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날 밤을 책임져 (77)화 (77/88)

특별 외전 6화

수인은 잠이든 도하의 등을 어루만졌다. 태어나기도 튼실하게 태어났지만 시후를 닮아서 이제 겨우 백일 아가인데 덩치는 여느 돌쟁이 같았다. 

입을 움찔거리며 잠이든 도하가 너무 예뻐서 수인은 잠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어느새 시후가 다가와 도하를 사이에 두고 옆으로 누웠다. 

“오빠. 믿어져요? 이제 겨우 도하가 백일이라는 게?”

“나 어릴 때도 그랬대. 내 유전자가 좀 세지.”

또 유전자 부심에 시후의 어깨가 치솟았다. 수인은 어련하겠냐는 표정으로 도하 등을 한번 어루만지고 시후의 어깨도 한번 어루만졌다. 

“힘들지 않아?”

시후는 일어나려는 수인을 재빨리 끌어안아 제 가슴 위에 올렸다. 바둥거리며 달아나려던 수인도 이내 포기하고 시후의 가슴에 납작 엎드려 시후를 내려다보았다. 수인을 걱정하는 시후의 눈빛이 너무도 따뜻했다. 

“환자가 점점 많아지긴 해요. 아버지 혼자서 어떻게 감당을 하셨는지 놀라울 정도.”

“몸조리도 다 못하고 일하는 건 내가 좀 걸려.”

시후는 수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3개월 동안 잘 쉬었어요. 어머니께서 정말 고생 많으셨고요.”

“자선 의원에 환자가 많다 하니 쉬라고도 못하고, 내 마음이 아프다.”

얼마 전부터 수인은 김정수 원장이 운영하는 자선 의원에 부원장으로 일을 시작했다. 김정수가 계속 허리도 안 좋고, 여기저기 아픈 곳이 늘어나기에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자선 의원을 김정수를 대신해 맡아야 할 사람도 수인이였다. 도하를 낳고 잠시 육아휴직을 하던 수인과 시후는 상의를 해서 그러기로 결정을 한 일이었다. 하지만 시후의 마음은 자꾸 수인이 무리하는 것 같아서 신경이 쓰였다. 

“무리 안 해. 걱정 마요.”

“나 너 힘든 거 싫다. 차라리 내가 힘든 게 나아.”

그 마음 모르지 않았고, 자신을 끔찍하게 생각해주는 시후가 고마워서 수인은 눈물이 글썽거려졌다. 

수인은 조금 위로 기어 올라가서 시후의 입술에 입술을 붙였다. 고맙다는 표현으로 시작한 수인의 키스는 점점 수위를 넘고 있었다. 무아지경으로 서로의 입술 사이로 비집고 들어서 버렸고, 시후의 점잖게 내리고 있던 손이 어느새 올라와 수인의 얼굴을 붙잡고 있었다. 

쪼옥 쪼옥 

입술이 만들어낼 수 있는 예쁜 소리가 쉼 없이 만들어졌다. 그 소리에 잠이 들었던 도하가 일어날까 겁이 난 시후가 입술을 간신히 떼어냈다. 그리곤 수인의 얼굴을 가슴팍으로 끌어내려 꼭 안았다. 

“아우. 진짜 김수인. 틈만 나면 날 덮쳐.”

“어머!”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따지려는데 시후가 힘을 꾹 주어 꼼짝도 못 하게 만들었다. 

“김수인이 내는 소리 때문에 우리 도하 깰 뻔했잖아. 아우 아찔해.”

“어머?”

수인의 감사 키스에 제대로 발동을 건 것은 자신이었지만 시후는 시치미를 뚝 떼면서 킥킥 웃어댔다. 수인은 시후의 가슴팍을 내리치며 발딱 일어났다. 

“억!”

“암튼 내가 말을 말아야지.”

일어나 버리는 수인을 또 얼른 끌어안고 시후가 너스레를 떨었다. 

“지금 이 시간에 말이 필요해? 이미 해는 졌고, 인류의 역사는 밤에 쓰이는 거지. 안 그래?”

눈을 깜빡거리며 애교를 떨어댔다. 그런 시후를 째려보던 수인이 두 손을 들어 시후의 입술 양 끝을 꼬집듯 잡았다. 

“와. 현시후 씨 이 입은 어디 말 잘하는 학원 다녔나? 어떻게 이렇게 말을 잘할까?”

“내가 말만 잘하나? 키스하면 내가 한 키스 하자. 현키스라고 불러줘.”

입술 양 끝을 잡혀놓고도 시후는 능청스럽게 말을 해댔다. 그러더니 어느새 수인과 위아래가 바뀌어서는 능글거리며 웃어댔다. 

“현키스 오늘 시동 제대로 걸어봐 드려요?”

“아응. 대체 그 멋지던 현시후 선배님은 어딜 가셨냐고요.”

