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날 밤을 책임져 (76)화 (76/88)

특별 외전 5화

시후는 자선 의원 수술실에서 마지막으로 수술 부위를 봉합하고 있었다. 마지막 한 땀까지 정성을 다해 마무리하고 시후가 고개를 들었다. 

“고생 많았어요. 현 선생님.”

“실장님도 고생하셨습니다.”

시후는 직접 수술한 트렌스젠더 환자를 입원실로 옮기는 일까지 도맡아 했다. 

“이거 미안해서 어떡하지. 내가 허리가 부실해서.”

“아닙니다. 원장님. 제가 또 허리 하나는 세계 월드급입니다. 하하하.”

화통하게 시후가 웃어주니 김정수 원장은 고마워서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시후는 긴 수술시간에 힘이 들만도 한데, 다른 환자 외래까지 보고 있었다. 

“세상에, 저런 남자가 어디 있어?”

박 간호사가 진료실 문이 열리자 자신의 남편이자 자선 의원 방사선사 실장에게 말했다.

“그러게. 우리 수인이가 아주 복이 많기는 하다. 같은 남자가 봐도 멋져. 인정.”

“난 완전 현 선생 왕 팬하려고. 어떻게 저렇게 똥 빼고 버릴 게 하나도 없니?”

“거참. 더하다가는 아주 수인이랑 머리끄덩이 잡고 싸울 일 생기겠다. 박 선생. 작작해.”

“아우. 수인이는 좋겠다. 저런 남자가 수인이라면 죽고 못 살잖아.”

박 간호사는 꿈꾸는 소녀같이 두 손을 맞잡고 진료 중인 시후를 감상했다. 

안 그래도 진료가 끝나자마자 수인이한테 죽고 못 사는 남자 현시후는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어. 자기야. 점심은 먹었어?”

-지금 막 먹었어요. 혼자만 고생시켜서 어떡해?

앞에 없지만 수인이 어떤 표정으로 말하는지 시후는 보이는 것 같았다. 미안해하는 얼굴 표정이 김정수 원장과 붕어빵인 수인일 게 빤했다. 

“오늘 수술 잘 됐어. 그리고 외래도 이제 끝났다. 곧 날아갑니다.”

-천천히 와요. 나 아버님이랑 바둑 두고 있어요. 이번 판 끝나려면 두 시간은 더 걸릴 거야.

수인의 말에 시후는 입을 틀어막았다. 

“얼른 도망가지. 너 아버지한테 왜 잡혔어? 아버지랑 바둑 두다 보면 유체이탈 하고 싶어진다고.”

-재미있어요. 그러니까 천천히 와요. 아니다. 어머니 심심하시니까. 빨리 와요.

시후가 자선 의원에서 의료봉사를 할 동안 수인은 시후 본가에서 효도 중이었다. 말이 효도였지, 실상은 극진한 대접을 받는 중이었다. 

시아버지 현진권과 바둑을 두는 동안 시어머니 정민선은 온갖 간식을 해다 바쳤다. 

“수인아. 감자전이 아주 바삭바삭해. 지금 먹어.”

“우와. 맛있겠다.”

“여보. 당신도 드시고 해요. 아이참. 이놈의 바둑판을 확!”

자기도 모르게 과격한 말이 툭 튀어나온 정민선이 입술을 말아 물었다. 

“알았어. 수인아, 잠시 휴전하자. 감자전 안 먹으며 바둑판 엎어질지 모르겠다.”

“네. 잠시 휴전해요.”

세 사람은 맛있게 감자전을 먹어가며 웃었다. 이런저런 흔하고 흔한 대화를 나누는데도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이사 한 집이 전에 살던 집보다 어떠니?”

“좋아요. 사실 어디에 살던 다 좋지만요.”

“그렇게 시후가 좋아?”

“그럼요.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인데요.”

수인이 서슴없이 말하는 말속에 시후에 대한 사랑의 깊이가 느껴졌다. 정민선은 빙그레 웃으며 수인에게 감자전을 더 권했다.

“너흰 싸울 일 없어?”

“있어요.”

질문을 했던 정민선이 화들짝 놀라서 눈이 동그래졌다. 생전 가도 싸우지 않으리라 생각해서 그런가. 싸운다는 말에 놀라워서 현진권도 수인을 쳐다보았다. 

“언제 싸우는데? 왜 싸우는데?”

“오빠가 자꾸 먹으라고 해서요. 저 이렇게 살찐 게 다 오빠가 하도 먹여서 그래요.”

