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날 밤을 책임져 (68)화 (68/88)

68화

그러다 딱 마주친 간호사 최나리는 수인에게 괜히 시비를 걸듯 가는 길을 막았다.

“아. 왜~”

“치! 도대체 우리 피자랑 맥주는 언제 사시는 거예요? 두 분만 알콩달콩하면 다예요?”

나리가 눈을 치켜뜨며 말했고, 수인은 목을 손가락으로 긁어댔다. 그리곤 뜸 들이듯 하더니 입을 열었다.

“현 과장님이 시간이 될지 모르겠어.”

“치! 요새 티브이도 막 나오시고. 현 과장님 너무 스타 되신 거 아니에요?”

“그러게. 너무 잘나가서 나도 힘들어.”

“그짓말! 맨날 힘들다면서 어떻게 맨날 웃고 다니세요? 그짓말!”

귀여운 나리 때문에 수인은 또 시원하게 웃었다. 정말 요새는 걱정거리가 하나도 없는 사람처럼 수인은 웃고 살았다. 

진료실로 돌아온 수인은 외래 진료를 열심히 보았다. 잠깐 환자가 뜸해진 시간이 되었고, 때마침 친구 희윤이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 야야. 대박. 대박.

얼마나 말이 급한지 앞의 말이 뒤의 말을 덮칠 것 같이 희윤이 흥분해 있었다. 

“말을 해. 뭐가 대박이라는 거야?”

- 야야. 김수인. 아 글쎄. 있잖아.

본론을 오늘 안에 들어갈 수 있을지 살짝 의심이 들었지만 일단 수인은 침착하게 들어보고자 했다. 

“희윤아. 너 숨은 쉬고 있는 거지?”

- 좀 전에 우리병원에 누가 왔었는지 아냐?

그야 알 턱이 없었다. 근무하는 병원도 달랐고, 전공도 달랐으니 아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 이도희가 건강 검진하러 왔었다. 근데 이도희 임신했대. 완전 병원 뒤집어지게 난리였어.

“야. 환자 사생활을 이렇게 막 이야기하면 어떡해?”

그렇게 말은 했지만 수인은 심장이 바르르 떨려왔다. 이도희라는 이름만으로도 아직 수인은 편안할 수 없었다.

- 이도희 또라이 맞다니까. 진료실에서 나오자마자 복도에 애 만든 남자가 있었나 봐. 그 남자 멱살을 잡고 개난리 치고, 아마 사람들이 동영상 엄청 찍었을 걸? 그러니 뭐 내가 환자 상태를 발설한 건 아니지.

희윤은 아직도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그 뒷이야기를 계속하고 있었다. 듣는 내내 수인은 기분이 이상했다. 그렇게 도희는 제 갈 길을 가는 걸까. 갑작스러운 도희 소식에 수인은 기분이 스르륵 내려앉았다. 

똑똑!

생각에 잠겨있는데 진료실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수인은 보고 있던 모니터에서 시선을 들어 들어오는 사람을 보았다.

“과장님. 시계 좀 보세요. 네?”

담당 간호사의 말에 시계를 확인한 수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빨리 퇴근 독촉 좀 해달라고 현 과장님이 계속 저 괴롭히세요. 얼른 퇴근하세요. 제발.”

“알았어요. 근데 현 과장님 오늘 방송국 갔는데.”

“그러니까 전화로 계속 독촉하신다고요.”

눈을 가늘게 뜨고 있는 담당 간호사 때문에 수인은 피식 웃으며 퇴근할 준비를 했다. 얼마나 시후의 독촉이 심했던지 담당 간호사는 수인의 코트를 어깨에 걸쳐주며 거의 떠밀어댔다.

담당 간호사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과장님. 오늘 첫눈 온대요.”

“진짜요?”

코트에 팔을 끼워 넣으며 수인이 물었다. 

“그래서 현 과장님이 애가 닳으셨겠죠. 아무튼 오늘 뜨거운 밤 되세요.”

“어머~”

담당 간호사는 수인을 막 밀어내면서 야하기 그지없는 말을 막 뱉어냈다.

“뭐 어때요? 혼인신고 다 하셨는데. 안 그래요?”

그렇긴 해도 부끄러워서 얼굴이 빨개진 수인을 보고 담당 간호사는 더 놀리고 싶었다.

“과장님, 화이팅!”

“왜 그래요. 화이팅은 또 뭐예요~”

놀림 제대로 당하고 수인은 의료원 로비를 달아나듯 나왔다. 담당 간호사의 말처럼 눈이 오려는지 하늘이 잔뜩 무거워 보였다. 어느새 앙상해진 나무들이 안쓰러워 보였지만 눈이 온다면 예쁘게 눈꽃을 피울 모습이 기대되었다. 

