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날 밤을 책임져 (80)화 (80/88)

특별 외전 9화

그런 시후와 수인의 마음을 알아주는 정민선과 현진권이 벌써 집 앞에 나와 서 있었다. 그런데 여느 때라면 정민선이 포대기로 도하를 업고 있으려만 오늘은 현진권이 포대기를 두르고 서 있었다. 

“어머!”

“아버지?”

시후가 차를 주차하기 무섭게 수인이 거의 뛰어내렸다. 그리고 달려가서 현진권의 상태부터 살폈다. 

“다녀왔습니다.”

“왔니?”

정민선은 수인이 왜 그런지 빤히 아는 눈치로 웃음을 억지로 참고 있었다. 

“어머니, 왜.”

“응. 아니, 남자도 등짝이 있는데 못 업을 게 뭐야. 안 그래? 그래서 내가 너희 시아버지한테 도하 업으라고 했어.”

“아~”

수인은 슬그머니 현진권의 눈치를 보며 얼른 도하에 시선을 옮겼다. 엄마를 알아보는지 도하가 열심히 손을 빨다 문득 멈췄다. 

“도하야~”

무언가 어색하지만 열심히 도하를 업고 있는 현진권의 표정도 웃기고, 수인은 도하도 얼른 안고 싶고 복잡한 심정이었다.

“얼른 들어가자. 춥다. 벌써 겨울 오려나.”

정민선은 시후가 주차를 하고 나오자 서둘러 집안으로 사람들을 몰아갔다. 

“아버지가 웬일로 도하를 다 업으셨어요?”

“내가 시켰어. 너 어릴 때 못한 거 손자한테 다 해보라고 할 참이야.”

정민선은 구수한 된장찌개를 가스 불에 올리며 목청을 키웠다. 수인에게 도하를 넘긴 현진권은 뭔가 불만인데 아닌 척하는 표정으로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아버지. 고생이 많으세요. 감사해요.”

“얘! 별소릴 다 한다. 우리가 이만한 각오도 없이 너희 결혼 승낙했겠니? 다 네 아버지의 큰 그림이 있었던 거니까. 그런 인사는 할 필요 없어.”

정민선이 대변인을 자처하자 현진권은 그저 못마땅한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아버지는 그런 뜻 아니신 거 같은데요?”

“요새 들어 네 엄마 완전 제 맘대로 다 휘젓는다. 오후에는 나더러 도하 옷을 빨라고 해서 내 참.”

현진권은 아들 앞에서 하소연하듯 말하다 문득 입을 닫았다. 시후가 엄친아로, 남들에게 자랑거리인 아들로 자랄 동안 현진권은 그저 시후가 좋은 성적을 받아오는 지나 체크했던 아비였다. 

저도 그리 자랐고, 시후도 당연히 의사가 되기 위해 잘 따라오고 있으니 그런가 보다 했다. 그런데 요새 들어 손자를 보면서 깨닫는 바가 많았다. 아이가 너무 예쁠 시기를 현진권은 느껴보지 못하고 시후를 다 키워버린 것 같았다. 

“운전 오래 해서 괜찮냐?”

현진권이 겨우 감정 표현하는 식은 이랬다. 

“당연히 괜찮죠. 그리고 의료원에 한참 후배가 하나 들어왔는데, 어느 정도 수술 맡길 만하면 저도 서울 올라오려고 해요.”

“그래야지. 자리는 있고?”

아버지와 아들은 남자들이라 나누는 대화가 결국 이런 이야기였다. 하지만 시후는 현진권이 너무도 권위적이던 그때와는 확연히 다름을 알았다. 

“오라는 병원은 많은데 생각 중입니다.”

“신중하게 결정해. 이제 가장이니.”

가장의 무게가 무엇인지 일장 연설을 해줄 수는 있지만 현진권은 이쯤에서 입을 닫았다. 그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는 아들도 이미 알 것이고, 시후라면 잘해 낼 거라는 믿음이 있어서였다. 주관이 확실하지만 책임감도 강한 시후임을 현진권은 이제 더 잘 알았다. 

***

수인은 약속장소에 먼저 당도해서 안으로 들어섰다. 벌써부터 옥신각신하는 소리가 입구에서부터 들려오기에 수인은 웃음이 나왔다. 

“안녕하세요~”

“왔냐?”