시후는 눈썹까지 실룩이며 수인을 자극했다. 

“만나고 싶어?”

“네. 그 점잖고 멋지던 우리 선배님. 정말 만나고 싶습니다.”

수인이 마치 신병 교육대에 막 입교한 훈련병처럼 보고를 하였다. 시후는 어떤 상황에도 모든 준비가 되어 있는 남자임을 수인이 깜빡했다.

“만나게 해줄 테니까. 일단 눈을 감아보자. 어허. 거 못 믿는 눈빛 그만 넣어둬. 자 이제 키스 소리가 들리면 곧 당신은 현시후 선배와 만나게 됩니다. 레드썬~”

수인은 벌써 두 팔을 포박당했다. 가짜 주술사 같은 목소리가 끝나자 현키스라 자처하는 시후의 뜨겁게 진한 키스가 폭포처럼 쏟아졌다. 

수인은 그저 헛웃음만 나왔지만 이 또한 행복했다. 시후의 따뜻한 품 안은 모든 순간이 마법 같았다. 

***

아침부터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분주했다. 쥐방울 드나들 듯 어찌나 정신을 빼내는지 눈에 수면안대까지 하고 누워있던 현진권이 발딱 일어나 앉았다. 

“아. 대체 아침마다 왜 이러는 거야?”

“여보. 잘 일어났어요. 얼른 일어나요. 월요일이잖아요.”

정민선은 안방에서 거실로, 또 주방으로 집안일 해주는 메이드와 둘이 정신을 쏙 빼놓고 있었다. 

소란스럽기가 도떼기시장 같아서 현진권은 눈살을 찌푸리며 일어나 실내화를 찾아 신고 거실로 나왔다. 

“아니. 이게 다 뭐야? 어디 피난이라도 가나?”

바리바리 보따리하며, 이제 곧 집을 떠날 것이 분명한 짐들이 현관 앞에 도열해 있었다. 

“호호호. 당신이 그런 농담을 다 할 줄 알아요?”

“이게 농담 같아? 이게 다 뭐야?”

정민선도 수북한 짐들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해도 좀 너무했나 하는 표정이 잠시 머물다 또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바삐 주방으로 달려갔다. 현진권은 머리가 아픈지 이마를 짚고 뒤로 물러섰다. 

“여보~ 아침 식사는 가서 해요.”

하루 이틀 이 상황인 건 아니었지만 현진권은 내과 의사로서 살았던 50년보다 지금이 더 시간에 쫓겼다. 더 닦달을 당하기 전에 이쯤에서 눈치껏 움직이는 게 낫다는 판단이 들었다. 

“이거 차 트렁크에 다 실어?”

“김 기사 들어오라고 했어요. 괜히 짐 나르다 엎어트리지 말고. 당신은 옷이나 갈아입어요.”

“내 참.”

1년 전만 해도 기산 대학병원 원장으로서 십여 명의 유능한 의사들을 이끌고 대학병원을 누볐다. 그랬던 현진권을 정민선은 짐이나 엎어트리는 모지리 취급을 할 줄이야. 

“그냥 두라니까요. 김 기사 오잖아요. 김 기사가 일 잘하니까. 당신은 저리 비켜요.”

“아. 나 참.”

현진권은 한쪽 끝으로 밀려나서 인상을 있는 대로 구겼다. 

“옷 안 입고 뭐해요? 면 100%로 된 옷만 입어요.”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심술쟁이같이 바락거리며 현진권은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그래도 정민선이 시키는 대로 면 100%짜리 옷을 찾아 입고 얌전하게 자동차에 올라앉았다. 정민선에게 모지리 취급을 당해도 이 피난민 행렬에 꼭 참석해야만 했다. 

일 잘한다고 정민선에게 칭찬을 받던 김 기사는 가뿐하게 모든 피난민 보따리를 시후의 집에 옮겨 놓았다. 

“도하야~”

정민선은 꾀꼬리로 둔갑을 한 목소리로 도하의 이름을 부르며 들어섰다. 시후는 출근 준비를 하다 거실로 나왔다. 

“오셨어요?”

“어. 어. 우리 도하는 일어났어? 아니면 아직 자?”

정민선은 무척이나 기대에 찬 얼굴로 물었다. 

“안 일어났어요. 아직.”

“하루 안 봤다고 내 눈이 다 짓물렀어. 우리 도하부터 봐야지, 안 되겠다.”

고양이 발 흉내를 내며 정민선은 도하의 방으로 향하다 문득 생각이 났던지 급히 화장실로 방향을 바꾸어 손을 씻고 옷을 털고 나왔다. 

“여보. 당신도 손부터 씻어요.”

“나 씻고 왔어.”

“아. 그냥 한 번 더 씻어요. 의사씩이나 되는 양반이 위생관념은.”