수인은 혼인신고를 한 뒤로 이사를 했고, 아담한 전원주택으로 차를 몰았다. 주차장에 아직 시후의 차가 없는 걸로 봐서는 도착을 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오늘 일기예보가 첫눈인데 폭설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니 수인은 살짝 걱정이 되었다. 

그러는 사이 저녁 준비를 끝내고 주차장에 시후의 차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수인은 거의 뛰어가다시피 시후를 반기러 나갔다. 시후는 자동차 뒷자리에서 큼직한 꽃바구니를 꺼내 들었다. 

“어. 왜 나왔어. 추운데.”

“오빠 빨리 보려고 나왔죠.”

“아우 예뻐 죽겠네. 들어가자.”

시후가 수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수인은 뻔히 제게 줄 꽃바구니인 걸 알면서도 시치미를 떼고 슬쩍 물었다.

“꽃 사왔네요?”

“응. 우리 와이프가 꽃을 좋아하는 여자잖아. 그러니 안 사올 수가 있나?”

시후의 말에 수인의 입꼬리가 스르륵 위로 올라붙었다. 그때 하늘에서 눈송이가 하나 둘 떨어졌다. 

“와. 눈 와요.”

“그러네.”

둘은 집에 들어가는 것도 잠시 잊은 채 서로 꼭 끌어안고 눈을 맞았다. 

“첫눈 하면 생각나는 게 뭐야?”

“첫사랑이요. 첫눈 올 때까지 봉숭아 물이 손톱에 남아있으면 이루어진다잖아요. 난 봉숭아물 안들이고도 이뤘는데. 내 첫사랑 현시후.”

수인이 미소를 지은 얼굴로 시후를 올려다보았다. 시후는 그윽하게 수인을 내려다보았다. 

“감동적인데?”

“꽃바구니 답례예요.”

웃어 줄 거라 기대했는데 시후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아. 나 아무래도 하트에 이상이 생겼나 봐.”

시후가 심장을 쥐며 인상을 썼다. 함께 눈을 맞추며 입술을 맞춰주길 기대하던 수인이 놀라서 그의 심장 위에 손을 올렸다.

“왜요? 페인 있어요? 언제부터요?”

“김수인을 사랑하고부터?”

그리곤 수인을 번쩍 들어 안았다. 장난꾸러기 같은 얼굴이 환하게 웃었다. 수인은 또 당했다는 듯 웃었지만 너무 행복한 순간이었다. 

겨울이 깊어가는 어느 날, 새벽에 요란하게 전화벨이 울렸다. 수인을 품에 안고 잠이 들었던 시후가 제 휴대전화임을 확인하고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전화를 받아들었다. 

그리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전화 통화 내용이 꽤 심각한 듯 시후는 허둥거리며 옷을 찾아 입었다. 수인도 머리를 매만지며 일어나 방의 불을 밝혔다.

“뭐예요?”

“아버지가 쓰러지셨대. 나 지금 서울 올라가 봐야겠어. 

걱정하는 수인을 한번 안아주고 시후는 서둘러 서울로 향했다. 안 그래도 심근경색으로 위급 상황을 맞았던 아버지 현진권이 이번에도 심장 때문에 쓰러졌다고 하였다. 이번엔 좀 발견이 늦어졌기에 아직 의식이 없고 결과를 예측하기 어렵다고 했다. 

기선대학병원에 도착한 시후는 산소 호흡기을 달고 있는 아버지 현진권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머니 정민선은 아들 시후를 보자 울음을 터트렸다.

“시후야. 어떡해. 아버지 어떡하니.”

“괜찮으실 거예요. 어머니.”

말은 그리해도 장담을 할 수 없었다. 제아무리 고급 장비에 고급 인력이 줄을 지어 있었지만 골든 타임을 좀 지나 발견된 탓에 예후가 매우 좋지 않았다. 

우리나라 중년 남성의 사망원인 80%에 해당하는 질병이고, 치료를 받았다 해도 합병증으로 사망할 수도 있기에 시후 조차 불안했다. 아버지 현진권은 혈관을 뚫는 수술을 하고도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의식이 돌아오지 않은 채 5일이 지나있었다. 그동안 병간호에 지친 정민선과 시후를 대신해 수인이 현진권의 병실을 지켰다. 현진권이 의식이 돌아온다면 아마 원하지 않을 테지만 수인은 그렇게라도 하고 싶었다. 

