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날 밤을 책임져 (79)화 (79/88)

특별 외전 8화

시후는 수인의 목소리에 에너지 충전이 완벽히 된 것 같았다. 언제 들어도 해맑고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수인만의 매력이 오늘도 시후를 힘이 나게 했다. 

방송국 안으로 힘차게 걸음을 옮기는데, 방송국 피디가 뭔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달려와서 시후를 붙잡았다. 

“뭡니까?”

“선생님. 선생님.”

위급 환자라도 발생했는지 싶어서 시후는 저도 모르게 손목시계를 풀어 재킷 주머니에 넣었다. 

“지. 지. 금.”

얼마나 숨도 안 쉬고 달려왔는지 피디는 얼굴이 퍼렇게 변해 헐떡거렸다. 

“환자 발생했습니까?”

“그게 아니고. 국장님께서 급히 찾으세요.”

피디 입장이야 국장이라면 조상님과 동급일지 몰라도 시후는 괜한 호들갑에 인상을 구겼다. 

“국장님 호출이 응급은 아닌 것 같은데?”

“응급이 아니고 긴급 상황입니다.”

피디는 뻗대는 시후의 팔목을 움켜잡고 다짜고짜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 사이 시후를 보자는 사람이 국장에서 방송국 사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 연락을 받고 피디는 더욱 사색이 되어 보기에도 안쓰럽게 떨어댔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저도 자세히는 모르나, 누가 현 선생님을 찾아왔답니다. 그게 좀 일반적이지가 않아서.”

피디의 설명은 시후를 더 갸우뚱하게 했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만나자는 사람의 급은 높아지고 일반적이지 않기까지 할까. 

뭐가 되었든 시후는 떨 남자가 아니었다. 조금 전 자신을 떨게 할 단 한 사람을 맘모스 빵으로 행복하게 해주고 왔으니 이에 버금가는 일이 아니고서야 시후에게 손톱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렇게 사시나무 떨듯 떨어대는 피디를 옆에 두고 시후는 방송국 사장실을 들어섰다. 

비서실부터 검정 정장을 쫙 빼입은 경호원들이 귀에는 이어폰을 끼고 근엄하다 못해 위협적으로 서 있었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여비서도 어딘가 모르게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사장실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서는데, 옆에 딸려오던 피디는 검정 정장들에게 제지를 당했다. 

“그. 그럼 저는 여기서.”

피디는 눈치를 살피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시후는 대체 이 요란한 이유가 궁금해서 안으로 일단 발을 디디었다. 

시후의 뒤로 문이 철컥 닫혔다. 제일 상석인 듯 싶은 곳에 얼굴색이 좀 짙고 키가 딱 봐도 거구인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두 팔을 활짝 펼치고 마치 회색 두루미처럼 겅중거리며 시후에게 다가왔다. 

「오, 나의 생명의 은인. 현시후 박사.」

현시후라는 영어발음이 몹시도 어눌하게 들리지만 그는 온 감정을 다해 시후를 불렀다. 시후는 점점 다가오는 그를 보면서 기억의 회로를 돌렸다. 

“아!”

그제야 생각이 난 듯 시후도 오른손을 척, 하고 내밀었다. 시후보다 더 거구인 남자는 시후가 내민 손을 잡고 힘차게 흔들어댔다. 

「당신 나라 방문이 좀 오래 걸렸어. 그래도 늘 나는 당신을 위해 기도했다.」

우리와 정서는 다르지만 제 목숨을 구해준 사람에게 드는 감정은 똑같았다. 아랍 어느 왕국 현 국왕의 12번째 동생이자 외교 장관을 하고 있다던 모하메드가 시후를 찾아왔다. 

그것도 시후가 방송 출연을 한다는 사실을 알고 방송국에서 만날 일정을 잡았다고 했다. 

반갑게 서로 인사를 나누고 시후는 그를 처음 발견한 바닷가가 떠올랐다. 하지만 제 손을 거쳐 간 수많은 환자 중에 그저 하나였기에 이렇게 인사차 한국까지 올 줄은 몰랐다. 그가 심근경색이었던 것이 떠올라 시후는 물었다. 