재건이 시크하게 인사를 건넸다. 희윤은 제법 만삭인 모습으로 손을 흔들었다.

“보기 좋은데?”

“그치. 보기 좋지? 그런데도 희윤이는 살쪘다고 난리다. 난리.”

후덕해진 희윤이 눈이 찢어져 올라가서는 다 물어 죽일 것 같이 으르렁거렸다. 

“뭐가 보기 좋아? 세상에 내가 70킬로그램이나 나갈 거라고 너 상상이나 했어?”

하긴 살찔까 봐 마른 몸매 유지하는 게 일생일대의 과업이던 희윤이였기에 지금의 모습은 인생에 없기는 했다. 

“겨우 70킬로그램 가지고 뭘 이리 호들갑이야? 난 도하 막달에 90킬로그램 나갔어.”

“헉!”

“진짜야?”

수인은 그때를 떠올리며 뺨이 붉어졌다. 하도 먹으라고 야단인 시후와 정민선 덕분에 거의 100킬로그램에 육박했다. 그러나 정말 거짓말처럼 도하를 낳고 몸조리를 하는 동안 살은 기가 막히게 빠졌다. 

“우리 어머니도, 오빠도 저 못 먹여서 난리였거든요. 저 하루 다섯 끼는 거뜬하게 먹었어요.”

“뭐 올림픽 나가는 체육인이냐? 다섯 끼? 와. 현시후 대단하다.”

어떻게 딱 맞춰서 등장을 하는지, 시후는 연신 당찬 발걸음으로 카페 안을 걸어 들어와 수인을 향해 직진했다. 

“내가 대단하긴 하지. 뭔 이야기야?”

“오셨어요?”

희윤이 대표로 인사를 하고 나자 시후는 어깨를 들썩이며 무슨 이야기 중이었는지 궁금해 했다. 

“오빠 대단하다고요.”

“나야 늘 대단하지. 그게 뭐?”

언제나 당당한 현시후, 그런 그를 거의 20년 가까이 겪는 사람들이라 그러려니 놀라지도 않았다. 그러나 재건은 턱을 문지르며 생각 중이었다. 

“저 키에 90킬로그램이면 거의 굴러다녔던 거 아니야?”

“누구? 우리 수인이?”

정황상 주인공은 수인이 같았다. 시후가 쓱 수인을 내려다보았다. 수인은 민망한 얼굴을 해서 괜히 콧방울을 엄지와 검지로 만지작거렸다. 

“야. 얼마나 귀여웠다고. 포동포동하니.”

“아. 현시후. 쟤 정신감정 언제 받고 안 받았냐?”

재건이 눈썹을 구겨가며 대꾸하는데, 시후는 보란 듯이 수인을 끌어안고 부부애를 과시했다. 그 모습을 보고 슬쩍 희윤에게 팔을 둘렀던 재건은 팔이 뒤로 꺾인 채 악 소리를 내었다. 까칠하게 눈을 치켜뜬 희윤이 쌀쌀맞게 말했다.

“쓸데없는 것 좀 따라 하지 마.”

“넌 다 좋은데 너무 기가 세. 나 이 정도면 매 맞는 남편 아니냐?”

갑자기 폭탄 발언을 해 버린 재건은 코에서 찬바람을 뿜는 것 같았다. 희윤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서 재건을 쳐다보았다.

“어머?”

“너. 작작해. 내가 말을 안 하고 참아서 그렇지.”

재건은 점점 걱정되는 소리만 늘어놓았다. 시후가 꽤 심각하게 몸을 기울여왔다. 그리고 재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왜? 대체 뭔데?”

“이봐. 여기도 꼬집히고 이건 멍이야. 그리고 이건 찰과상.”

재건은 희멀건 팔과 다리, 옆구리를 보여줘 가며 입을 삐죽거렸다. 그러자 희윤이 더 당황해서는 재건을 주저앉혔다. 그리고 들쳐진 티셔츠를 끌어 내렸다. 

“너 재건 선배 구타하니?”

“구타라니. 하도 치대잖아. 싫다는데 자꾸 들러붙고, 내가 전에 얘기했었지? 같이 한번 자보면 안다니까. 자고 나면 삭신이 다 쑤셔. 어찌나 잠버릇이 나쁜지.”

