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날 밤을 책임져 (71)화 (71/88)

외전 3화

양가 부모님의 상견례 자리에서 금쪽같은 손자 이슈까지 터트려 버리고 나니 정말 결혼식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양가 통틀어 엄마는 정민선 하나였기에 정민선은 지금 누구보다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일하는 수인을 대신하고, 친정엄마를 대신해서 정민선은 예식장 계약을 하고 웨딩 플래너를 만나야했다. 

이미 함께 살고 있으니 색다르게 준비할 살림은 없었지만 정민선은 아들 시후와 며느리 수인을 대신해 신혼여행지까지 섭외하느라 코피를 다 흘릴 지경이었다.

“아니, 누가 보면 당신이 재혼하는 줄 알겠어.”

“안 그래도 내 친구들이 다 그래요. 그러면 어때요. 애들이 바쁜걸.”

“이러다 손자 녀석도 당신이 키워야 하는 거 아닌가?”

현진권은 은근히 아내 정민선을 걱정하는 눈빛을 보내왔다.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인지, 40년을 넘게 살아도 무뚝뚝한 남편 현진권에게 그런 눈빛은 또 처음 받아보는 것 같았다.

“당연히 내가. 아니 우리가 키워야죠. 일반외과 의사 며느리는 아무나 들여요? 그만한 각오는 돼 있어야 시어머니 자격 되는 거 아닌가?”

“그렇기는 하지만. 그래도 당신 나이가 있잖아.”

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인가. 정민선은 갑자기 울컥해졌다. 

“당신이 그런 말도 할 줄 알아요?”

“내가 무슨 말을 했는데? 거. 뭐 시후 녀석이 하도 지 엄마 고생한다고 그러니까. 뭐. 그런 거지.”

말을 겉절이 비비듯 설렁설렁 버무렸지만 정민선은 너무 기분이 좋았다. 이게 다 복덩이 수인이 덕분인 것 같았다. 

어쨌거나 정민선의 코피 투혼으로 진행된 결혼식이 이제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수인은 이미 가봉해 둔 웨딩드레스가 안 맞을까 봐 걱정이 태산이었다. 

“나 오늘부터 조금만 먹으려고요.”

시무룩한 얼굴로 그 좋아하는 소고기를 슬쩍 밀어내는 수인이었다. 시후는 화들짝 놀라서 다시 수인 앞으로 소고기를 밀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이렇게 자꾸 살쪄서 웨딩드레스 안 맞으면 어떡해요?”

얼굴이 시무룩한 수인의 그 모습마저도 예뻐 보여 시후 눈에는 꿀이 뚝뚝 떨어졌다. 고개를 세차게 저어주며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걱정 마. 그까짓 것 안 맞으면 다시 사면되고. 지금은 오로지 자기 몸하고 내 금쪽같은 새끼 생각만 하자. 지금 잘 먹어둬야 엄마도 애기도 건강하지.”

“안 봐도 오빠 닮아서 건강하겠죠.”

“그렇긴 하지. 내 유전자가 좀 쎄긴 해.”

갑자기 유전자 부심은 또 무얼까. 이 남자 하여간 한 마디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앞에 앉은 수인은 자꾸 입안에 고이는 침과 사투 중이었다. 

“식기 전에 먹어. 나는 자기 먹는 것만 봐도 좋아 죽겠다. 날 봐서 먹어 응?”

“아. 진짜. 아직 애기는 요만한데 난 만삭이잖아요.”

몸매가 살짝 둥글해지긴 했지만 시후 눈에는 뭘 해도 예뻐 죽겠는 그냥 김수인일 뿐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시후와 수인의 유전자 절반씩 짬뽕해서 만든 소중한 아기가 예쁜 수인의 뱃속에 들어있으니 시후는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가 맞았다. 

“뭐 어때. 먹어. 응? 한 점만 더 먹어. 응?”

굳이 입 앞에 고기를 대령하는 통에 수인은 눈을 질금 감고 고기를 받아 씹었다. 

“살찔 걱정 같은 거 하지 마. 이게 보통 일이야? 한 생명을 만들어 내는 숭고한 일이잖아. 나는 자기한테 너무 고마워. 할 수 있으면 내가 하고 싶다 진짜. 내가 대신 해줄 수 없어서 너무 미안하고 그래서 더 고맙고 그래.”

고기 덜 먹겠다는 그 한마디에 또 격해져서 시후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말했다. 이런 남자가 왜 이 나이 되도록 결혼 생각도 안 하고 있었던 건지 정말 미스터리 하다고 수인은 생각했다.  

