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외전 4화
수인의 배에 오일을 꼼꼼하게 발라주며 시후가 흐뭇하게 웃었다.
“주니어 1호. 너 꽤 컸다?”
“주니어보다 내가 더 크게 생겼어요. 어떡해.”
수인이 울상이 되어 말했지만, 시후는 연신 싱글벙글거리며 배를 문질러 댔다.
“별걱정을 다한다. 당연히 체중 늘어나는 거지. 지금도 너무너무 예쁘니까 아무 걱정 마.”
시후가 걱정 말라니까 또 그게 마법처럼 마음에 위로가 되었다. 참 신기한 일이었다. 시후가 다 괜찮다고 하면 정말 괜찮은 것 같고, 예쁘다고 하니 자신감이 생겼다.
“점심은 뭐 먹을까?”
“오늘이 벌써 마지막 날이네.”
수인은 살짝 아쉬움이 들었다. 물론 어딜 가나 시후와 꼭 붙어 있으니 불만은 없었다. 하지만 일생일대 한 번뿐인 신혼여행이라 생각하니 살짝 기분이 그랬다.
“아. 얼른 집에 가고 싶다. 우리 집이 최고야. 그치?”
수인이 투덜거릴까 봐 시후는 연막작전을 막 펼쳤다. 그러나 시후와 함께 하는 모든 순간엔 바보가 되는 수인은 또 금세 웃는 얼굴이었다.
“그렇긴 하죠. 얼른 집에 가서 오빠 얼굴에 알로에 팩 좀 해야겠어요.”
“내 얼굴 많이 탔어?”
시후가 얼굴을 문질러 대며 물었다.
“내 발가락에 선블럭 바르지 말고 자기 얼굴에나 선블럭 발랐어야지. 이게 뭐예요? 새카맣게 다 탔잖아요.”
“구릿빛 남성미가 줄줄 흐르지 않냐?”
또 말을 해 무엇하리. 수인은 함께 웃으며 시후 기를 살려주게 될까 봐 입을 꼭 다물었다. 나와 줘야 하는 말이 나오지 않자 시후가 수인의 얼굴을 뚫어지게 보았다.
“왜 맞장구 안 쳐줘?”
“이제 안 해주려고요.”
단호한 수인의 말에 시후는 도둑이라도 맞은 얼굴로 더욱 들이밀었다.
“왜? 왜?”
“남성미 줄줄 흐른다고 하면 또 덮칠 거잖아요. 이제 그만~”
5일 동안 내내 침대에 붙어 있었던 것 같았다. 수인은 겨우 스노쿨링 한 번이 이번 신혼여행에서 해본 체험이 전부였다. 이렇게 뜨겁고 뜨거운 신혼여행은 끝이 났다.
***
시후는 집 앞 정원에서 하늘을 향해 허리를 쭉 펴고 일어났다. 한여름의 햇살은 무척이나 강렬했지만 시후의 얼굴엔 미소가 지어졌다.
“아이고. 허리야.”
밀짚모자까지 쓰고 목에 수건까지 두르고 아주 비장한 차림이었다. 커다란 키에 허리까지 굽혀가며 일을 하는데, 수인의 차가 주차장으로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시후는 그동안 수확해 놓은 채소 광주리를 들어 올렸다. 얼른 수인의 얼굴을 보고 싶은 마음에 시후는 한달음에 수인의 차 쪽으로 다가갔다.
“다녀왔습니다~”
수인이 부른 배를 안고 힘겹게 차에서 내렸다.
“어서 와.”
“하하하. 오빠. 완전 농부 같아요.”
시후가 옆에 낀 광주리를 들춰보며 수인이 웃어댔다. 시후는 주르륵 흐르는 땀방울을 수건에 닦았다.
“토마토랑 오이 금방 땄어. 얼른 들어가서 먹자.”
“진짜 오빠 대단해. 나는 처음에 농담하는 줄 알았어요.”
이제 꽤 배가 부른 수인이 뒤뚱거리며 앞서 걸었다. 시후는 광주리를 들고, 수인의 가방까지 받아들고 뒤를 따랐다.
“나 한다면 하는 남자야.”
“그건 누구보다 내가 잘 알지. 근데 진짜 오빠가 저 많은 텃밭을 가꿀 거라고 상상도 못 했어요.”
시후는 봄부터 정원 절반을 텃밭으로 가꾸기 시작했다. 수인이와 주니어 1호에게 신선한 야채와 과일을 꼭 먹이겠다며 선언을 했다.
