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날 밤을 책임져 (69)화 (69/88)

외전 1화

-혼인신고 이후부터 다시 돌아보는 현시후와 김수인의 이야기

의료원 소재지인 행정복지센터에서 걸어 나오는 현시후와 김수인. 무언가 비장한 분위기가 두 사람에게서 흘러나왔다. 주차장까지 말없이 걷던 시후는 옆에서 걷고 있는 수인을 내려다보았다. 시후의 시선이 느껴진 수인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후회 안하지?”

“오빠는 후회해요?”

“내가? 김수인 사람 잘못 봤어. 후회라는 단어는 내 사전에 없다.”

농담같이 하면서도 시후는 진심이었고, 그게 진심이라는 건 누구보다 수인이 제일 잘 알았다. 그렇게 주차된 차 앞에 도착한 두 사람, 시후가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고, 수인은 서류 봉투를 가슴에 꼭 끌어안은 채 차에 올랐다. 

“푸딩이와 젤리 가리지마.”

“어머!”

수인이 흘겨보는데도 시후의 두 눈은 벌써 흐뭇한 표정을 지어가며 수인을 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과감하고 야릇하게 톡톡 푸딩과 젤리에게 안부를 묻듯 만져댔다.

“누가 봐요. 왜이래요?”

“됐어. 이제 나 막 나갈 거니까. 말리지 마. 그리고 오늘 누가 뭐라 해도 우리 결혼한 날이니까 나 말리지 마.”

안전벨트가 쭉 늘어날 정도로 수인에게 몸을 기울인 시후의 과감하고 짜릿한 키스가 꽤 오래 이어졌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앞 유리로 흘끔거리는데도 시후는 멈출 줄 몰랐고, 안절부절못하는 건 오로지 수인이었다.

“그만 해요. 사람들 다 보잖아요.”

“선팅 잘되어 있어서 밖에선 안 보여. 아. 아니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니지. 출발하자.”

시후는 마무리 뽀뽀를 야무지게 하고는 자동차를 출발시켰다. 오늘은 작정하고 두 사람이 혼인신고를 하러 온 날이었고, 결혼식은 미뤄뒀지만 의료원 원장님 특별 허락 하에 1박2일 신혼여행을 떠나는 날이기도 했다. 

시후는 수인이 취향을 고려해서 제 맘대로 일정을 잡았다. 그 첫 번째 일정을 완수하러 일단 출발한다고 했다. 미리 귀 띔을 해주지 않았기에 무척 기대가 되면서도 걱정인 수인이었다. 즐겁고 행복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땀이 나도록 서로의 손을 꼭 잡으며 도착한 곳, 남산 아래 이름난 호텔이었다.

“내 이럴 줄 알았어. 이게 스케줄 1번이라고요?”

“이것보다 중요한 게 어디 있어? 오늘부터 우린 합법적인 관계잖아.”

시후의 억지 같은 말에 수인이 한숨을 푹 하고 내쉬었다. 

“그럼 지금까지는 불법적인 관계였어요?”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아무튼 오늘부터 우린 부부니까. 그리고 난 하루가 급해. 내 금쪽같은 새끼들 다섯 명 만들려면 급해. 여기 잠깐 있어. 체크인하고 올게.”

급한 용무인 양 프런트로 가버리는 시후를 보고 수인은 그냥 웃음이 나왔다. 다 자기만 믿으라며 준비도 다 되어 있다더니 그 첫 스케줄이 호텔이라니, 저 남자 어쩔 거냐고. 

체크인도 어찌나 빨리 끝났는지 돌아오는 시후의 발걸음은 마치 나비와 같이 가벼워 보였다. 멀뚱하게 로비에 앉아있는 수인을 재촉해 시후는 예약했던 룸으로 들어섰다. 

수인은 룸 안에 들어서자마자 화들짝 놀랐다. 서울 시내 이런 곳이 있나 싶을 정도로 거실 한쪽을 전부 차지할 만큼 큼직한 풀이 떡하니 있었다.

“이 룸 예약하느라 애 좀 먹었어.”

“헐~”

수인은 입술을 말아 물고 일단 룸의 상태를 둘러보았다. 

“나 수영복 안 가져왔어요. 그런 말 없었잖아요?”

