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날 밤을 책임져 (81)화 (81/88)

특별 외전 10화

수인은 목욕까지 뽀송하게 마치고 잠들어 있는 도하를 어루만졌다. 아기 냄새는 언제 맡아도 너무 달달하고 예뻤다. 하루의 피로가 싹 가시는 느낌으로 수인은 도하를 만지고 뽀뽀를 해댔다. 

마지막으로 도하의 손수건까지 곱게 개어 가져다 놓는 정민선에게 수인이 인사를 했다. 

“어머니, 너무 고생하셨어요. 목욕은 제가 시키려고 했는데, 안 힘드셨어요?”

“고생이라니, 어쩜 이렇게 시후 애기 때랑 똑같니. 나는 지금 타임머신을 탄 것 같아.”

잠이든 도하를 사이에 놓고 수인과 정민선은 소곤거렸다. 

“오빠 애기 때 사진이랑 똑같긴 해요.”

“완전 똑같다니까. 너무너무 신기하다. 현 씨네 유전자가 엄청 세긴 한가 봐.”

“그런가 봐요. 어머니랑 제 유전자가 섞인 게 맞긴 하겠죠?”

수인의 말에 정민선은 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할아버지 붕어빵 현진권 씨, 아들 붕어빵 현시후, 손자 붕어빵 현도하까지 너무 똑같아.”

“그중에 아들 붕어빵이 제일 잘생기고 제일 멋지긴 하네요.”

정민선은 고개를 끄덕이다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어머. 넌 시후가 그렇게 좋으니? 네가 낳은 네 아들보다?”

“도하도 너무 예쁘죠. 도하는 아들로 예쁜 거고요. 근데 저는 오빠가 살짝 조금 더 좋아요.”

시어머니로서 자신의 아들을 무한 사랑해 주는 며느리 김수인이 어찌 예쁘게 보지 않을 수 있을까. 정민선은 흐뭇하게 웃었다. 

“암튼 너도 참 한결같다. 너 좋아하는 오빠랑 오늘 하루 마무리 잘하고.”

정민선은 꿈꾸는 소녀 얼굴을 해서는 도하 뺨을 어루만졌다. 그리곤 수인의 어깨도 다독거렸다. 

“피곤하겠다 수인아. 어서 쉬어. 나는 내일 또 올게.”

“매일 이렇게 출퇴근하시느라 힘들어 어떡해요? 그냥 저희 어머님 집에 들어가서 살까요?”

며느리 입에서 쉽게 나올 수 없는 말이었지만 수인은 너무 미안해서 그러고 싶었다. 매일 어마어마하게 먹을거리를 싸 들고 오는 것도 미안했고, 도하를 지극 정성으로 키워주는 것도 미안했다. 그러나 정민선은 화들짝 놀라서는 손을 내저었다. 

“어머, 얘. 그건 싫다. 나는 지금이 딱 좋아. 너도 네 신랑하고 애기하고 너희 식구끼리 지낼 때도 있어야지.”

“죄송해서 그러죠. 아버님까지 매일 도하 보시느라 출퇴근을 하시니까.”

정민선은 그저 고개를 저었다. 

“우리 이 재미로 산다. 몰랐지? 나는 요즘이 제일 행복해. 도하 키우면서 네 시아버지가 점점 달라져서 너무 좋아. 아마 그 양반도 도하 보면서 시후 때 못했던 거 다 하는 기분일 거야.”

정민선의 말처럼 그런 기분이기도 한 현진권은 오늘 도하를 내리 세 시간 넘게 업고 있느라 허리가 휠 지경이었다. 거실에서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던 현진권이 소리를 높였다.

“아. 그만 가자고.”

“그래요. 가요.”

정민선은 다시 한번 도하의 뺨을 어루만지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배웅을 나선 수인과 시후에게 인사를 했다. 

“너희도 얼른 쉬어. 내일 또 보자. 그리고 먹고 싶은 거 있음 미리미리 말해. 알았지?”

“네. 알겠어요. 어머니. 아버지. 고생하셨어요. 어서 푹 쉬세요.”

정민선과 현진권은 손을 흔들며 차에 올랐다. 그래 봐야 10시간 후면 또 피난민 행렬에 오를 두 사람이었다. 

차가 떠나자마자 시후는 수인의 어깨를 끌어안고는 눈을 내리깔았다. 바짝 붙은 몸이 후끈한 걸로 봐서 또 무슨 느끼하고 엉큼한 행동을 해 올지 몰랐다. 