입을 삐죽거리면서도 감자전을 맛있게 오물거리는 수인을 보고 그냥 웃음이 나왔다.

“잘 먹으니 좋은데 뭐. 그나저나 우리 손주 이제 곧 만날 생각에 내가 다 떨린다.”

정민선의 말에 갑자기 현진권이 큭, 하고 웃었다. 

“왜 웃어요?”

“저 끝 방, 애들 보여줬나?”

현진권의 말에 정민선의 눈이 예리하게 치솟았다. 

“뭔데요?”

“아니야. 별거. 그냥 하도 예뻐서. 하나둘 사다 보니까.”

정민선은 무척 부끄러워했지만 방 안에 가득 차 있는 아기 물건에 수인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게 다 뭐예요?”

“딸일지 아들일지 모르니까 두 개씩 샀지.”

옷이며 신발이며 백화점을 통째로 옮겨다 놓은 것처럼 양도 종류도 어마어마했다. 수인은 좋으면서도 이 상황이 웃겨서 배를 잡고 웃었다.

그러다 너무 웃었을까. 배가 단단히 뭉치며 모양이 앞으로 치솟았다. 

“어?”

수인은 천천히 몸을 돌려 거실을 걸었다. 한 발 한 발 내딛는데, 배가 쥐어짜이는 통증이 느껴졌다.

간신히 긴 거실을 걸어 소파까지 왔다. 털썩 주저앉는데 조금 전보다 더 통증이 몰려왔다. 아직 예정일이 이주일 남아있었다. 

이미 겉모습은 완벽하게 만삭의 임산부였지만, 출산이 가까워지니 그냥 느껴지는 가진통이겠거니 했다. 그런데 통증이 점점 심해져 가고 있었다. 

“어머니.”

“응?”

“저. 아무래도 병원에 가야 할 것 같아요.”

“응급실 호출?”

남편도 의사, 아들도 의사, 며느리까지 의사로 두고 사는 정민선이라 환자 호출, 응급실 호출이 먼저 나왔다.

“아니요. 어머니, 저 배 아파요.”

“뭐어? 어머. 여보~ 여보~ 시후아빠~”

정민선은 배 아프다는 수인의 말 한마디에 벌써 하얗게 질려서 방방 떴다. 현진권도 달려 나왔다. 

“어. 그래. 진통 시작이야? 몇 분 간격이냐?”

“모르겠어요. 거의 5분 간격인 것 같아요.”

“아니 지금 무슨 토론해요? 어머. 어떡해. 그래 119, 119 전화번호 몇 번이야? 어? 어머. 내 전화는 어디 있어?”

정민선은 휴대전화를 왼손에 쥐고 휴대전화를 찾아 뱅뱅 돌았다. 마침 구원투수처럼 시후가 등판했다. 

“시후야. 시후야. 큰일 났다. 수인이 배 아프대. 진통한대.”

“예? 김수인! 수인아!”

시후는 수인이 좋아하는 베이커리에서 빵을 한가득 사 들고 오다 내 던지고 달려들었다. 

“오빠.”

“라버 페인 몇 분 간격이야?”

“이제 5분.”

옆에서 벌벌 떨고 있던 정민선이 시후와 현진권 사이를 끼어들며 소리쳤다. 

“아니, 지금 뭐하는 거야? 빨리 병원부터 가자. 어서. 이러다 길에서 애 나오면 어떡해?”

“수인아. 움직일 수 있겠어?”

“그럼요. 가요.”

진통이 온 것 같은데 수인은 너무나 차분해 보였다. 시후는 수인을 끌어안고 조심조심 움직였다. 시후도 차분하게 대처하고는 있지만 손에는 차가운 땀이 났고,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어머니. 수인이 좀 잡아주세요.”

“그래그래. 넌 어서 운전이나 해.”

극심하게 몰려오는 진통이 심상치 않았다. 하지만 수인은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었다. 시후도 운전을 하면서 틈나면 돌아보았다. 수인의 얼굴에 핏기가 가시는 모습에 정신이 아득했다.

“수인아. 다 왔어. ER로 들어갈 거야.”

“응.”

의사로 드나들던 응급실에 환자로 베드에 눕고 보니 수인은 어색했다. 그런 수인을 내려다보며 시후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얼굴이었다. 

“수인아. 괜찮아?”

“아니. 안 괜찮아. 악-”

안 괜찮다는 수인의 말에 억지로 참고 있던 시후가 울음을 터트렸다. 

“어떡해. 수인아.”

