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화
다시 시작된 일상은 그야말로 꿀통에 빠진 두 사람 같았다. 의료원 직원들이 아주 대놓고 비난을 퍼부을 정도로 두 사람은 활활 타오르는 부부애를 자랑했다. 대부분은 부러워했지만 말 못 하고 속이 쓰린 사람도 제법 있었다.
그중에 제일은 아마 수인을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듯 해야 하는 남자 간호사 진창욱이었다. 5층 간호사 데스크에 찬 바람이 쌩쌩 불었다.
“오늘 다들 무슨 일 있어요?”
수인이 복숭앗빛 볼을 해서는 물었는데 각자 일이 바쁜지 아무도 대꾸조차 없었다. 게다가 진창욱은 수인 앞에 수북한 차트를 아주 사무적으로 밀어 놓았다.
“진쌤. 무슨 일 있어요?”
“없는데요. 왜요?”
“아. 없구나.”
수인은 괜히 머쓱해서는 차트에 고개를 박았다. 병실을 돌고 오던 나리가 수인을 발견하고는 옆에 붙어 서서 새치름하게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엉큼하신 분인 줄 몰랐네요.”
안 그래도 진창욱의 싸늘한 표정이 신경이 쓰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 있는 수인에게 나리는 대 놓고 질타 중이었다.
“어. 그게. 말할 타이밍을 놓친 거죠. 속이려던 아니고.”
“치!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현 과장님을 그렇게 낼름 채가실 수가 있어요?”
역시 신세대 나리는 속에 쌓아두는 법이 없었다. 그렇게 차라리 말해주니 시원한 것 같았다. 수인은 난처한 표정으로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어머나~ 김 과장님, 목덜미에 이거 키스마크 맞죠? 어머 어머 남사스럽당.”
“어? 아. 아니에요. 내가 켈로이드 스킨이라 그래요. 가려워서 좀 긁었더니.”
괜히 피부가 예민한 척 긁어 부풀어 올라 그런 거라 변명을 하고 진땀을 빼는데, 역시나 나리는 비웃듯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
“뻥치시네요. 제가 김 과장님 독감접종 해 드려서 다 봤거든요. 켈로이드요? 그게 뭐예요?”
“아. 그런가? 뭐지? 모기인가?”
이 자리에서 순간 이동을 할 수 있다면 딱 그러고 싶은 수인이었다. 그런데 진창욱이 툭 끼어들었다.
“최나리 쌤.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501호 가 봐요. 그리고 김 과장님이 아까워요.”
나리도 수인도 갑자기 진창욱 때문에 정지 화면이 되었다. 그러자 말해 놓고 자신도 이상했던지 진창욱이 머쓱하게 웃어댔다.
“현 과장님이 워낙 인기 있기는 하지만, 김 과장님도 뒤지지 않아요. 그러니 기죽지 마세요. 과장님.”
“네? 네. 아. 감사합니다.”
그렇게 서로 웃어버리니 미세하게 남아있던 이상했던 감정도 전부 녹아 버렸다. 그리고는 진창욱이 쓱 웃으며 비품실로 가버렸다. 나리는 입을 삐죽거렸다.
“치! 그래도 이건 아니지. 전요. 김 과장님이 모쏠이라기에 진짜 믿었다고요.”
“나 모쏠 맞아요. 물론 지금은 유부녀가 됐지만.”
나리에게 이리 볶이고 저리 볶이고 있는데, 복도에 꽃바람을 일으키며 시후가 걸어왔다.
“누구 얘기야?”
수인 옆에 붙어 서더니 가슴 앞주머니에서 볼펜을 꺼내 차트에 휘갈기며 시후가 물었다. 나리는 눈을 쪽 찢어지게 뜨고는 입은 댓 발이나 내민 채 말했다.
“누군 누구예요. 박물관이나 가야 볼 수 있는 서른 넘으신 모쏠 여성분 얘기죠.”
그렇게 이야기를 해도 감을 못 잡겠는지 시후가 수인을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수인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 자기 이야기였어? 암 그렇지. 박물관에 기증할 만큼 위대한 김수인인 건 맞지.”
벌써 나리는 팔뚝에 올라온 닭살을 문지르며 대피 중이었다. 수인도 눈을 질금 감고 정신을 차려 보려 했다.
그런데 벌써 다리를 비비적거리는 시후 때문에 수인은 다리에 힘이 주르륵 빠졌다. 이러다 직장 안에서 못 볼 꼴 보이게 될까 봐 수인은 얼른 차트를 마무리하고 진료실로 내빼버렸다.