“하. 가을밤은 깊어가고, 마침 아기는 코 자고. 피가 끓는 두 남녀만 남았네?”

벌써 허리를 끌어안고 시후의 밀착이 수위를 넘어가고 있었다. 

“영화 찾아야지~”

역시나 예상했던 그대로이기에 수인은 괜히 약을 올리고 싶어 못 들은 척을 했다. 이미 오늘 오후 둘이 영화를 보며 하루를 마무리하기로 찰떡같이 약속을 해 뒀었다. 

아기가 있으니 밖에서 하는 데이트에 제약은 많으나 시후와 수인은 늘 그랬듯이 편하고 익숙하지만 함께 할 거리가 많았다. 

수인은 집안에 들어서서는 재빨리 도망쳤다. 원래 계획대로 보기로 한 영화를 급히 찾아댔다. 시후는 문단속을 하고 뒤따라 들어와서는 괜히 어수선을 떨어대는 수인을 빤히 쳐다보았다. 

“오빠. 오빠. 영화 제목이 뭐였죠?”

“그 영화, 우리가 찍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안 그래 수인아?”

능글거리는 대사를 하고 시후가 훅 다가왔다. 수인은 요리조리 시후를 피하며 대꾸했다. 

“액션 영화였나? 그럼 우리 와이어 줄 타고 공중 칼싸움 먼저 찍을까요?”

“액션 영화 아니야. 로맨스 보고 싶다며? 달달하면서 말랑한. 그거 내가 전문이야. 그러니 영화 볼 거 없어. 내가 해줄게.”

어느새 수인을 결박하듯 잡아챈 시후는 수인에게 진한 키스를 퍼부었다. 두 입술이 맞물려 예쁜 소리를 만들어냈다. 이러다 오늘 영화는 또 물 건너갈 것 같아 수인은 정신을 번쩍 차렸다. 

“오빠! 도하 우는 것 같은데?”

“어?”

수인의 입술을 한껏 집어삼키던 시후가 벌떡 일어나 아기방으로 달려갔다. 아기라면 단 1초도 머뭇거림 없는 시후가 예쁘면서도 사랑스러웠다. 수인은 시후를 보내놓고 느긋하게 영화를 골랐다. 분명 효자 도하는 잘 자고 있을게 빤했지만, 시후의 후끈 달아오른 체온을 식혀줄 시간은 충분했다. 

어느새 시후가 도하를 확인하고 돌아와 고개를 내밀었다. 

“도하 잘 잔다.”

“다행이네요. 그럼 오빠. 나 팝콘. 지난번에 사다 둔 거 있을 거야. 식료품 창고 한번 찾아봐요.”

아주 자연스럽게 시후를 부려 먹었다. 시후는 싫은 표정 하나 없이 곧장 주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소리쳤다. 

“수인아. 팝콘은 없고, 나쵸만 있는데 가져갈까?”

저 멀리 주방 끝 식료품 창고에서 시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인은 벌써 입맛을 다시며 냉큼 대답했다. 

“오빠. 치즈 소스도 가져와요~ 아. 맞다. 오빠. 지난번에 사둔 맥주 있어. 최적의 온도겠다. 자기는 맥주 마셔요.”

“알았어~”

시후는 행복한 얼굴로 맥주 캔과 나쵸 바구니를 챙겨와 수인 옆에 자리를 잡았다. 조금 전 키스를 하며 후끈했던 기억은 벌써 저 멀리 사라진 표정이었다. 

수인은 웃음이 났지만 억지로 참으며 시후가 안겨주는 나쵸 바구니를 끌어안았다. 

시후는 시원한 맥주 캔을 칙, 하고 땄다. 그 소리에 벌써 수인의 귀는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리고 시후가 시원하게 들이켜는 맥주를 보며 침을 흘려댔다. 맥주 캔을 기울이던 시후가 수인의 눈과 딱 마주치자 컥, 하고 맥주가 목에 걸렸다. 

“와. 김수인. 목에 안 넘어간다.”

“안 볼게요. 그냥 마셔요. 하도 시원하게 넘어가길래 나도 모르게 보게 되네요. 최적의 온도 맞죠? 너무 시원해진 목구멍이 시베리아 벌판 횡단 열차를 타는 기분.”

모유 수유 중이라 맥주를 마실 수 없는 수인은 애처로운 눈빛이 되었다. 시후도 미안해져서는 마시던 맥주 캔을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괜찮아요. 그냥 해본 말이에요. 맥주 못 마신 지도 벌써 언젠지 기억이 안 날 뿐.”