“왜 울어요. 악-”

시후의 손을 잡은 수인은 고통에 몸부림을 쳤다. 극한의 고통이라 수인은 숨이 깔딱 넘어갔다. 수인을 붙잡고 시후는 거의 대성통곡 수준이었다. 저 때문에 수인이 혼자 고스란히 고통을 떠안고 있으니 미칠 것 같았다.

“미안해. 수인아. 아. 내가 미쳤다. 내가. 하. 어떡해. 아.”

수인을 너무 좋아해서, 너무 사랑해서 앞뒤 없이 덤벼들었다. 그저 수인을 반 닮고 자신을 반 닮은 아이가 얼마나 예쁠까, 그 생각이 앞섰다. 그런데 수인을 이런 고통 속에 오롯이 혼자 아프게 만들었다는 생각에 시후는 미칠 것 같이 괴로웠다.

“하아. 미안해. 수인아.”

“오빠. 자기야. 진정 좀 해.”

통증이 잦아들자 수인이 오열하는 시후를 되레 챙겼다.

“아~ 아. 수인아. 미안하다. 나 오늘 당장이라도 베섹토미 해야겠다. 하아.”

“어머 미쳤어. 왜 이래요?”

정관수술을 하겠다는 시후의 말에 놀라서 수인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러다 뒤틀리는 허리 통증으로 다시 풀썩 쓰러졌다.

“오빠. 현시후 씨. 정신 차리고 있어요. 아빠가 탯줄 잘라야 하니까.”

시후는 온갖 수술을 두려워하지 않고 해내는 일반외과 의사였다. 그런 시후에게 탯줄 자르는 일에 정신을 차리라고 말하고 나니 수인은 웃음이 나왔다. 

“이제 분만실 들어갑니다.”

수인의 손을 잡고 오열을 하는 시후에게 간호사가 말했다. 

드디어, 그리도 바라고 바라던 현시후의 금쪽같은 새끼, 시후와 수인의 유전자를 반반 짬뽕해서 만든 주니어 1호가 세상에 나왔다. 

초산임에도 불구하고 수인은 비명 두 마디에 순풍하고 아이를 밀어내었다. 주치의인 희윤이 입을 쩍 벌렸다. 

“8월 11일 오후 4시 7분 김수인 님 남아 출산하셨습니다.”

시계를 보고 있던 간호사가 출생 시간을 외쳤다. 그와 동시에 시후의 울음소리는 분만실을 떠나가게 울려 퍼졌다. 

희윤이 나머지 처치를 하는 동안, 간호사는 아기의 몸무게를 재어 외쳤다.

“김수인 님 아기 3.99키로그램입니다.”

“헉. 김수인 너 정말 대단하다. 어떻게 비명 두 마디 지르고 이 커다란 애를 순풍 낳았대?”

아직 아기 상태를 눈으로 보지 못한 수인이 애가 탔다.

“주니어. 어때?”

“너무 건강하다. 자. 받아.”

희윤은 아직 탯줄을 달고 있는 주니어 1호를 수인의 가슴에 올려놓았다. 옆에선 눈물범벅인 시후에게 탯줄 자를 가위가 주어졌다.

“선배님. 그만 우시고요.”

“어. 그래.”

“축하합니다. 시후 선배 똑 닮았네요.”

“그렇지? 아. 녀석. 태어나자마자 빛이 나네.”

이제야 여유가 생겼는지 시후가 웃으며 대꾸를 했다. 그리고 수인과 수인이 안고 있는 주니어를 끌어안았다.

“수인아. 사랑해. 사랑해. 고마워. 고마워. 수인아.”

“이것 봐요. 우리 주니어. 우리 주니어가 정말 세상에 나왔어요.”

“고맙다. 고맙다.”

수인은 시후의 키스에 눈물이 터졌다. 제 가슴에 안겨 꼬물거리는 주니어를 보니 눈물은 더없이 터져 나왔다. 수인은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남자 현시후와 그와 함께 만든 완벽한 존재 주니어를 품에 안고 있는 수인. 여자로서 이보다 더 행복한 순간을 만날 수 있을까. 수인은 지금 이 순간 세상 어느 누구보다 행복한 사람이었다. 

“오빠. 고마워요.”

이 행복을 수인에게 가져다준 시후. 그렇게 도망치고 달아나던 수인을 끝까지 끌어안던 현시후. 그가 아니었다면 이 행복 가질 수 있었을까. 수인은 시후를 뜨겁게 끌어안았다. 

“사랑해요. 현시후.”

“사랑해. 수인아.”

“사랑해. 주니어.”

시후와 수인, 그리고 그 둘이 만든 완벽한 주니어를 서로 꼭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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