이미 가득 물이 받아져 있는 풀에 손을 담가 보며 수인이 말했고, 시후는 어느새 다가와 수인을 뒤에서 껴안은 채 속삭였다.

“별걱정을 다 한다. 누가 방 안에서 수영복을 입냐?”

이미 시후가 수인의 귓불을 깨물고 목덜미를 볼로 비비고 있어 수인은 심호흡을 했다. 벌써 시후는 자그마한 수인을 번쩍 들어 안고 침실로 향했다.

“오빠. 아침에도 했는데.”

그런 말이 먹힐 것 같지 않았지만 수인은 필사적으로 시후를 밀어내었다. 그래봤자 시동 제대로 걸린 이 남자는 꿈쩍할 사람이 아니었다. 

“이거 왜 이래? 대한민국 정부가 승인해준 날이라고. 애국해야지.”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벌써 수인이 걸치고 있던 옷은 이리저리 날아가고 없었다. 그리고 푸딩이와 젤리는 시후의 손아귀에 잡혀 있었다. 

“아. 진짜. 이 오빠.”

번쩍 몸이 들린 수인은 현기증이 일었다. 짐승 같은 체력을 가진 시후는 수인을 들어 안고 펄펄 날았다. 

“수인아.”

침대 위에 살포시 내려놓고 다가선 시후의 목소리는 소프트 아이스크림 같이 달달했다. 시후의 목을 껴안고 있던 수인이 고개를 들었다. 

“수인아.”

또 한 번 달달한 목소리로 그녀를 부른 시후의 시선이 이번엔 촉촉해있었다. 두 시선이 뜨겁게 서로를 마주 보았다. 

“나하고 결혼해 줘서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우리 예쁜 수인이 웨딩드레스 입혀줘야 하는데.”

“나 울리지 마요.”

어느새 코끝이 빨갛게 물든 수인이 울먹거렸다. 애초에 울릴 생각은 아니었지만 그녀를 이리 안고 보니 너무도 감격스러워 나와 버린 말이었다. 

“미안해. 사랑해.”

“나도 미안해요. 나도 사랑해요.”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두 사람의 입술은 서로를 찾아들었다. 서로 끌어안고 있는 지금이 얼마나 행복한지, 얼마나 소중한지 절절하게 깨달으며 서로를 끌어안고 또 끌어안았다. 

호텔이 들어섰던 시간이 오전인데 벌써 밖은 어두워져 있었다. 지칠 대로 지쳐 팔 하나 들어 올릴 힘조차 없는 수인이 시후의 가슴을 톡톡 두드렸다.

“오빠.”

“응?”

수인만큼은 아니었지만 에너지를 미친 듯이 발산했던 시후도 넉다운 상태이기는 했다. 

“배고파 죽을 것 같아요. 제발 밥 좀 먹어가면서 하면 안 돼요?”

“어? 그. 그래. 근데 그런 말 네가 하니까 엄청 부끄럽네.”

이 남자, 부끄럽다는 말을 할 줄 알다니, 수인은 기가 막혔다. 그것도 수인이 내뱉은 말이 무슨 야한 말이라도 되는 듯 대꾸하는 시후가 얄미워서 그의 가슴을 꽉 꼬집어 버렸다. 

“아야!”

“부끄러움이 뭔지 알기나 해요? 그리고 이게 뭐예요?”

수인은 제 목부터 몸 전체가 온통 시후의 키스마크로 얼룩덜룩해진 피부를 가리켰다. 그것도 시후가 이름 붙인 푸딩이와 젤리는 아주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하하하.”

“이거 누가 이랬어요? 누가 나를 얼룩말로 만들었냐고요!”

열을 푹푹 내고 있는 수인을 쓱 보며 시후는 능글맞게 웃어댔다. 

“김수인은 주로 사파리가 잘 어울리네. 표범도 잘 어울리고, 오늘 보니 얼룩말도 잘 어울려.”

그리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면서도 수인의 몸을 야릇하게 만져댔다. 찌릿해서 피해야 하는데 힘이 없는 수인이 흐느적거렸다. 그랬더니 또 그걸 그냥 안 넘기고 시후가 장난을 걸어왔다. 