말은 괜찮다면서 점점 시후를 미안하게 만들었다. 

“수유 끝나면 오빠가 진짜 맛있는 술 사줄게.”

“나 모유 수유 끝나면 맥주도 소주도 짝으로 사놓고 마실 거야.”

수인의 표현에 시후는 깔깔 웃다가 침대 아래로 떨어질 뻔했다. 

“술 많이 마시고 싶구나?”

“마시고는 싶은데 참아야죠. 난 엄마니까.”

시후는 어느새 수인을 바짝 끌어안고 있었다. 영화를 볼 수도 없게 수인의 얼굴을 자신의 가슴 복판에 묻혔다. 

“어째 예쁜 소리만 골라서 하냐. 예뻐 죽겠잖아. 수유 끝나면 우리 진하게 한잔하자. 그때까지 나도 참을게.”

“근데. 영화 끝난 건 아니죠?”

시후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채 물으니 시후가 미친 듯이 웃어댔다. 너무 떠들었던가. 잠들었던 도하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시후는 번개같이 날아서 도하를 안고 나타났다. 수인은 긴 소파 위에 앉아서 시후와 도하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내가 낳았는데, 온통 현시후야.”

“그치? 내가 이 녀석 만드느라 온 영혼을 다 갈아 넣었다니까.”

시후는 리듬을 타며 도하와 빙글빙글 춤을 추었다. 수인도 일어나 이 두 남자와 눈을 맞추며 흥겨운 춤사위를 펼쳤다. 셋이라 행복은 세배였다. 

“오오. 우리 도하 배고픈가 보다.”

웃다가 손을 너무 심하게 빨아대는 도하를 보고 시후가 진단을 내렸다. 수인은 얼른 소파 등받이에 쿠션까지 받쳐 들고 자리를 잡았다. 엄마의 몸은 참 신기했다. 

도하의 배꼽시계에 맞춰 수인의 몸도 준비가 되는 것 같았다. 많이 부풀어 있는 가슴을 꺼내 도하에 물렸다. 시후를 닮아 먹성이 좋은 도하는 신이 났는지 손을 팔랑거리며 꿀꺽꿀꺽 먹어댔다. 

그 모습을 보며 시후가 살짝 묘한 표정을 지었다. 

“왜요?”

“아니, 아니야. 그냥.”

이젠 시무룩한 얼굴이 확실해졌다. 수인은 도하의 이마를 쓸어내리며 시후에 시선을 붙였다. 

“왜 그래요?”

“내 젤리와 푸딩이었던 그때가 너무 그리워서.”

수인은 이제야 왜 그런지 알게 되니 웃음만 나왔다. 그래서 은근히 야할 줄 알면서 남아 있는 가슴을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오늘만 허락할 테니까 너무 아쉬우면 만져만 보던가.”

“아니야.”

좋아할 줄 알았는데, 시후의 표정은 여전히 시무룩했고 단호했다. 

“왜 아니야?”

“아무리 그리워도 아들 식량이 되어 버린 젤리와 푸딩이를 강탈할 수는 없지.”

진지한 시후의 말에 수인은 웃음이 터졌다. 도하가 놀랄까 봐 수인은 조심하며 웃음을 지었다. 시후는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맥주 캔을 집어 올렸다. 

“도하야. 너희 아빠 진짜 멋지다. 젤리와 푸딩이라고 이름까지 지어 붙이고는 엄청 만지고 야단스러웠거든. 근데 너 태어나니까 확실히 양보 정신은 투철하다.”

“젤리와 푸딩이의 역할이 중대해졌는데 그럼 어쩔 거야? 내가 양보하는 수밖에. 도하야. 아빠 말 잘 들어. 젤리와 푸딩이는 잠시 빌려주는 거야. 알지? 부디 젤리와 푸딩이 예쁘게 돌려줘라.”

민망한 대화였지만 시후이기에 가능한 것 같았다. 능청스럽지만 진지하고 간곡하게 도하에게 말하고 시후는 웃었다. 

수인은 무탈하게 잘 자라는 도하도, 자신과 도하를 든든하게 지켜주는 시후도, 너무너무 사랑스러웠다. 이런 평범한 일들이 하나둘 쌓여서 행복한 삶을 만드는 게 확실했다. 

수인은 오늘도 행복한 집을 짓는 평범하지만 행복한 벽돌을 단단하게 구워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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