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날 밤을 책임져 (78)화 (78/88)

특별 외전 7화

잠시 후 정민선은 도하를 끌어안고 거실로 나왔다. 밥을 먹다 말고 현진권도 다가가 기웃거렸다. 

“어쩜 하루 만에 또 이만큼 컸어요.”

“거 참 신기하네. 애가 이렇게 빨리 컸었나? 소아과 파트 돌 때 공부 많이 했었는데 기억이 하나도 안 나네.”

현진권은 사실 시후가 아기였을 때도 공부하느라 바빠서 시후 크는 걸 눈여겨보지 못했다. 

“3개월에 체중이 출생 시 몸무게 두 배에 달한다. 목을 약간 가누고 반사 반응보다 자율적인 반응을 보인다. 또.”

현진권이 녹슬지 않은 기억력을 더듬어대는데, 정민선이 화끈하게 잘라버렸다. 

“당신이 지금 도하 진료 봐요? 할아버지가 그딴 거 달달 외워 뭐에다 써요? 그냥 도하를 봐요. 하루하루 아기는 자라고 이렇게 눈도 맞추고, 손도 빨고. 얼마나 신기해요?”

정민선의 말에 현진권은 입을 다문 채 도하를 보았다. 시후 붕어빵인 손자를 보고 있자니 시후 어릴 때 못 해줬던 일들이 자꾸 어른거렸다. 

“시후도 이럴 적이 있었지?”

“그럼 걔는 아기 시절도 없이 바로 어른 됐겠어요?

현진권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 얼마나 고마운 일이에요? 도하 아니었으면 당신은 이 재미도 모르고 저승사자 손 잡고 갈 뻔한 거라고요.”

듣고 보니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다. 어쩌면 현진권의 욕심대로 시후를 기선대 이사장의 사위 따위를 만들었더라면, 손자 보는 재미를 알게 되었을까. 아들과 며느리가 보기만 해도 서로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는 모습을 보며 흐뭇해했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나는요. 도하가 예뻐서 좋은 것도 있지만요. 수인이가 너무 예뻐요. 우리 시후한테도 잘하죠. 우리한테 좀 사근사근해요. 나는 딸 없는 게 내내 아쉬웠는데, 이젠 하나도 안 아쉬워요.”

“그건 그래.”

수인이 시후와 결혼한 이후 절간 같았던 집안에 온기가 돌았다. 수인은 길에서 파는 붕어빵을 한 봉지 사 들고 와서는 같이 먹자고 웃었고, 환자분이 주셨다면서 참기름 한 병을 쥐고 와서는 비빔밥 만들어 먹자고 웃었다. 

어느 날은 집 나간 며느리도 돌아온다는 전어구이를 먹자며 선동했고, 커플 잠옷이라며 사 들고 와서는 입어보라 야단이었다. 소소하지만 수인으로 인해 사는 재미가 달라졌다 할까. 더구나 이렇게 어여쁜 손자까지 맡겨주니 정민선도 현진권도 수인이라면 토를 달 것이 없었다. 

***

수인은 자선 의원 앞을 빗자루질하는 양 선생에게 다가갔다.

“양 선생님. 빗자루 이리 주세요. 제가 할게요.”

“아이고. 됐어요. 부원장님.”

이제 막 출근을 하면서 원피스에 핸드백까지 멘 채로 빗자루를 달라고 하니 양 선생은 웃음이 나왔다. 

“저 잘해요.”

“뭘 잘해? 지난번에도 빗자루 대가리 부러뜨려 먹은 거 부원장인 걸 내가 몰라? 어서 들어가기나 해.”

“어? 아셨구나. 아이참. 그거 비 온 날 낙엽 쓸다가 그런 거예요. 워낙 낡아 있던 빗자루였고요.”

수인은 항변을 해보지만 양 선생은 그저 입을 딱 붙인 채 고개를 저어댔다. 

“들어가서 진료 준비나 하십시오. 부원장님.”

“알았어요.”

수인은 양 선생에게 미안해하며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부부는 비슷하니까 부부던가. 이번엔 자선 의원 유일한 간호사 박 선생이 계단에 물걸레질을 하고 있었다. 

“박 선생님. 걸레 이리 주세요. 이 밑에부터는 제가 닦을게요.”