“알았어요. 먹어요. 먹어.”

항복한 듯 수인이 한숨까지 내 쉬었다. 

결국 결혼식 당일, 웨딩드레스는 아주 타이트하게 수인의 몸을 감쌌고, 보는 이들 마다 숨죽여 키득 웃었다. 그중에 절친 희윤은 배꼽까지 잡고 웃었다.

“야. 웨딩드레스가 무슨 발레복이냐? 왜 이리 쫙 달라붙었어?”

“그러게. 이거 맞출 때 치수 재는 언니가 나를 너무 과신한 거지.”

놀릴 마음이 있었던 건 아니고, 워낙 친하다 보니 좀 솔직한 편인 희윤이 슬그머니 목소리를 높였다.

“입덧도 없다며? 너 완전 임신 체질 아니냐?”

“신기해. 오빠가 테스트 해보자는 말 안 했으면 몰랐을 뻔했어.”

말해 놓고도 우스운지 수인이 킥킥거렸다. 수인이 작정하고 시후를 유혹했던 그 밤에도 무지하게 무작정 덤볐던 수인이었고, 그 후 시후가 임신하고 튀려는 거 아니냐며 뒷목 잡는 이야기를 했을 때도 수인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그러니 연애도 못 해본 티를 줄줄 흘리는 수인을 시후가 아니었더라면 어쩔 뻔했는지 생각하니 그저 웃음만 나왔다. 

“내 의사 생활 중에 딱 그런 환자 2명 봤다. 임신인 줄도 모르고 자기 체했다며 배 아프다고 응급실 와서 애 낳은 환자, 그리고 너.”

희윤이 손가락질을 해대며 웃으니 수인이 정색을 했다. 

“내가 왜? 그냥 좀 무딘 사람도 있는 거지 뭘 그렇게 다 예민하게 살아야 되냐?”

“아이고 말을 말자. 그래도 시후 선배가 똘똘해서 다행이다. 아무튼 축하한다. 김수인.”

얼굴이 화끈해진 수인은 연신 손 부채질을 해댔다. 그나저나 조금 전까지 계속 드나들던 시후가 보이지 않아 수인은 궁금했다. 

그 시간, 시후는 손님들께 인사하느라 바쁜 가운데 갑자기 나타난 남승우를 마주하고 있었다. 그가 의료원에 찾아온 지도 벌써 1년 가까이 되었으니 그 사이 두 남자의 상황은 제법 많이 달라져 있었다. 남승우는 시후에게 먼저 악수를 청했다.

“축하합니다.”

“네. 감사합니다.”

시후도 웃으며 남승우의 손을 잡았다. 두 남자는 한동안 말없이 창밖을 쳐다보았다. 그러다 남승우가 말을 먼저 꺼냈다.

“현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 덕분에 도희하고 결혼할 수 있었습니다.”

“인연은 다 따로 있는 거죠. 저는 그날 남승우 씨 보는 순간 느꼈습니다.”

“그랬나요? 도희에게 내야 할 용기를 현 선생님한테 내다가 혼이 났죠.”

그날이 떠오르는 두 남자는 피식 웃었다. 도희에 대한 사랑을 이상한 방향으로 잡아가던 남승우에게 시후는 꽤 독하게 일침을 가했었다. 

“결혼식에 일부러 안 갔습니다. 미안합니다.”

시후는 초대장을 받아 놓고도 가지 않은 일을 사과했다. 그러자 남승우가 미소를 지었다.

“괜찮습니다. 저희도 초대장 보내면서 망설였습니다. 도희가 현 선생님께 미안한 부분도 많고, 또 서로 민망하기도 하니까요.”

“네.”

그리고 또 두 남자 사이에 정적이 흘렀지만 이번에도 남승우가 또 말을 이었다.

“도희 잘 지냅니다. 딸이 도희 닮았어요.”

“좋으시겠습니다. 저도 이제 곧 아빠 됩니다. 하하하하.”

“아. 그러시군요. 축하합니다.”

“네. 감사합니다. 하하하하.”

두 남자는 이렇게 서로를 축하해 주며 인연의 고리를 마무리하였다. 남승우는 결혼식에 앞서 시후에게 인사만 한 채로 돌아갔다. 시후는 돌아서서 걸어가는 남승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예전에 수인에게 가고 싶지만 용기 없던 자신의 모습과 닮아있던 남승우였다. 하지만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지독하게 간절하다면 꼭 용기를 내야 한다는 걸 수인을 사랑하게 되면서 비로소 시후는 알게 되었다. 