거의 24시간 붙어살고 있지만 이 남자라면 평생 행복할 것 같았다. 병원에선 수술 끝내주게 잘하는 멋진 동료였고, 밤이면 짐승 같은 체력의 남편이었고, 이런 남자를 만날 수 있었음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수인은 매일 매일 감사하며 살았다.
비록 시부모님, 특히 시아버지의 지독한 반대가 이 둘에게 눈물을 짓게 만들었지만, 진심은 늘 통한다 하였던가. 현진권이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이후 많이 달라지기는 했다.
진심을 다해 시후를 사랑하고 존중하는 수인의 모습을 보고 현진권은 마음이 차츰 바꿔 가는 것 같았다. 비록 제 욕심으로 아들 시후를 기산 대학교 이사장의 사위를 만들었다면 더 없이 만족했을 것이나, 시후의 삶이 지금처럼 행복했을 것 같지 않았다.
죽음의 고비를 넘겨보니 알 것 같았다. 아등바등 많이 가지려, 더 높은 곳을 올라가려 누군가를 밟고 일어서는 일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현진권은 이제 깨달았다.
행복한 삶이란 함께 있고 싶은 사람과 정을 나누고 사랑을 나누며 사는 일,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그 생활이 사실은 행복한 삶이었다는 것을 아버지 현진권보다 아들 현시후는 좀 빨리 알고 있는 듯했다. 알콩달콩 살아가는 아들 시후와 수인을 보니 현진권은 복잡했던 마음이 점차 허물어져 가고 있었다.
“그냥 저렇게 살게 둘 거야? 결혼식은 안 한다고 그래?”
갑자기 따지듯 묻는 현진권의 말투에 놀란 정민선은 급하게 차를 들이켰다. 소리 나게 찻잔을 내려놓고는 눈을 반짝이며 정민선이 말했다.
“결혼식 해야죠. 당신 허락하는 거예요?”
“언제는 내 허락 받고 자시고나 했어? 지 맘대로 촌구석에서 월급쟁이나 하는 녀석이?”
아버지 현진권의 노기는 여전한 듯 보였으나 그 정도가 많이 부드러워져 있었다. 정민선은 광대뼈까지 입꼬리를 올리고 웃었다.
“수인이 너무 예쁘지 않아요? 시후한테 얼마나 잘하는지 몰라요. 아주 둘이서 좋아 죽어요. 그런 애들한테 우리 참 못할 짓 했어요.”
“거. 누가 그렇게 둘이 정분날 줄 알았나? 당신도 말 가려서 하라고. 내가 언제 수인이가 미워서 그랬나? 다 상황이 그리 만든 거 아니냔 말이야.”
괜히 정민선을 쥐어박듯 말은 하고 있지만 현진권은 입원실에 자신의 팔다리를 주무르며 수인이 고백했던 순간을 잊을 수 없었다.
“맞아요. 아우. 내가 이럴 때가 아니잖아. 어서 애들한테 전화해야겠어요.”
벗어두었던 실내화를 꿰신고 정민선은 분주한 소리를 내며 휴대전화를 찾아 뛰었다.
***
“어? 푸딩하고 젤리야. 너희 상태가 좀 이상구나.”
시후는 모닝 인사를 하며 촉진 중이었다.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 푸딩이와 젤리의 상태가 나날이 볼륨을 더 키우고 있기에 시후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
“아파?”
벌어진 옷섶을 가리며 수인이 시후를 밀어내었다. 요 며칠 허리도 뻐근하고 아랫배도 묵직하고 또 그날이 오려는지 컨디션이 산뜻하지 않았다.
“한 달에 한 번 오는 매직이 오려나 봐요.”
“아. 내가 부족했나?”
시후의 말에 수인은 깜깜한 산중에 호랑이를 만난 듯 놀라서는 얼른 몸을 굴려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하! 오빠는 넘쳐요. 넘친다고요. 아셨죠? 내가 부족한 거랍니다.”
“근무가 너무 빡세서 그렇지. 요렇게 조그만 몸으로 버티는 게 용하다.”
수인이 안쓰러운 시후는 얼굴을 찌푸렸다. 또 뭘 아침부터 감동을 주려고 그럴까 싶지만 수인은 그런 시후를 꼭 껴안았다.
“나는요. 우리 같이 수술 방 있을 때가 제일 좋아요. 오빠가 진짜 멋진 순간을 나만 볼 수 있거든요.”
“하하하. 그래서 너 12년을 나 쫓아다녔구나?”
어느새 또 기고만장한 얼굴을 하고있는 시후를 쓱 내려다보며 수인이 말을 이었다.