“아우. 김수인 야한 것 좀 봐.”

“어머!”

괜히 민망해서 시후는 수인에게 엉큼한 윙크를 날리며 인터폰을 집어 들었다. 초스피드로 룸서비스를 시키고 또 다시 침대로 달려드는데 수인은 두 손을 들어버렸다.

“난 있잖아. 풀 파티 때 너 보고 기절하는 줄 알았다.”

“왜요?”

“너 대체 언제 이렇게 깜찍하고 고맙게 자랐냐?”

느끼한 말과 느끼한 눈빛, 그리고 그보다 백배는 더 느끼한 손길로 얼룩무늬가 만들어진 수인의 몸을 어루만졌다.

“오빠가 나한테 관심이 없어서 그랬죠. 나 이거 고등학교 때 완성된 몸이라고요.”

“와! 나 눈 찔러야 돼. 이걸 눈이라고 달고 다닌 거야 현시후?”

극성과 오버를 넘나들고 있지만 이렇게 사랑스러운 남자가 또 있을까? 수인은 배가 고파서 아사 직전이었지만 이 귀여운 남자를 또 끌어안지 않을 수 없었다.

“이리와요. 눈은 찔러 뭐해. 둔해서 더 매력 있어요. 오빠는.”

“그치? 내가 좀 둔하긴 하지. 안 그랬음 지금쯤 의자 왕 뺨칠지도 모르잖아.”

무슨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는 이 입담, 그런 그가 밉지 않은 건 콩깍지가 제대로 씌워졌기에 가능한 일인 것 같았다. 

“그래도. 방송국 다니면서 한 눈 팔면, 알죠?”

“누구? 설마 나?”

자기를 의심하는 눈초리로 눈을 가늘게 뜬 수인의 눈에 사랑 가득 담긴 뽀뽀를 해대며 시후는 볼멘소리를 해댔다.

“내가 그럴 눈이 있어? 김수인 보기도 바빠 죽겠는데 다른 여자 쳐다볼 처지가 돼?”

어쩜 한마디도 져주는 게 없이 어찌나 능글거리는지, 그래도 예뻐 죽겠는데 어쩔 거야. 수인은 흡족한 대답을 들은 것 마냥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어디 여자가 단순한 존재던가. 남자 머리 꼭대기에 올라앉아 있는 게 여자 아니던가.

“김지혜 아나운서가 그렇게 예쁘긴 하다면서요?”

“예쁘대? 누가?”

시후는 안 넘어갈 듯 잘 피했다. 그렇지만 말 꺼낸 수인은 이대로 물러서기 싫었다. 뭐가 됐든 경고 정도는 가뿐하게 한 장 먹여 둬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미스코리아 출신에 모델 출신에, 거기다 말도 잘하고 좀 예뻐요? 옆자리 패널이니까 더 잘 보일 거 아닌가?”

“글쎄. 내 눈에는 그냥 사람으로만 보여서. 나는 여자라면 오직 김수인밖에 안 보이는 남자잖아.”

묘하게 선수처럼 잘 빠져나가는 것 같았지만 시후는 지금 이 순간 목에 칼이 들어와도 진심이었다. 그런 자신을 자꾸만 시험대에 올리려 하는 수인 앞에서 딱 잡아챘다.

“그딴 소리 자꾸 할 거야? 안 되겠다. 오늘 그 문신 하는 곳 스케줄 2번으로 잡아야겠다.”

살짝 손으로 톡 하고 건드렸다고 생각했는데 시후는 온몸과 영혼까지 죄다 수인에게 엎어지려 했다. 

“어머. 미쳤어!”

“뭘 미쳐? 아주 마빡에 김수인 이름 딱 새겨 넣자. 어때?”

그러면서 자기 이마를 손바닥으로 탁 쳤다. 그러나 장난기 어린 모습이 아니기에 수인은 질겁을 했다. 또 한다면 하는 남자가 현시후였다. 

“이 오빠. 언제부터 이렇게 고단수였대? 아 됐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

“왜 말이 안 돼? 일어나. 가자. 출발하자고.”

그때, 딩동 소리가 울렸다. 아마 룸서비스가 제때 도착하지 않았더라면 현시후 이마에 김수인 이름을 타투 하러 갔을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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