희윤의 하소연에 시후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수인은 희윤에게 안됐다는 적선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더 기절할 소리가 들려왔다. 

“대체 김희윤 너 지금 무슨 소리야? 수인이가……누구랑 잤다는 거야? 야. 뭐 그런 이야기를. 여기서. 시후야. 너 괜찮아?”

재건을 제외하고 세 사람이 그 자리에 숨도 못 쉬고 얼어붙었다. 셋 중에 가장 얼굴이 터질 듯 빨개진 희윤이 두 팔을 휘저어댔다. 희윤은 시후와 수인 보기 민망해서 당장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으나 말귀를 못 알아듣는 불쌍한 남편을 구해내야 하니 아찔하기만 했다. 

“아. 대체 뭘 들은 거야? 제발~”

“이거 핵폭탄 급인데…….”

나름 친구를 걱정하는 재건의 표정은 너무 진지했다. 시후는 기가 막혀서 눈을 꾹 감았다. 그리고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저 진지한 친구를 어째야 할까. 그렇다고 나쁜 애는 절대 아닌데. 수인은 너무 어이가 없어서 배꼽을 잡고 웃어 버렸다. 수인이 웃으니 시후도 그냥 웃음이 나왔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열 받아 봐야 손해인 상황. 김재건이 오늘도 또 한 건을 했을 뿐이었다. 

“이게 진짜! 아. 신약 개발 내가 해야지, 안 되겠다. 어? 말귀 알아듣는 신약!”

시후가 빽 소리를 지르자 재건이 또 한소리 하려는데, 희윤이 얼른 입을 틀어막았다. 

“자기야. 그만하자. 이러다 이제는 나한테 얻어맞는 게 아니고 시후 선배한테 얻어맞겠어.”

희윤이 간절한 눈빛으로 재건을 뜯어말렸다. 

“그냥 냅둬라. 이게 어디 하루 이틀이냐. 그나저나 너희 애기는 말귀 잘 알아들어야 할 텐데. 괜찮겠지?”

“저도 그게 걱정이에요. 이거 유전되는 건 아니겠지요?”

희윤 때문에 박장대소를 했다. 또 자기만 쏙 빼놓고 이야기가 흘러가자 재건이 무슨 말인지 궁금한 얼굴로 시후를 쳐다보았다. 

“야. 김재건. 너 맞아도 싸다. 어떻게 임신한 와이프한테 치대냐. 너 제정신이야? 넌 정신감정 언제 받고 안 받았어?”

괜히 호통치듯 하면서 시후는 수인의 눈치를 살폈다. 수인은 의미심장하게 웃음으로 받아쳤다. 

“희윤이는 예민한 스타일이고, 나는 무딘 스타일이라서 그 차이인 거지.”

“아니야. 아니야. 수인아. 너 절대로 무딘 스타일 아니고, 내가 섬세한 스타일인 거지. 딱 치고 빠지기 잘하는. 응? 근데 김재건은 참 여러 가지로 미숙해.”

결국 또 시후의 자화자찬으로 대화가 흘러가자 재건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 현시후. 나 맞고 산다는 말 겨우 꺼냈는데, 너 이렇게 초 칠 거야?”

조금 전 대단한 초를 누가 쳤는데, 초를 친다고 항변을 하는지. 다들 재건의 말에 그저 나오는 건 웃음뿐이었다. 그렇지만 악의라고는 하나 없는 재건임을 다 아는 절친들이었기에 조금 전 이상했던 대화도 웃어넘겼다. 

아마도 각자 집으로 돌아간 뒤에나 희윤의 설명을 들으며 재건이 고개를 끄덕일 거라는 걸 모두 알고 있었다. 

“그냥 맞아줘라. 희윤이가 때리면 또 얼마나 때리고. 지금 저 몸이 보통 몸이냐? 한 생명을 만들어 내는 일이 너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 몰라?”

시후의 큰소리에 수인과 희윤은 광신도처럼 눈을 반짝였고, 재건은 울상이 되었다. 

“공공의 적 같은 놈!”

“시후 선배 말 새겨들었어? 또 엉뚱한 말, 하기만 해봐. 이리와. 말귀 못 알아듣는 귀부터 좀 맞자!”

희윤이 재건의 얼굴을 확 끌어당겼다. 그렇게 즐겁게 네 사람은 웃으며 행복한 시간을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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