수인은 정성스럽게 현진권의 손발을 주물렀다. 그리고 듣진 못하겠지만 진심으로 이야기를 했다. 어느새 수인의 두 눈엔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버님. 죄송해요. 많이 속상하셨을 거예요. 저는요. 아버님 이해해요. 저라도 그랬을 거예요. 현시후 씨요. 정말 멋진 남자예요. 그런 아드님 두셔서 얼마나 자랑스러우셨을까. 저는 가끔 생각해요. 그런 남자를 제가 덥석 차지해서 정말 죄송해요. 아버님. 정말 죄송합니다.”

수인은 아무도 없는 병실에서 혼자 중얼거리듯 현진권에게 고백하듯 그렇게 말했다. 비록 의식이 없어서 듣지 못해도 괜찮았다. 그저 제 마음이 그러하기에 고해성사를 하듯 수인은 말했다. 

그렇게 시간은 지나 어느덧 3주의 시간이 흘러있었다. 그날은 시후와 수인이 함께 현진권의 입원실을 지키던 날이었다.

“아버님!”

눈을 똑바로 뜨고 눈을 맞추는 현진권을 제일 먼저 발견한 건 수인이었다. 

“오빠. 아버님 의식이 돌아온 것 같아.”

“뭐라고?”

시후도 달려와 현진권을 살폈다.

“아버지. 아버지. 제 말 들려요? 들리면 손가락 들어보세요. 아버지.”

시후의 말에 현진권은 힘겹게 손을 들어 보였다. 

***

현진권이 정민선을 재촉했다. 

“알았어요. 안 늦어요. 걱정 말아요.”

“당신 왜 이리 꾸물거리는 거야?”

“안 늦어요. 다 했어요.”

정민선은 현진권의 넥타이를 정중앙으로 고쳐 매주며 활짝 웃었다. 그리고 은근히 긴장한 것 같은 현진권에게 슬쩍 말했다.

“당신 엄청 긴장했나 봐요?”

“내가? 내가 왜?”

끝까지 자존심을 세워 보이는 현진권에게 정민선은 그저 웃어 보였다. 이리 살아나 준 것만 해도 얼마나 고마운지 하루하루가 고마운 정민선이었다. 게다가 죽다 살아나서 그런지 고집을 꺾어주어서 업어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게 정민선을 재촉해서 도착한 식당에 이미 모두 다 모여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며 현진권은 잔뜩 긴장하였다. 그러나 그를 맞이하는 손길이 따뜻했다.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입니다. 원장님.”

현진권과 김정수는 17년 만에 서로의 손을 잡으며 인사를 나누었다. 이 악수 하나가 뭐라고 그동안 참 긴 세월이 그들 사이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서로가 다른 길을 가는 상대자가 아니고 자식을 서로 공유한 사이가 되어 버렸다.

“건강은 좀 어떠십니까?”

“많이 좋아졌습니다. 수인이가 애를 많이 썼어요.”

현진권은 일주일에 몇 번씩 들러서 건강 상태를 체크해 주는 수인을 은근히 자랑했다. 그러자 김정수는 흐뭇하게 웃었다. 

“저. 말씀 중에 죄송한데요.”

갑자기 시후가 두 어른의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수인은 화들짝 놀라서 시후의 손을 움켜잡았다. 시후가 씩 웃기에 모두가 궁금증을 가득 실은 눈으로 쳐다보았다.

“수인이가 애를 많이 쓴 건 사실인데요.”

자꾸 궁금증이 일게 말을 잘라 하기에 정민선이 톡 끼어들었다.

“그래. 수인이가 애를 많이 썼지. 아버지 전담 닥터를 자처하고 있어 내가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어.”

“네. 수인이가 다른 쪽으로도 애를 많이 써서요. 하하하. 아기를 가졌습니다. 저 드디어 아빠 됩니다. 하하하.”

“뭐라고? 정말이니?

얼굴 붉어진 수인은 시후의 허벅지를 막 때리며 부끄러워 어쩔 줄을 몰라했다.

“어머. 세상에 어머나 이렇게 기쁜 일이. 너무 행복하구나.”

정민선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수인을 껴안았다. 기쁘지만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는 현진권과 김정수마저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사돈. 축하합니다.”

“예. 사돈 축하드립니다.”

“아. 정말 축하드립니다. 애들이 아주 바람직한 일을 했네요.”

“제가 더 축하드립니다. 사돈. 우리 손자 만세입니다.”

“네. 우리 손자 만세입니다.”

수인은 현진권과 김정수가 서로 악수를 하며 기뻐하기에 눈물이 날 것처럼 기뻤다. 그런 수인의 등을 토닥이던 시후가 활짝 웃었다. 그리고 속삭였다.

“거봐. 손자 앞에선 솜사탕이라고 했잖아. 오빠 믿으랬지?”

수인은 울 것 같은 얼굴로 시후를 올려다보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