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외전 1화
족두리를 쓰고 연지곤지를 찍고 나타난 수인을 보고 시후는 또 입이 쩍 벌어졌다.
“히야~ 선녀가 따로 없네. 수인 선녀.”
“누가 봐요. 왜 이래요?”
누가 본다는 수인의 말에 시후는 슬그머니 수인을 끌어안다가 주변을 쓱 돌아보았다. 폐백준비로 스텝들은 다 분주했고, 시후는 은근하게 미소를 지었다.
“나무꾼이 말이야. 왜 선녀 날개옷을 훔치는 그런 극단적인 행동을 했는지 이제야 이해가 간다.”
“그건 또 무슨 말이에요?”
“나는 선녀와 나무꾼 읽으면서 도무지 이해가 안 갔었거든.”
또 무슨 엉뚱한 이야기로 자신을 기겁시키려는지 벌써부터 수인은 떨렸다.
“한복이 또 그런 음, 그런 설렘을 주네. 음?”
“어? 오빠, 내 족두리 내려와요.”
스르륵 이마 위로 내려오는 족두리를 시후가 올려주며 수인의 입술에 ‘쪽’ 하고 뽀뽀를 했다.
그런 둘을 향해 스텝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입장하실게요.”
그제야 뜨겁게 달라붙었던 시후의 시선이 수인에게서 떨어졌다.
현진권과 정민선은 곱게 한복을 입고 마주 선 시후와 수인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대추와 밤을 집어 덕담과 함께 던져주려는 찰나, 시후가 끼어들었다.
“되도록 많이 던져주세요.”
눈썹을 실룩거리기까지 하는 시후를 보고 수인은 기가 막혔다.
“그래. 건강이 최고다. 그러하니 건강 생각하면서 다복한 가정 이루길 바란다. 당신도 한마디 해. 결혼식 준비하느라 제일 힘들었던 사람이잖아.”
현진권이 정민선을 돌아보며 말했다. 세상 무뚝뚝한 남편이 이리도 살뜰하게 챙겨주니 정민선은 요즘 사는 재미가 쏠쏠했다.
“시후야. 수인아. 둘이 지금처럼 다정하게 정답게, 서로 위하면서 행복하게 살아. 그거면 돼.”
정민선은 그동안 욕심을 부렸던 자신이 부끄러워서 말끝을 흐렸다.
저리도 서로에게 죽고 못 사는 두 아이에게 큰 죄를 지었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수인이 때문에 집안 분위기는 더더욱 살가워졌으니 미안한 마음은 더 컸다.
“네. 잘 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 정민선의 마음을 안다는 듯 수인은 예쁘게 웃어 보였다.
드디어 모든 결혼식 순서가 끝이 났다. 웨딩카 운전을 굳이 자처하고 나선 재건과 희윤이 대기 중이었다.
여러 사람의 인사를 받느라 시간이 자꾸 지체되고 있으니 재건이 나섰다.
“자. 여러분. 이제 신혼여행 시간이 촉박하네요. 인사는 신혼여행 다녀와서 마저 하시죠.”
“어. 그래. 몇 시 비행기야?”
김정수 원장이 수인의 눈가에 촉촉하게 맺힌 눈물을 닦아주며 물었다.
“음. 그러니까.”
“오후 7시 비행기에요. 원장님.”
역시 재건을 채워주는 건 희윤이었다. 그사이 언제 또 준비를 했던지 정민선은 가방 하나를 얼른 수인의 손에 쥐여주었다.
“수인아. 가다가 먹어. 오늘 식사 제대로 못 했잖아.”
“어머니~ 감사해요.”
“어서 가. 응. 어서 가서 푹 쉬어. 시후야. 오늘은 무조건 쉬어. 응?”
정민선의 말에 시후는 눈이 동그래져서는 헛기침을 해댔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들킨 사람처럼 놀랐기에 재건이 또 슬쩍 끼어들었다.
“에이 어머니. 이미 할 거 다 했는데 뭐 또 하려고요?”
“응?”
분위기가 요상하고 싸늘해지자 희윤이 재건을 낚아채서 운전석에 밀어 넣었다.