「건강관리는 잘하고 있습니까?」

「죽다 살아난 사람은 건강 말고는 걱정거리가 없다. 나는 죽어라 운동을 하고 있다.」

영어로 주고받는 대화가 길어지자 방송국 사장은 큼큼거리며 기침 소리를 내었다. 

“아. 사장님.”

“대통령님께서 특별히 모하메드 왕자님께 협조를 부탁하셔서 아주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셨겠네요. 죄송합니다.”

시후가 성가시게 만든 것 같아 사과를 했더니 사장은 펄쩍 뛰었다. 

“아니. 그런 말이 아니고. 현 선생님 덕분에 우리 방송국에 영광이지요. 모하메드 왕자님께서 방송국에 오신 김에 우리 한국 컨텐츠도 수입해 보겠다고 긍정을 하셨어요. 현 선생님 두루두루 애국하셨습니다. 하하하.”

“애국이요? 하하하.”

시후는 애국자가 된 기분으로 함께 웃었다. 

그리하여 은혜를 갚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 모하메드는 시후에게 애걸을 해댔다. 

「내가 당신을 위해 꼭 한 가지는 선물하고 싶은데. 꼭 좀 받아줘.」

주겠다는 사람이 되려 애걸하는 꼴이 우스운지 사장도 웃음을 참으려 애를 쓰고 있었다. 

「보다시피 내가 딱히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한국 방송 콘텐츠도 수입해 준다 하고 달리 더 받고 싶은 것이 없는데요.」

아무리 상대는 땅만 파면 석유가 치솟아서 지폐로 코를 풀어도 아깝지 않은 부호라고는 하나 의사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 생각했다. 

「그럼 당신 가족이 필요한 것은 없을까?」

모하메드가 그리 물어보니 고개를 저어대던 시후가 딱 멈췄다. 가족이라는 말에 제일 먼저 떠오른 건 역시 수인, 수인이 요새 자선 의원으로 고민이 많아 보였는데. 말을 꺼내면서도 살짝 기대감이 줄어든 채 시후가 말했다. 그랬더니 모하메드는 박수를 쳐가며 기뻐하였다. 

바닷가에서 건져 올릴 때 살짝 머리를 다쳤던 건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로 왕자는 체면도 버리고 기뻐하는 모습이었다. 

결국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하였나. 수인이 그토록 고심하던 일이 이렇게 뜻하지 않게 이루어질 수도 있을까 싶었다. 모하메드가 나서서 매년 일정액의 후원금을 후하게 약속하였다. 

오늘 방송 녹화는 무슨 정신으로 했는지 모르게 시후는 이 기쁜 소식을 들고 수인에게 날아갔다. 게다가 한술 더해 모하메드가 지원한다는 소식에 정부에서도 한발 나섰다. 당장 자선의원에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지 대화를 하자 하였다. 

너무나 기뻐하는 수인을 보니 시후는 속이 다 뻥 뚫린 것 같았다. 남편으로서, 선배로서, 또 의사로서 근심 많은 아내 고민을 해결한 것 같아 정말 기뻤다. 

“어쩜 우리 남편은 뭐든 능력이 넘쳐나. 어떡해~”

“뭘 어떻게? 그냥 안겨.”

시후의 말에 수인은 이곳이 자선 의원인 줄도 모르고 시후에게 달려들었다. 시후는 달려오는 수인을 번쩍 들어 안고 요란하게 몇 바퀴를 돌았다. 

“그만~ 토할 것 같아요.”

역시 수인은 그저 예쁘게만 꾸며 놓은 드라마 속 인물이 아니었다. 살아서 팔딱거리는 리얼리티를 보여주니 시후는 그게 또 예뻐서 깔깔 웃어댔다. 

“오~ 진짜 토할 뻔했어.”“혹시?”

의심의 눈초리가 되어 묻는 시후에게 수인이 어퍼컷을 날리는 시늉을 내었다. 

“나 도하 낳은 지 이제 겨우 3개월째거든요? 아직 모유 수유 중이고요. 네?”

“그렇긴 하지. 근데 오늘 방송국 사장님이 나더러 애국자라잖아. 애국자가 별건가? 응? 인구 감소 위기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뭐야?”

또 한가득 선을 넘어서는 시후에게 수인이 다가가서 입술 양 끝을 꼬집듯 잡아챘다. 

