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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을 책임져 (82)화 (82/88)

특별 외전 11화 

아이를 키우다 보면 한해가 참 빨리 지나는 듯했다. 작년 여름에 태어났던 도하의 돌잔치가 성큼 다가와 있었다. 

시후와 수인이의 결혼식 준비도 정민선의 몫이었듯이 이번 첫 손자 현도하의 첫 번째 생일인 돌잔치도 정민선의 몫이었다. 

정민선은 싫다는 소리 한번 없이 정말 열정을 모두 쏟아부었다. 열혈 할머니 정민선은 돌잔치 정보를 수집하느라 입술에 물집이 다 생겨났다. 

“남들이 보면 당신이 애 엄마인 줄 알겠어.”

무슨 고시 공부하듯 브로셔를 들여다보고, 정리한 노트에 줄을 빡빡 그어대는 정민선을 보고 현진권은 혀를 내둘렀다. 현진권이 하는 말에도 정민선은 연신 줄을 긋고 휴대전화 화면을 스크롤 해댔다.

“호호호. 업체에서도 엄마냐고 묻긴 하더라고요.”

얼마나 깐깐하고 빈틈없이 준비하는지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아서 현진권은 눈을 감고 고개를 짤짤 흔들었다. 다시금 읽던 책으로 시선을 돌리는 현진권에게 정민선이 물었다. 

“시후하고 수인이 다음 주에 봉사활동 간다고 그랬죠?”

“그게 벌써 다음 주야?”

질문에 질문으로 되묻는 현진권을 정민선이 째려보았다. 손에 들고 있던 펜을 놓고 끼고 있던 안경까지 빼내서는 야무지게 따질 기세였다. 

“그 똑똑하던 현진권 박사가 요샌 바보가 된 것 같어. 시후가 당신 붙잡고 한참 이야기하던데 그새 그걸 까먹었어요?”

“안 까먹었어. 각자 스케줄은 각자가 알아서 하는 거지. 뭐.”

살짝 기억이 나는 것 같아서 현진권은 얼른 시선을 피했다. 

“아. 됐고요. 애들 1박 2일 봉사활동 가는 동안 도하 데리고 자야 하니까 당신은 저 끝 방 치워놓을 테니 거기서 자요.”

바보라는 말에다가 급기야 자신의 안락한 잠자리까지 빼앗기게 생긴 현진권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창고 방을 내가 왜 써?”

보려던 책까지 탁 소리 나게 덮고 현진권은 억울한 얼굴이었다. 좁지는 않지만 셋이서 자기에는 살짝 답답하지 않을까 싶어서 정민선이 정해버린 일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소리까지 버럭 지를 줄이야. 현진권은 아직 이빨이 다 빠진 호랑이는 아니었다. 정민선은 슬쩍 눈치를 보며 들릴락 말락 중얼거렸다. 

“셋이서 자기는 좀 좁은 감이 없지 않잖아요. 당신 몸부림치다가 도하 다치게 할 수도 있고.”

“내가 그 정도로 모지리야?”

요새 들어 모지리 취급을 마구잡이로 해대기는 하지만 그렇게 따지고 나오니 정민선은 할 말이 없어졌다. 

“나도 도하 데리고 같이 잘 수 있어.”

“그야 뭐. 그럼 침대 밑에 요 깔아 줄 테니 바닥에서 자던가.”

현진권은 또 소리를 버럭 질러보려다 그래도 창고 방보다야 침실 바닥이 나을 터, 그마저도 또 변동 상황이 생길까 봐 입을 꾹 닫아걸었다. 얌전히 받아들이는 현진권을 보아하니 그 정도는 이해해 줄 것 같아서 정민선은 슬쩍 한술 더 떠보았다.

“아님 서재 가서 자면 되잖아요.”

“서재 싫어. 책 먼지가 어마어마해서 안 돼.”

“벼얼~”

별 까칠함을 다 떤다고 말하려다가 울려대는 전화 때문에 정민선은 얼른 시선을 돌렸다. 

“여보세요? 아. 네. 맞아요. 돌잔치요. 좀 색다르게 하려고요. 네.”

정민선이 정신없이 통화에 빠져들자 현진권은 슬그머니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요새 이 부부는 40년 가까이 살아왔어도 지금처럼 별의별 대화를 다 하며 살아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이런 시시콜콜한 대화를 이어가는 재미가 또 사는 재미 같아서 현진권은 정민선 모르게 피식 웃었다. 