“죄송해요. 우리 신랑이 좀 눈치가.”
“하하하. 저희 정말 이제 정말 갑니다. 잘 다녀오겠습니다.”
우렁찬 목소리로 시후가 마무리를 하며 차에 올랐다. 시후와 수인의 가족들, 친구들이 배웅을 하며 손을 힘차게 흔들어댔다.
카레이서를 꿈꾸는 재건이 차를 출발시켰다. 연신 손을 흔들어대던 시후는 이제야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며 운전석에 탄 재건을 향해 소리를 빽 질렀다.
“야! 김재건! 아우. 후. 나 아직도 땀이 난다.”
“왜? 덥냐? 거기 뒤에 에어컨 안 나와?”
“아우. 내가 말을 말자. 말을.”
시후가 방방 떠서 자동차 천장에 닿을 듯 뛰니, 수인은 배꼽을 잡고 웃었다.
“자기야 봤지? 어머니 당황해하시는 거.”
“음. 봤죠. 나도 늘 당황하긴 하는데.”
수인이 연신 웃으며 대답을 했고, 룸미러로 힐끔거리던 재건이 또 끼어들었다.
“어머니 무슨 일 있으셔?”
“아. 나~”
시후가 속이 탁 터지는 탄식을 내어 뱉으니 희윤이 대신 사과를 했다.
“죄송해요. 저는요. 빨리 신약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눈치 생기는 약.”
“그런 신약 나오면 얼마가 됐든. 보험이 안 돼도 내가 사줄게. 하. 진짜 저걸 친구라고.”
뒷자리에서 시후가 있는 대로 불을 뿜어대는데 재건은 태연하게 희윤에게 물었다.
“누구?”
재건 때문에 웨딩카는 웃음바다가 되었다.
그렇게 도착한 공항, 이제 재건과 희윤과도 작별 시간이었다.
“조심해서 다녀와. 너처럼 무딘 산모는 특히. 주치의로서 하는 말이니 꼭 새겨들어라.”
희윤이 수인을 꼭 끌어안으며 산부인과 의사로서, 친구로서 주의를 주었다.
“알았어. 무슨 일 있지는 않겠지만, 내 남편이 의사잖아. 너무 걱정하지 마.”
수인이도 장난을 치며 받아쳤다.
“그 남편이 제일 위험인물인데 지금 얘가 뭐라는 거야?”
“그치? 그렇긴 해.”
그렇게 말하며 수인이 시후를 돌아보았다. 이미 남자들은 인사가 끝나도 벌써부터 끝났는지 두 여자가 끌어안고 길고 긴 인사를 하는 모습을 심각하게 보고 있었다.
“그러다 같이 간다고 하지는 말자.”
시후가 불만을 숨기지 못한 얼굴로 말하자 희윤이 웃으며 수인의 손을 건네주었다.
“선배님, 임신 중기이기는 하지만 너무 무리해서 관광하지는 마세요.”
“관광? 그딴 거 예정에 없는데?”
시후의 대답에 수인은 현기증이 일어서 이마를 짚었다.
이제 드디어 둘만 남게 된 시간. 수인은 비행기를 기다리며 어두워져 가는 창밖을 쳐다보았다. 활주로를 힘차게 날아오르는 비행기들이 보였다.
“우리도 참 줄기차게 달렸네요.”
“그러게. 김수인한테 줄기차게 달려와 보니 여기군.”
시후도 그동안의 일들이 떠오르는 모양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와인 두 병을 숨기고 찾아와 유혹하던 수인의 모습부터, 미친 듯이 도망만 치던 수인의 모습도, 그리고 서로가 안타까워 흘리던 눈물까지. 그사이 참 많은 일들이 수인과 시후 사이에 있었다.
“저 비행기들 좀 봐요. 활주로를 힘차게 달려야 날아오를 수 있는 것처럼, 우리 인생도 그런 것 같아요.”
수인의 이야기에 시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우리 열심히 날자.”
시후가 커다랗고 따뜻한 손바닥을 수인 앞에 내밀었다. 수인은 시후의 손바닥에 착! 소리를 내어가며 자신의 손을 겹쳤다.
“응. 열심히 날아요.”