“현시후 씨는 120년 쫓아다니겠다는 그 말 지킬 거예요?”
“당연하지. 넌 내 허락 없이 죽을 수도 없으니까 그리 알고 있어. 나 120년 너 쫓아다니려면 일단 우리 오래 살고 봐야 하잖아.”
말은 참 번드르르하게 잘하는 시후였다. 온몸 부서지게 사랑하고 깨가 쏟아지게 행복하면 그까짓 120년 못살까 싶었다. 시후는 지금도 행복에 겨워 푸딩과 젤리에 파묻혀 비명을 질러댔다.
“얘네들이 하루가 다르게 자라주니까 그것도 참 고맙기는 하다.”
“으유! 미치겠어. 얼른 일어나요. 출근해야죠.”
겨우 달아난 수인은 샤워를 하러 갔다.
열심히 일을 하고 먹는 점심 식사는 뭘 먹어도 맛있는 일이었다. 수인도 왕 부장과 시후에게 둘러싸여 웃으며 식사를 했다. 너무 급하게 먹었을까. 수인은 평소보다 입맛이 더 당겨서 배식을 더 받아 왔다. 그런 수인을 보고 왕 부장이 놀리며 말했다.
“집에 쌀 아끼려고 점심 때 왕창 먹는 거 아니야?”
“하하하. 왕 부장님. 농담 진짜 구려요.”
연신 웃으면서도 밥이 꿀맛같이 넘어갔다. 거기다 한술 더 떠서 시후는 제 갈비찜까지 수인에게 더 권했다.
“아이고. 눈 뜨고 못 보겠네. 걍 씹어 주지 그래?”
뼈를 발라 수인의 숟가락 위에 고기 살점만 올려주는 걸 보고 왕 부장은 기어이 한마디를 했다.
“왕 부장님도 신혼 때 다 그러지 않으셨습니까?”
“난 아닐세. 현 과장 그렇게 안 봤더니 완전 구제불능 팔불출일세.”
시후를 놀려 주고 싶은 왕 부장이 도발하듯 말했지만 시후는 되레 호탕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하하하. 감사합니다. 제가 엄청 노력파거든요. 우리 수인이만 행복하다면야 팔불출이든 뭔들 응?”
눈썹까지 실룩이며 느끼하게 웃어대는 시후를 보며 수인도 만족한 듯 웃어댔다. 직장에서도 매일 매일 깨를 한 가마니씩 볶아대는 통에 수성의료원은 때아닌 방앗간처럼 깨 볶는 냄새가 진동을 했다.
저녁도, 야식도 무척이나 잘 먹어대는 수인을 골똘히 지켜보던 시후가 슬그머니 옆에 다가와 앉았다.
“수인아.”
“응?”
치킨 다리를 야무지게 뜯으며 대답하는 수인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복스럽게 먹는 모습이야 언제 봐도 흐뭇하지만 일주일 내내 시후보다 많이 먹어대는 수인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지켜보던 중이었다.
“수인아.”
“응?”
“안 되겠어. 테스트 해 보자.”
“무슨 테스트요?”
언제 사 왔는지 시후가 임신테스터를 한가득 내밀었다. 콜라까지 쭉 들이켜던 수인은 목에 사레가 걸린 듯 기침을 연신 해댔다.
“너 배란일 7일부터잖아. 뭐 매일 몇 번씩은 했으니 그게 중요한 건 아닌데. 아무튼 좀 이상해.”
“내가 이상해요?”
입가에 묻은 기름을 휴지로 닦아내며 수인이 눈을 깜빡거렸다. 계속 허리도 아랫배도 묵직하기는 했으나 생리증후군과 비슷했다.
“많이 이상해. 푸딩이랑 젤리도 너무 커졌고.”
“아이참. 그건 오빠가 하도 만져대니까.”
“테스트 해 보자.”
덥석 손을 잡아끄는 바람에 일어나기는 했으나 수인은 민망해서 시후를 밀어냈다. 화장실까지 기어이 따라 들어와 자기가 도와주겠다며 소란을 피워서 수인은 억지로 떠밀어내고 문을 잠갔다.
“혼자 하기 힘들지 않아? 내가 잡아줄게.”
“뭘 잡아줘요? 가만 좀 있어 봐요.”
문밖에서 하도 성화를 부려대니 수인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확인한 테스터에 선명하고 굵은 두 줄이 딱 보였다.
“어머!”
“뭔데? 아 문 좀 열어봐. 궁금해 죽겠다.”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그렇게 금쪽같은 내 새끼를 외치던 현시후의 소원이 드디어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