수인은 이것저것 농기구와 모종들을 사기에 그러다 말 줄 알았다. 하지만 그 바쁜 와중에도 시후는 아침이면 물을 주고, 퇴근을 하면 풀을 뽑았다. 그러다 오늘은 휴일이었고, 수인은 응급실 콜을 받아 잠시 병원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샤워할 거야?”
“지금 샤워하려고요.”
“도와줘?”
시후는 방금 따온 채소 광주리를 주방에 가져다 놓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
“싫은 데요~”
“왜 싫은데요? 위험하니까 내가 샤워시켜줄게~”
또 능글거리며 다가오는 통에 수인은 얼른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시후는 그사이 다른 욕실에서 샤워를 번개같이 끝내고 나와서 수인을 위해 토마토 주스를 갈았다.
개운하게 샤워를 하고 펑퍼짐한 원피스를 입은 수인이 거실로 나왔다.
“토마토 주스.”
“맛있겠다. 우리 남편 진짜 못 하는 게 없어.”
“그치?”
둘은 또 잠시 떨어져 있던 3시간을 단박에 채워 넣고도 남을 키스를 했다. 그때 밖에서 경적 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왔다.
“왔다.”
“암튼 등장도 딱 눈치 없이 하는지, 와. 대단하다. 대단해.”
시후는 키스가 아쉬워서 부륵 화까지 내었다.
“일어나요. 빨리. 핵폭탄급 발표를 한다잖아요.”
“별 시답지 않은 내용이기만 해봐. 내 오늘 저 김재건 귓구멍을 후벼 파줄 테니.”
투덜거리며 시후는 소파에서 일어나 손님을 맞으러 나갔다. 오늘 재건과 희윤이 대대적인 핵폭탄급 발표를 하겠다며 찾아왔다.
벌써 등장부터가 요란하기 그지없었다.
“아 더워. 아 더워.”
“여름인데 안 덥냐?”
시비 같은 인사에 재건은 그래도 정신이 반 풀린 사람처럼 웃어 보였다.
“선배님, 저 왔어요.”
희윤이 그래도 시후에게 인사를 건네니 시후는 마지못해 미소를 지었다.
“어서 와. 뭘 또 이렇게 많이 사와?”
“걱정 마세요. 다 먹고 갈 거니까요.”
희윤은 두 손 가득 맛있는 음식을 사 들고 와서는 너스레를 떨어댔다. 희윤이 과하게 사 온 음식을 보며 수인은 놀라서 물었다.
“다이어트 한다고 잘 먹지도 않는 애가 웬일이야?”
“그럴 일이 있어. 어서 들어가자. 와. 쪄 죽겠다. 이러다가.”
티격태격해도 마주치면 즐거운 네 사람이었다. 수인은 부른 배를 끌어안고 웃으며 손님을 집안으로 안내했다.
시후는 희윤이 사 온 음식을 냉장고에 착실하게 정리해 넣었다. 그리고 조금 전 막 갈아놓은 토마토 주스를 권했다.
“음. 진짜 신선하네. 진짜 선배님이 텃밭 가꾸고 매일 이렇게 수인이 먹이시는 거예요?”
“그럼.”
자부심이 가득한 얼굴로 시후가 대답을 했다. 그러자 희윤이 슬그머니 눈이 찢어져서는 재건을 째려보았다.
“알았어. 알았다. 거 우리도 베란다에다 뭐라도 키워보자. 됐지?”
“선인장도 다 말려 죽이는 사람이 텃밭 할 수 있겠어?”
희윤이 눈을 내리깔고 타박하자 재건은 비장한 얼굴로 대꾸했다.
“지금 내가 뭔들 못하겠냐. 말만 해. 소도 한 마리 키울까?”
“야. 대체 무슨 발표기에 남의 집에 와서 이러는데? 그냥 너희 둘이 발표하고 박수 치면 안 되는 일이야?”
시후가 괜히 심술을 부리듯 말하자 재건이 기침 소리를 내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발표하자. 거 긴장도 좀 해.”
재건의 말에 시후가 콧방귀를 뀌었다. 수인은 또 무슨 어처구니없는 일을 벌였을지 궁금해서 재건과 희윤을 번갈아 보았다.
“우리. 희윤이가.”
“어머~”
알맹이는 나오지도 않았는데 희윤이가 얼굴이 빨개져서는 호들갑을 떨어댔다.