너무 행복한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닿을 듯 닿지 않아 애를 태우던 두 사람이 이제 두 손을 꼭 잡고 앞으로의 시간을 함께 하자는 약속을 한 날이었다.
게다가 두 사람을 꽁꽁 묶어준 ‘주니어 1호’가 수인의 배속에 떡하니 자리를 잡아주었다. 이보다 더한 행복이 있을까. 수인은 너무 행복해서 이것이 꿈이 아니기를 바랐다.
***
실링팬의 바람이 간질간질 불어왔다. 시어머니 정민선이 심사숙고해서 예약했던 신혼여행지는 그야말로 환상의 나라였다. 태평양 한가운데 더운 곳이었지만 원초의 아담과 이브가 되어도 아무도 볼 수 없는 프라이빗한 곳이었다.
얇은 이불 한 자락으로 몸을 가리고 잠이든 수인이 눈을 떴다. 분명 옆에 꼭 붙어 있어야 할 시후가 보이지 않기에 수인은 살짝 무거운 몸을 일으켜 창밖을 두리번거렸다.
원초의 아담이 되어 버린 시후가 넓은 인피니티 풀에서 수영을 하고 있었다.
“어우. 야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으로 저 끝에서 이 끝까지 멋지게 수영을 하는 모습이 한 마리의 물개와 같았다.
수인은 가벼운 옷차림으로 건물을 나섰다. 선배드에 몸을 기대앉아 수영하고 있는 시후를 바라보았다. 매일 마주하는 시후인데도 아직 시후를 보면 심장이 팔랑거리며 떨려왔다.
질기고 질기게 12년이나 짝사랑을 했던 남자였다. 작년부터는 두 사람이 서로 마주 보며 사랑하고 있었다.
더구나 둘 사이에 이제 ‘주니어 1호’도 생긴 마당이었다. 그런데도 아직도 여전히 시후만 보면 수인은 헤벌쭉 입이 벌어졌고, 눈이 반짝거렸다. 지독한 짝사랑은 후유증도 대단하게 남긴 듯했다.
“멋지지?”
능글거리며 어느새 수인의 감정을 포착해 낸 시후가 물을 튀기며 웃어댔다.
“엄청 멋져요.”
“더 멋진 거 보여줄까?”
머리를 온전히 뒤로 넘기는데 작열하는 태평양 햇빛을 받아 시후의 얼굴은 온통 빛으로 물들었다.
“해봐요. 점수 매길 테니까.”
수인도 그런 시후에 손뼉을 마주쳤다. 그러자 전력을 다해 버터플라이를 해보이는 시후의 몸매가 멋지게 풀장을 갈랐다.
저도 모르게 박수를 치며 웃고 있는 수인은 아무리 봐도 시후의 사생팬 같았다. 물론 사생활을 침해하는 극성을 떠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아주 꽤 중증인 건 확실했다.
시후가 풀을 정확하게 두 바퀴 가르며 수영을 마쳤다. 그리고 귀에 물을 털며 한발로 껑충껑충 뛰는 모습에도 수인은 박수를 쳐댔다.
“몇 점?”
“백 점 만점에 99점!”
이미 물 밖으로 튀어 오른 시후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다가왔다.
“왜? 왜 만점이 아닌데?”
“음. 두 바퀴째 돌면서 나랑 눈이 마주쳤잖아요. 집중력에서 마이너스 1점.”
수인은 혀를 쏙 내어 물고 웃었다.
“그건 팬서비스잖아. 안 돼. 다시 점수 매겨.”
다시금 풀로 뛰어들 기세이기에 수인이 그의 손목을 잡았다.
“알았어요. 백 점 만점에 2백 점. 어때요?”
“심사 아주 공정한데?”
어느새 흠뻑 젖은 몸으로 수인을 끌어안아 버렸다. 수인은 얇게 입은 옷이 젖어 들자 소란스럽게 호들갑을 떨었다.
“아이 뭐야. 다 젖었잖아요.”
“그러게. 아우 야해. 김수인. 이게 뭐야? 그렇게 날 유혹하고 싶었냐? 아우. 야해가지고.”
약을 바짝 올리며 시후는 도망치듯 건물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