그 간절함이 없었더라면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지 못했을 테고, 밀어만 내는 수인에게 그냥 밀려났더라면 지금 이 행복 느끼지 못한 채 살았을 터였다. 그런 생각을 하니 가슴이 한없이 벅차올랐다. 뻐근한 심장을 주먹으로 툭툭 치고 있는데 재건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여기서 뭐 해? 다들 너 찾고 난리 났다.”

“그래? 왜?”

“그런 거지. 갑자기 신랑 입장! 하는데 막 뒤돌아서 달려 도망가고 싶은 뭐 그런 거?”

실없는 소리라면 재건에게 빼놓을 수 없는 중요 키워드였지만 시후는 눈살을 찌푸렸다. 얼마나 학수고대하던 날인데 뭘 뒤돌아서 도망을 친다는 건지. 그게 제정신에 할 수 있는 일일까. 시후는 시답지 않은 소리를 하는 재건의 등짝을 한 대 쳤다.

“미쳤냐? 어딜 도망가? 내 심장이 저기 있고, 더구나 그 심장 안에 내 금쪽같은 새끼도 있는데.”

“아. 현시후! 너 원래 이랬냐?”

느끼한 말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나온 말인데 자신의 귀에는 꽤 거슬렸는지 재건이 귀를 막 후벼 팠다.

“하! 김재건. 너는 편하게 결혼해서 그 심정 모르는 거야. 난 산전수전 공중전에 우주전까지 치르고 무사히 귀환한 전투 영웅이란 말이다.”

그리곤 앞서 당당한 걸음으로 걸어갔다. 재건이 낄낄 웃으며 얼른 따라붙었다. 그리곤 또 실없는 소리를 해대고 있었다.

“무사히 귀환한 전투 영웅인지는 나는 모르겠고, 아무튼 현시후 추진력은 인정. 언제 그렇게 빨리 애는 만들었냐?”

“말도 마라. 진짜 이렇게 열심히 뭔가 해본 적이 내 인생에서 있었나 싶을 정도로 열심히 했다.”

“와! 쩔어. 와, 부러우면 지는 거랬는데 부럽다.”

그렇게 절친 재건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으며 시후는 신랑 입장을 위해 버진로드 앞에 섰다. 뒤따라온 수인과 수인의 아버지 김정수 원장이 눈앞에 보였다. 

“오빠.”

“이야. 왜 이렇게 예뻐? 나 입장하다가 다리 풀려서 넘어지겠다.”

아예 옆에선 김정수 원장이 보이지 않는지 시후의 느끼한 말에 김정수 원장은 큼큼 헛기침을 해댔다.

“아버님. 안 그렇습니까? 수인이 너무 예뻐서 제가 정신을 못 차리지 말입니다.”

“현 선생.”

“네?”

“출발해.”

김정수는 수인에게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시후를 보며 흐뭇했지만 예식은 시작되었다. 김정수의 출발하라는 말에 시후가 얼른 돌아서서 당당하고 멋진 걸음으로 한달음에 입장을 마쳤다. 

어찌나 긴 다리로 금세 들어와 버렸는지 하객들은 웃어댔다. 그리고 이어 신부 입장을 외쳤고,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수인과 김정수가 서로를 의지한 채 걸어 들어왔다. 

분명히 진행요원이 사인을 주기로 했는데, 마음이 급한 시후는 벌써 성큼성큼 걸어가서 수인을 맞이하러 갔다. 

버진로드의 5분의 1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라 김정수 원장은 눈짓을 했다. 그러자 시후는 백스텝을 밟으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 모습에 하객은 또 한 번 배꼽을 잡고 웃었다. 

긴장을 잔뜩 했던 수인도 시후의 그 모습에 웃음이 나서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고, 결혼식을 지켜보던 모든 이들의 웃음소리가 예식장을 가득 메웠다. 

수인은 웃으며 아버지 손을 놓을 수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 김정수 원장도 섭섭함을 잊은 채 웃었다. 그렇게 큰 웃음을 줘가며 어서 빨리 수인의 손을 잡고 싶었던 시후와 손을 잡고 버진 로드를 더 걸어 들어갔다. 

현시후라면 한평생 이렇게 웃으며 함께 걸어갈 것 같았다. 수인은 듬직하고 멋진 남편 현시후를 올려다보았다. 시후도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사랑스럽게 수인을 내려다보았다. 

둘 사이 힘들었던 시간은 이제 기억의 한 단면도 되지 못하고 사라졌다. 이제 둘, 아니 셋이 되어 행복할 시간만 남아있었다. 

-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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