“이 입은 정말 말 못 해 죽은 귀신이 붙은 건 아니겠죠?”

“말 못 해 죽은 귀신인지는 모르겠고. 암튼 그거 못해 죽어가는 건 사실이야.”

진료실 안에서 나누는 부부의 대화가 도를 넘어갔다. 수인은 얼른 출입문부터 살폈다. 

“무슨 그런. 말을?”

“그런 말, 하면 안 되는 거야? 왜에?”

왜를 잔뜩 늘리며 또 약을 올려대는 시후였다. 그리고 슬금슬금 다가왔다. 아무래도 눈빛이 심상치가 않았다. 수인은 이러다 무슨 쪽팔리는 일을 당할지 모르기에 일단 대각선으로 피신했다. 

진료 책상을 사이에 두고 오른쪽으로 돌았다, 왼쪽으로 돌았다, 를 하고 있는데, 진료실 출입구가 열렸다. 

“둘이 뭐해? 유치하게.”

“예? 아무것도 안 하는 데요.”

박 선생이 눈살을 찌푸리며 시후가 사 온 빵을 쟁반에 받쳐 들고 들어왔다. 

“술래잡기하기에는 진료실이 너무 좁은 거 아니야? 현 선생님 키도 큰데 말이야. 걍 나가서 해.”

“와~ 빵이다, 빵.”

수인은 재빨리 몸을 돌려 시후에게서 빠져나가 쟁반을 잡았다. 

“부원장은 꼭 할매 같이 이런 거 좋아하더라.”

“할매라뇨.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빵인데. 남편이 사다 준 빵.”

“아이고 좋겠네. 나 남편 없었으면 지금 이 자리에서 빵 먹다가 울 뻔했다. 나도 남편 있거든.”

괜히 박 선생은 웃으며 샘을 내었다. 

“빵 먹고 얼른 퇴근해요. 둘이 술래잡기는 집에 가서 하시고.”

“네. 알겠습니다~”

시후가 시원스레 대답을 하자, 박 선생은 웃으며 자리를 피해주었다. 

“아버지가 너무 기뻐하셔.”

“이렇게 도움이 될 줄 나도 몰랐다.”

수인이 시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죽으란 법은 없나 봐요. 안 그래도 가을 봉사 더 늦춰야 하나 고민했었거든요.”

“아버님이 이제 내 후원금도 안 받으셔. 몰래 돈뭉치 던지고 도망이라도 치던지 해야지.”

시후는 그동안 월급의 많은 부분을 자선 의원에 기부했었다. 그게 늘 마음에 걸렸던 김정수 원장은 이 자선 의원 건물을 시후가 사들인 뒤부터는 후원금도 받으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장이니 그 돈으로 수인이 굶기지 말라는 우스갯소리를 하며 거절을 확실히 했다. 자신은 자비 들여 봉사하지만, 아이들까지 억지로 그리 강요하기는 싫었던 김정수였다. 

“이번 봉사도 참여 가능하신 거죠? 현시후 선생님?”

“나 핵심 멤버 아니었어? 당연히 가야지. 아 참. 김재건도 참여한다고 했어.”

“진짜요? 나 희윤이 내일 만날 건데. 재건 선배도 시간된다고 하면, 우리 넷 같이 볼래요?”

시후를 따라 하고 싶어 안달이 났던 재건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났다. 딱 한 번 만에 임신에 성공했다며 세상 구한 히어로 같은 얼굴로 자랑을 하던 재건이었다. 

수인과 시후는 7시까지 알차게 진료를 마치고 행복한 얼굴로 보금자리로 향했다. 진료하는 내내 전화 한 통 안 하지만 수인은 도하가 보고 싶어서 할 수 있으면 지금 날아서 가고 싶었다. 

“참 신기해.”

“왜?”

운전을 하며 시후가 수인을 돌아보았다. 

“온종일 진료 보느라 힘든데 집에 가는 이 시간은 또 힘이 불끈 솟아요.”

“그건 나도 그래.”

시후는 수인을 위해 자선 의원 근처에서 집을 구한 터라 운전시간이 길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훌쩍 뛰어넘는 초인의 힘이 나오니 신기했다. 

“도하 너무 보고 싶다.”

시후가 도하 이름을 꺼내니 수인은 더욱 애가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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