“아. 그냥 들어가. 정 하고 싶으면 가서 커피나 내려.”

“진짜 두 분 다 왜 저 못 믿고 그러세요? 제가 힘 하면 한 힘 한다고요.”

남들이 보면 마대자루 쟁탈전같이 마대를 두 여자가 잡고 서로 뺏겠다며 야단인 모양새였다. 

“이거 놔. 가서 커피나 내려. 원장님 오시기 전에.”

“다들 날 왜 이리 못 믿지?”

“내가 해야 깨끗해.”

결국 박 선생도 수인을 멀찍이 밀어내 버렸다. 수인은 힘든 일 안 시키려고 일부러 그런다는 걸 알기에 미안한 얼굴로 자선 의원에 들어섰다. 

어느새 정갈하게 실내 청소까지 마쳐져 있었다. 수인은 제 진료실에 핸드백을 내려놓고 커피를 내렸다. 꽤 깊어가는 가을과 커피향이 제법 잘 맞는 것 같았다. 

잠시 후 김정수 원장이 양 선생과 박 선생을 전부 이끌고 의원으로 들어왔다. 그래 봐야 직원 달랑 네 명이 전부인 자선 의원이었지만, 수인이 내린 커피를 나눠 마시며 아침 회의를 시작했다. 

“겨울 되기 전에 봉사 일정 잡을 수 있을까?”

“크게 후원금이 안 들어오면 어려울 것도 같아요. 원장님.”

모든 살림을 총괄하는 양 선생이 살짝 미안한 얼굴로 대답을 했다. 건물이야 시후가 마련해 준 뒤로 월세가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환자 수도 급격히 늘어났고, 수인이 의료원을 퇴직해서 이제 월급도 후원금으로 내놓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시후에게 손을 자꾸 벌리기는 싫은 김정수 원장이었다. 

“신부님이 좀 더 알아본다고는 하셨는데, 그쪽도 겨울에 연탄 준비해야 해서 어렵겠지요.”

양 선생의 말에 모두가 가슴만 답답할 뿐 뾰족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아직 시간 있으니까 알아보자고.”

김정수 원장은 그리 말하며 회의를 정리하였다. 수인은 양 선생과 박 선생이 나간 뒤, 김정수에게 넌지시 말했다. 

“아빠. 그이한테 말해볼게요.”

“현 서방한테는 입도 뻥긋하지 마. 나 그거 싫어. 그리고 도와준다고 했던 동기들 아직 많아.”

결국 또 김정수는 지인들에게 요청을 해볼 생각인 것 같았다. 수인은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아서 요즘은 자선 의원에 대한 생각이 큰 숙제였다. 

아버지 김정수는 윗대 원장님들처럼 자비 털어 운영을 해 가길 원하지만, 빈익빈 부익부가 심해지는 요즘 시대에 어렵고 아픈 자들은 입소문을 듣고 점점 늘어났다. 

수인은 이 일을 한 개인이 해결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여러 방면으로 길을 찾고 있었다.

오후에 환자가 잔뜩 몰리는 시간대가 어느 정도 지난 것 같았다. 수인은 시후에게 전화를 걸어볼까 생각하며 진료실 밖을 나왔다. 

“부원장님!”

박 선생이 어느 환자를 데리고 수인에게 다가왔다. 

“기억나실지 모르겠네요.”

박 선생이 말을 터주자 환자는 꾸벅 인사를 했다. 그리고 제 소개를 했다. 

“선생님. 2년 전에 의료봉사 오셔서 저 진료해주셨어요. 그리고 작년에 여기서 수술도 받았고요.”

그러고 보니 기억에 남는 얼굴이었다. 수인은 반갑게 손을 잡았다. 강원도로 의료봉사 떠났던 곳에서 만났던 트렌스젠더 환자였다. 얼굴이 밝아 보이고 건강해 보였다. 

“반가워요. 기억나요.”

“자선 의원 덕분에 잘 지내고 있어요.”

수줍게 자신의 안부를 전하며 환자는 미소를 지었다. 수인은 찾아와준 환자를 제 진료실로 이끌었다. 

“수술도 잘 되어서 아픈 데도 없고요. 저 수술해 주신 선생님, 가끔 텔레비전에 나오시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더라고요.”

“아. 보셨구나. 그 선생님 요새 방송 출연도 자주 하시고 연예인 되셨죠.”