혀를 차려다 정민선은 도하가 어서 빨리 보고 싶어서 또 살금살금 도하의 방에 들어섰다. 

“어머니 오셨어요?”

도하의 기저귀를 갈아주던 수인이 웃으며 인사를 했다. 정민선은 자석에 이끌리는 철가루처럼 종종종 도하에게 다가가 만발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루 사이 또 큰 것 같네.”

“에이. 설마요.”

“아니야. 머리카락도 길어진 것 같고.”

잔디 인형처럼 이제 머리카락이 좀 올라온 정도인데도 정민선의 눈에는 조그만 차이도 크게 보였다. 

“수인아. 출근 준비해.”

“네. 어머니.”

“도하 조금만 더 자고 만나~”

새근거리며 잘 자는 도하를 확인하고 정민선은 주방으로 향했다. 

아침부터 바리바리 싸 온 보따리 중에 시후와 수인의 아침거리를 꺼내 재빠르게 아침상을 차렸다. 정민선이 분주하게 그릇에 옮겨 담고 데우고 그 야단인데, 현진권은 어느새 식탁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있었다. 

“여보여보. 이것 좀 날라요. 출근도 안 하는 사람이 뭐하러 자리 차지하고 앉아있대?”

현진권은 눈을 치뜨다가 슬그머니 눈을 내리고 의자를 밀고 일어나 정민선이 내미는 그릇을 받아들었다. 

수인이 쪼르르 나와서 인사를 했다.

“아버님 오셨어요.”

인사마저 정민선이 가로채며 수인에게 어서 아침을 먹으라 야단이었다. 

“수인아. 어서 앉아. 밥 먹어.”

수인이 국을 뜨려 하자 정민선은 수인을 밀어내었다. 수인은 이 일이 벌써 3개월째 이어지는 아침 행사였지만 현진권이 차려주는 아침을 앉아 먹는 일이 아직 힘들었다. 대선배 중에도 까마득히 보이지도 않는 선배였고, 대통령 주치의까지 지낸 분이었다. 

“아버님, 식사하세요.”

수인이 반찬을 나르는 현진권에게 슬며시 식사를 권하니, 정민선은 일언지하에 딱 잘라 버렸다. 

“어서 너희나 먹어. 천천히 꼭꼭 씹어 먹어라. 오늘은 샐러드가 아주 좋더라. 수인이 좋아하는 반건조 박대구이 해왔어. 어어. 여보, 거기 박대 좀 찢어 봐요. 수인이 먹게.”

정민선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며느리가 좋아하는 생선을 시아버지에게 발라 주라 명했다. 현진권도 수인이도 뜨악한 표정으로 서로를 보다 어색하게 눈길을 내렸다. 

그러나 현진권은 이제 이빨 빠진 호랑이 신세였으니, 젓가락을 집어 올려 조심스럽게 박대를 찔러댔다. 

“아유 잘하네~”

지나가다 현진권에게 날리는 정민선의 칭찬은 모두를 놀라게 했다. 예전 같으면 어림도 없는 상황이었다. 현진권이 식탁에 앉으면 입안의 혀처럼 정민선이 전부 해다 바쳤다. 

그걸 너무도 당연히 여기며 40년 가까이 살아온 현진권이었고, 그런 현진권과 정민선을 늘 보았던 시후는 달라진 두 사람 모습에 적응이 안 되었다. 

그건 수인이도 마찬가지였다. 언론에도 자주 등장했고, 권위 있는 학술포럼에도 강연자로 자주 나왔던 현진권을 수인은 기억했다. 인턴 레지던트 시절, 저 먼발치에서 병원장님으로 뵈었던 분이었다. 그런데 지금 수인에게 박대를 찢어주고 칭찬을 받는 모습, 너무 낯설기는 했다. 

“더 작게 찢으랴?”

“네? 아니에요. 아버님. 저 입 커요.”

수인이 거의 생선의 반 토막을 입에 욱여넣었다. 

그렇게 새벽부터 분주하게 보따리를 쌌던 정민선은 홀쭉해진 수인의 냉장고를 미어터지게 했다. 그리고는 비타민에 홍삼까지 출근하는 수인과 시후에게 먹였다. 

“다녀오겠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그럼 도하 잘 부탁드립니다.”

“어유. 얘. 별말을 다 한다. 어서 출근해.”

지극정성 열혈 정민선 덕에 수인과 시후는 홀가분하게 출근길에 올랐다. 

아들과 며느리를 출근시켜 놓고 정민선과 현진권은 아침을 먹었다. 도중 도하의 울음소리가 들리자 정민선은 로켓보다 빠르게 날아갔다. 

“날다람쥐가 따로 없구만.”

어찌나 빠르게 달려가는지 현진권은 정민선의 뒷모습을 보며 껄껄 웃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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