***

시후는 휴대전화를 한참이나 들여다보고 있었다. 샤워를 끝낸 수인이 침대로 오는데도 시후의 시선은 여전히 휴대전화에 머물렀다. 오늘도 뜨거운 밤이 될까 수인은 살짝 조심하며 침대로 기어올랐다.

“뭘 그렇게 심각하게 봐요? 환자?”

“하. 이상하네.”

이제는 고개까지 갸웃하면서 점점 휴대전화에 몰입해 가는 모습이었다. 수인도 궁금해서 상체를 시후에게 딱 붙여가며 휴대전화를 들여다보았다. 

시후가 아까부터 비 맞은 사람처럼 혼자 중얼거리게 만든 건 다름 아닌 사진이었다. 

“예아 사진이구나?”

“이게 가능한 일이야?”

시후는 눈썹까지 일그러트렸다. 수인은 왜 시후가 그런 반응인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 눈을 깜빡거렸다. 

현시후라는 남자가 언제부터 예아에 이렇게 관심이 많았던가. 그리고 정말 인상까지 써가며 무척이나 진지한 이 남자 현시후의 반응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수인은 그런 시후를 빤히 쳐다보았다. 

“무슨 말이에요?”

“아니, 이봐. 말귀 못 알아먹는 이런 호박에 빼빼 마른 오이 같은 애들 둘 사이에 어떻게 이렇게 예쁜 애가 태어나냔 말이야.”

‘이렇게’를 어찌나 강조하는지, 시후의 심정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기분이었다. 수인은 마냥 억울하고 원통한 시후를 보며 배꼽을 잡고 쓰러졌다. 

시후의 표현대로라면 재건은 호박이고, 희윤이는 오이라는 뜻인데 수인은 부정을 못 하고 웃어댔다. 그만큼 친한 사이라 대놓고 당사자들 앞에서 이야기해도 함께 웃어줄 사람들이었다. 

왜 그런지 시후가 붙여준 그대로 머릿속에서 호박과 오이 코스튬을 입은 그들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그리고 그사이에 너무 예쁜 인형 같은 아기를 안고 행복해하는데, 바로 앞에 팔짱을 떡하니 끼고 불만 가득한 표정인 시후도 보이는 듯했다. 

수인의 웃음소리가 청량하게 울려 퍼지자 시후의 표정은 더욱 진지하게 바뀌었다.

“안 그래?”

“희윤이가 어때서요. 재건 선배도 나름 괜찮지.”

수인이 눈물까지 닦아내며 웃는데, 시후는 너무 심각해졌다. 

“아. 웃겨. 오빠. 왜 그래요~”

“내 말이 틀려? 예아 너무 예쁜데, 난 정말 이해할 수가 없다.”

진심으로 이해가 안 되는지 시후는 인상까지 써가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손바닥까지 탁탁 쳐가며 말을 이었다.

“아무리 우월 유전자만 뽑아 만들어졌다 해도 이건 대사기극이야.”

“에이. 뭐 그렇게 비약할 것까지야.”

수인은 친구 희윤이 매일 같이 업로드하는 예쁜 딸 예아의 사진을 흐뭇하게 쳐다보았다. 도하가 어느새 돌을 맞이해서 그런지, 도하보다 5개월 늦게 태어난 예아가 보기만 해도 아기 같았다. 

“그래. 백번 양보해서 재건이, 희윤이 대한민국 평균 외모라고 치자. 그런데 말이야. 수인아.”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또 이렇게 무게를 잡는 걸까. 수인은 웃다가 더는 웃을 수 없을 것 같아서 심각하게 시후를 쳐다보았다. 

“아. 진짜. 호박하고 오이도 이렇게 예쁜 딸을 낳았는데, 절세미인 우리 김수인 닮은 딸은 얼마나 예쁠까? 음?”

“왜 또. 이야기가 그렇게 흘러간대?”

이미 시후의 눈동자에 일렁이는 욕구가 한눈에 보였다. 멋모르고 깔깔거리고 장단에 맞춰 웃었던 1분 전을 후회하며 수인은 슬그머니 침대에서 일어나려 했다. 

“어디가?”

“도하 잘 자나 보려고요.”