수인은 괜히 시후의 언급에 부끄러워서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환자는 웃으며 되받아쳤다.

“선생님. 남편분이라 들었어요.”

“아. 들으셨구나. 맞아요. 우리 남편이요.”

“멋지신 분이랑 결혼하시고 부러워요. 선생님.”

환자는 웃으며 수인에게 말했다. 물론 그 환자의 말에 100% 아니, 1000% 동감하는 수인이었다. 하지만 팔불출같이 자랑을 늘어놓을 수 없어서 무척 자제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환자가 슬그머니 주머니에서 흰 봉투를 하나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저 수술해 주시느라 돈 많이 들었잖아요.”

어려운 형편을 짐작했으므로 진료비나 수술비를 청구하지 않았다. 자선 의원은 그저 제 상황에 맞게 진료비를 내는 사람은 받고, 없는 사람에게는 받지 않는 곳이었으니, 이 환자에게도 그랬을 뿐이었다. 

“저 1년 동안 적금 부었어요. 아직 수술비 다 갚으려면 턱도 없지만, 받아주세요.”

“아. 이걸 받아도 될지.”

수인은 망설였다. 사실 의사로서 환자의 진료비 수납에 관여하지는 않았다. 그저 진료를 보고 처방전을 써주고, 치료가 필요하면 치료를 했고, 수술을 했다. 

“받아주세요. 덕분에 저 안 아픈 것만 해도 날아갈 것 같아요. 그리고 계속 조금씩 갚을게요. 그래야 또 저 같은 환자 치료해 주실 수 있잖아요.”

수인은 환자가 내민 돈 봉투를 감사한 마음으로 받았다. 하지만 환자는 받아주어서 더 감사한 마음이었다. 환자가 돌아간 뒤, 수인은 박 선생에게 돈 봉투를 전했다. 

“어머나. 적금 들었대요? 다달이 30만원 씩 부으려면 엄청 힘들었겠다. 너무 고맙네요. 이렇게 안 잊고 찾아와줘서.”

“그러게요. 근데 받아도 될지 사실 고민했어요.”

“맞아요. 해줄 땐 모르겠는데, 이렇게 진료비 갚는다고 하면 괜히 또 미안해지고 그래요.”

자선 의원 생활 20년째니 박 선생은 지금 수인이 느끼는 감정을 훤히 알았다. 

“어쨌거나 이 돈은 또 어려운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잖아요.”

박 선생 말에 수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래서 아버지 김정수 원장은 이 일을 놓을 수 없었던 걸까. 이래서 더하기 빼기 같은 간단한 계산도 하지 않으며 달려온 걸까. 수인에겐 생각이 참 많은 날이었다. 

그 시간 시후는 수성의료원에서 방송국으로 향하며 전화를 걸었다. 

“수인아. 진료 끝났어?”

-어. 대충 끝났어요. 오빤 방송국 가는 길?

서로 근무하는 병원이 달라져 근무를 각자 하고 있지만, 스케줄만은 줄줄 꿰고 있었다. 더구나 조금 전 환자로 인해 시후가 몹시도 보고 싶은 순간이었다. 

“끝나고 뭐 사갈까?”

-그럼 어머니 좋아하시는 단팥빵 좀 사 와요. 방송국 근처 대국당 알죠?

“오케이. 자기는 뭐 먹고 싶은 건 없어? 맘모스 빵도 살까?”

시후는 정민선부터 챙기는 수인이 예뻐서 수인이 환장하는 빵 이름을 대었다. 수인은 저도 모르게 군침을 꿀꺽 삼켰다. 그 소리를 귀 기울여 듣고 있던 시후, 이때를 놓칠 리 없었다. 

“우리 예쁜 빵순이, 벌써 빵 이름만으로도 행복해?”

-그래요. 행복해요. 빵순이라 행복하고, 빵 사다 주는 남편이 있어서 행복하네요.

그래, 행복이 뭐 별건가. 사랑하는 사람과 이렇게 사는 게 행복이지. 서로 챙겨주고 서로 아껴주고. 서로의 체온을 나누는 삶. 수인은 오전 내내 자선 의원으로 복잡하고 축 처졌던 기분이 시후로 인해 쨍하게 햇빛이 비추는 기분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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