준비를 끝낸 시후가 다가왔다. 

“아침부터 뭐가 그렇게 재미있어?”

“아~ 어머니께서 늦둥이 보실 수도 있다, 그 말 하고 있었어요.”

수인의 말에 정민선은 한 1미터는 뛰어오르며 야단스러웠다. 

“어머. 얘가 시어머니 놀리는 재미가 들렸네? 너 맴매 한다~”

시후는 또 그 이야기를 진지하게 상상하는지 눈만 깜빡거렸다. 그러자 밥공기를 나르던 정민선이 시후를 째려보았다. 

“너도 맴매! 얼른 밥이나 먹어.”

밥 소리에 현진권이 도하를 안고 식탁으로 오자 정민선은 또 언제 그런 이야기를 했냐는 듯 얼른 도하에게 달려가 아침 먹일 준비를 했다. 수인과 시후는 둘이 마주 앉아서 은밀하게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쓸데없는 이야기 하지 말고, 김수인, 우리나 노력 좀 하자.”

“이 이상 얼마나 더 노력을 해요? 진짜!”

수인이 국을 크게 한 수저 떠먹으며 고개를 저어댔다. 그러나 현시후가 그렇게 어물어물 넘어갈 남자가 아니었다. 시후는 허리를 숙여 가며 아주 간절한 눈빛이었다. 

“나도 딸.”

“그게 맘대로 돼요?

결혼 전에는 금쪽같은 내 새끼 낳아 달라고 그렇게 보채던 남자가 이제는 성별을 지정해 요구를 해댔다. 

재건과 희윤의 딸을 보니 샘이 났는지 눈만 마주쳤다 하면 딸 타령을 하고 있었다. 

“수인아. 딸. 응?”

“하. 진짜. 밥이나 먹어요. 저 체력은 나이도 안 먹나 봐.”

시후는 더욱더 야시시한 눈빛을 장착하고 속닥거렸다.

“이번 주말에 데이트하자.”

“시간 없어요. 봉사 준비해야지. 놀 새가 어디 있어요?”

이만하면 물러설 만도 한데, 시후는 밥만 야무지게 먹으며 혼자 또 무슨 꿍꿍이를 계획 중인 것 같았다. 

그렇게 수인과 시후는 출근길에 올랐다. 

“오늘 하루도 잘 보내~”

“우리 12년을 줄기차게 붙어 일했는데, 요샌 그게 좀 아쉽네요.”

수인의 차까지 배웅을 나온 시후에게 수인이 아쉬운 마음 가득 품고 입을 삐죽거렸다. 시후가 군의관을 갔던 그 시절조차도 매주 면회를 가서 극성을 떨어대던 후배였으니, 아예 이렇게 따로 떨어져 지내보기도 낯설기는 했다. 

“그러게. 같이 수술방 누비던 그때가 그립기는 하네.”

그렇지만 수인은 김정수 원장의 뒤를 이어 자선 의원 원장을 할 계획이었고, 시후는 고심 끝에 대학에서 후학을 가르치는 자리로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립다. 그땐 참 좋았는데.”

시후는 마음을 다해 수인을 꼭 끌어안아 주었다. 

“직장동료보다는 부부가 더 가까운 건 알지? 아주 농밀한 스킨십도 할 수 있는 부부가 최고로 좋은 거야. 김수인.”

어느새 능글맞게 등을 쓰다듬어 허리까지 내려가는 시후의 손을 수인이 낚아채었다. 

“현시후 선생님. 이제 정신 바짝 차리시고 애들이나 잘 가르치시죠.”

“아. 그럼요. 나는 뭐 공과 사를 구별하기 위해 태어난 남자니까요.”

수인은 출근도 하기 전에 기가 다 빠질 것 같았다. 그렇지만 이렇게 사랑스러운 남편의 배웅을 받으며 출근하는 재미도 솔솔하게 좋았다. 