수인의 말 같지 않은 핑계에 시후는 도하 방에 연결된 카메라 화면을 들어 보였다. 효자 도하는 이불 한 자락도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으로 잠들어있었다. 

“아주 잘 자고 있네. 우리 도하.”

“그래도 가봐야지. 아. 오빠. 물 가져올까요?”

뭐가 되었든 끓어오르는 시후를 식힐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주도면밀한 남자 시후는 얼른 생수 두 병을 들어 보였다. 수인은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더는 달아날 핑계가 없어진 수인은 심장이 떨려왔다. 마치 피리 부는 사나이의 마법 피리 소리를 들은 아이처럼 수인은 시후를 빤히 보았다. 

“수인아.”

끈끈해진 시후의 목소리에 수인은 영락없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 같이 뻐끔거렸다. 시후의 입술이 뻐끔거리는 수인의 입술 위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시후가 수인의 얼굴을 쓰다듬었고, 수인의 고개가 한껏 뒤로 젖혀졌다. 시후는 수인을 지그시 내려다보며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수인아. 네 몸에서 나는 향기가 너무 좋아.”

“아. 부끄럽다.”

말은 부끄럽다 하지만 수인도 시후의 몸에서 나는 체취가 좋았다. 매번 느끼는 일이지만, 참 희한했다. 보통 남자들에게서 나는 그 난해하고 인상 구겨지는 냄새가 시후에게는 없었다. 

그는 성격만큼이나 깔끔한 남자였기에 그럴 수도 있지만, 아직 수인의 눈과 코가 단단히 봉인되어 있는 게 분명했다. 

부드럽게 시작된 시후의 키스가 수인의 온 얼굴 피부를 휩쓸고 목덜미로 자연스럽게 흘러 내려갔다. 

이미 수인의 몸은 쾌감 버튼이 눌러 진 것처럼 격렬한 반응이 오고 있었다. 시후는 부드럽게 수인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단 1초도 허투루 쓸 수 없는 듯 단숨에 수인에게 빨려 들어갔다. 

“사랑해. 수인아.”

시후는 수인의 긴 팔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다 제 등 뒤로 보냈다. 이제 급행으로 치달음을 예고하듯 그를 잡으라는 사인이었다. 

수인은 손바닥을 펴 그의 등 근육을 꼭 붙여 안았다. 그리고 고개를 젖히고 시후의 입술을 더욱 깊게 받아들였다. 

보드라운 시후의 입술이 수인의 입안을 파고들었다. 시후의 농밀한 키스로 수인의 아랫배는 찌릿하게 떨려왔다. 

시후를 제 안으로 받아들이고 싶어 수인의 몸이 알아서 움직이는 듯했다. 그런 수인 안으로 힘차게 들어선 시후는 수인을 껴안고 격정적인 사랑을 고백했다. 

“사랑해. 사랑한다. 수인아.”

아들 도하에게서 돌려받은 푸딩과 젤리 위에 행복한 표정으로 쓰러진 시후가 미소를 지었다. 

그 밤, 만약 내일 출근이라는 일이 없었더라면 필 받은 시후가 밤을 새웠을 것 같았다. 벌써 두 번째 절정을 맞이한 시후는 지칠 줄도 모르고 수인을 껴안았다. 

“오빠~ 이제 자야 해.”

“졸려?”

시후는 푸딩과 젤리를 연신 예뻐하며 물었다. 

“나 내일 진료 보다가 코피 쏟을 거야. 분명히.”

“그럼 안 되지. 얼른 자자. 으유, 예뻐가지고.”

자자면서도 푸딩과 젤리 사이에 파묻혀 시후는 너무 행복해 보였다. 

다음날, 알람이 요란하게 울리는데도 수인은 기진맥진했다. 강철 체력 시후는 새벽에 도하 기저귀도 한번 갈아주고 아침 일찍 일어나서 러닝머신을 뛰고 있었다. 

“수인아. 일어나야지?”

“어. 일어나야지. 오빤 언제 일어났어요?”

시후는 수인에게 따뜻한 물을 내밀었다. 입가에 대어주는 물 잔을 받아들며 수인은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떴다. 

“난 늘 6시면 기상하지. 어서 일어나. 샤워도 해야 하고 김수인 바쁘겠다.”

그러면서 얇은 이불 사이로 나체인 수인을 내려다보던 시후가 씩 웃었다. 

“김수인. 야해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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