“뭐?”
“희윤이가. 드디어 임신을 했다!”
“뭐?”
수인은 옆에 앉은 희윤을 흔들어댔다. 희윤은 행복하게 흔들리며 웃어댔다.
“아이는 절대 안 갖겠다던 김희윤이?”
희윤이 부끄러워 웃어대는데, 재건은 허리춤에 두 팔을 올려붙이고 입을 빵긋했다.
“딱 한 번. 딱 한방에 생겼어.”
어찌나 자랑스러워하는지, 재건은 마치 올림픽에서 금메달이라도 딴 사람 같았다.
“이야~ 능력자~”
시후가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자 재건의 어깨가 천장에 닿을 만치 올라갔다. 재건을 구박하던 모습은 또 온데간데없고, 두 남자는 얼싸안고 야단을 떨어댔다.
“절대 안 넘어간다며 울고불고하더니.”
“야. 이건 도박판보다 아찔했다. 딱 한 번만 기회를 준다잖아. 저 김희윤이. 와. 그런데 그 한 번에 딱! 응? 딱!”
역시 범상치 않은 커플이기는 했다. 하도 아이를 갖자고 졸라대니 희윤이 딱 한 번 기회를 준다고 했고, 그 한 번에 아이가 생겼다.
울컥한 지 재건이 콧잔등에 엄지와 검지를 올리고 감정을 다스렸다.
“진짜 대단해요. 희윤이 어떻게 설득했어요? 얘가 아주 고래 심줄 같은 앤데?”
수인의 말에 희윤이 인상을 팍 구겼다.
“말도 마. 얼마나 울고 매달리는지, 내가 미칠 것 같더라.”
“그러게 그냥 가지면 되지. 남편을 울리고 그러냐?”
“어머? 분위기 왜 이상하게 몰고 가?”
희윤이 제 편을 아무도 들어주지 않으니 섭섭한 얼굴인데, 재건은 한술 더 했다.
“나. 단식 투쟁도 했어.”
“이런!”
재건의 실토에 시후는 기름을 끼얹었다. 활활 타오르는 감정에 또 재건은 콧잔등을 움켜잡았다.
“딱 2끼 굶어놓고 단식 투쟁이래~ 와. 미치겠다.”
“아. 됐고. 나도 드디어 아빠 된다. 나도. 아빠 된다고. 현시후. 나도 드디어 아빠 된다.”
재건이 감격에 울컥하자 좀 슬퍼야 하는데, 재건의 표정은 코미디 같았다.
“축하해.”
“축하해요. 선배님.”
딩크족으로 평생 살겠다던 희윤이 마음을 바꿔 먹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희윤은 늘 바쁜 엄마 때문에 외롭게 자라서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 희윤과 뜻을 함께 했던 재건도 아이에 대해 생각조차 없이 살던 남자였다. 그런데 절친 시후와 수인의 모습은 많은 생각을 갖게 만들었다.
“처음엔 이 사람 포기시키려고 했던 내 수작이었지. 근데 막상 아기가 생겼다는 걸 확인하는데, 나 울었잖아. 너무 감동적이더라.”
매일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확인해 주며 사는 산부인과 의사 김희윤이었다. 직접 그 행복을 느껴보니 이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지였다.
“아직 우리도 아이를 낳은 것이 아니라 단정할 수 없지만, 분명한 건 아기로 인해 우리가 완벽한 가족이 되는 건 맞는다는 거야.”
“그래. 맞아. 완벽한 가족.”
시후는 수인의 말에 동의하며 수인의 정수리에 입을 맞췄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재건이 슬그머니 희윤의 정수리에 입을 가져다 댔다.
“뭐해?”
“어? 아. 아니야. 아무것도.”
따라 하다 민망해진 재건이 먼 산을 보자, 희윤이 눈을 부릅떴다.
“또 정수리 냄새난다고 그러려고 그랬지?”
“아~니야! 그런 거. 넌 아무튼. 김희윤. 넌 왜 이렇게 눈치가 없어?”
재건이 너무 정색을 하며 말하기에 모두가 화들짝 놀랐다. 그리고 터지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어서 집이 떠나가게 웃어댔다.
“너무 행복하다.”
수인은 저절로 행복하다는 말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그렇게 뭘 해도 웃음을 주는 친구들, 그리고 앞으로 태어날 그들의 주니어들, 행복은 그리 멀리 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