“운전 조심하고.”

“응. 자기도 잘 다녀와요~”

키스가 빠지면 섭섭한 듯 시후는 수인이 발라 놓은 립스틱을 다 핥아 먹어가며 진하고 진한 키스를 해댔다. 수인은 차에 올라 선바이져를 내려보다 너무 화들짝 놀랐다. 

“삐에로 분장이 되었네!”

핑크빛 립스틱이 시후로 인해 입가에 온통 번져서 아주 난처해졌다. 그러면서도 수인은 웃음이 실실 나왔다. 12년을 시후만 보고 달려왔다. 

이제 결혼한 지 2년 차였지만 12년의 짝사랑을 모두 보상받고도 남았다. 시후 덕분에 사랑스러운 아들 도하도 품에 안았고, 시부모님의 지극한 사랑도 감사하게 받았다. 

세상 어떤 사람도 지금 자신보다 행복할 수 없다고 수인은 굳게 믿었다. 

시후와 수인이 졸업한 대학에 임상 강사가 된 시후는 의과대학 연구동 앞에 차를 세우고 가방을 챙겨 들었다. 

“현시후~”

어디선가 말귀 못 알아듣는 호박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시후는 고개를 돌렸다. 시후보다 먼저 강사 일을 하고 있던 재건이 큰 키가 무색하게 촐랑거리며 뛰어 왔다. 

“굿모닝.”

손을 팔랑거리며 다가온 재건의 바지에 뭔가 희끄무레한 것이 묘한 위치에 붙어있었다. 

“바지에 그거 뭐야?”

“바지?”

재건이 시후의 지적을 받아 바지를 내려다보았다. 그냥 쓱 보아도 아기들 먹는 뻥튀기가 침에 눌러 붙은 모습이었다. 재건은 서슴없이 눌러 붙은 뻥튀기를 떼어 입에 쏙 넣었다. 

“뭐냐?”

“우리 예아 까까가 묻었네.”

시후가 살짝 인상을 구기자 재건은 자랑스럽게 말했다. 

“우리 예아 너무 예쁘지 않냐? 완전 인형 같지?”

“그래. 김재건 성공인정.”

재건은 목젖이 다 드러나도록 어찌나 신나서 웃어대는지 시후는 슬그머니 짜증이 일었다. 옆에서 촐랑거리는 재건을 쓱 쳐다보았다. 

“미스터리야.”

“그치?”

어째 한 번에 알아듣는 건가. 시후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다시금 재건을 돌아보았다. 재건은 얼마 전 자신과 시후가 공저한 교과서를 흔들어 보이며 잇몸까지 만개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면 그렇지. 시후는 웃음이 나는 걸 억지로 참았다. 

“내가 교과서를 쓸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냐? 나 본과 때 유급 면하는 거 그게 유일한 소원이었잖아. 알지?”

“알다 뿐이냐. 내가 너 공부 가르치느라 내 공부할 시간이 부족했다. 인마.”

그러고 보니 대학을 입학하며 맺은 인연이었으니 참 길기도 했다. 의대 졸업 후 전공도 같은 길을 걸었다.

시후는 아날로그적으로 개복술에 능숙한 의사라면, 재건은 로봇 수술로 제 진가를 발휘 중이었다. 그리고 후학을 가르치는 임상 강사로 또 함께 하고 있었다. 

“고맙게 생각한다. 현시후. 교과서 공저도.”

“들어가자. 오늘도 보람차게 애들 가르쳐 보자.”

두 남자는 서로를 쓱 보며 함께 웃었다. 

***

주말에 데이트하자고 운을 띄웠던 시후가 작정을 했는지, 자선 의원이 봉사에 필요한 물품 구입하는 날에 합세를 하여 힘을 쏟고 있었다. 그런 시후를 김정수 원장은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렇게 좋으세요? 원장님?”

박 간호사가 옆에서 같이 낄낄 웃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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