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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을 책임져 (67)화 (67/88)

67화

수인은 활짝 웃으며 시후가 내민 손을 잡았다. 비록 시후의 부모님에게는 환영받지 못했지만 수인의 가족에게는 환영받을 수 있다는 기대에 두 사람의 표정은 매우 밝았다. 

할머니가 두 팔을 벌려 두 사람의 방문을 환영했다. 그런데 김정수 원장의 표정이 조금 딱딱한 것 같았다. 

“안녕하셨어요?”

“어서 와요. 멋쟁이 선생님.”

“할머니~”

“어서 와요. 어서 와. 아가씨, 선생님.”

나이가 꽤 많은 할머니였지만 표정만은 꽃다운 소녀 같았다. 

“아버지 저 왔어요.”

수인의 말에 김정수 원장은 억지로 입가에 미소를 지어 보이다 슬그머니 그 미소도 사라졌다. 그러나 수인은 어서 빨리 시후를 소개하고 싶은 마음에 배시시 웃으며 시후의 손을 잡았다. 그 모습을 보던 김정수 원장의 얼굴이 확연하게 굳어졌다. 

“아버지. 저희 드릴 말씀 있어서 왔어요.”

“원장님. 할머니, 제가 절 올리겠습니다.”

시후가 빙그레 웃으며 두 어른들께 최대한의 예의를 차려 인사를 하려 했다. 그런데 김정수 원장의 얼굴은 굳어진 채 앉을 마음이 없어 보였다.

“아버지. 앉으세요.”

“수인아. 지금 너희 하려는 말이 뭐니?”

항상 웃으며 대해주던 김정수 원장이기에 웃으며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줄 줄 알았다. 그런데 그의 표정이 매우 심각했다. 

“아버지.”

“그래. 말해봐.”

심각한 분위기가 만들어져 버렸고, 절을 올리려던 시후는 당황하였다. 수인도 당황을 하며 시후를 한번 바라보고 김정수 원장을 한번 바라보았다.

“저. 아버지. 저희 둘 결혼을 하려고 해요. 오랫동안 알아 왔고.”

수인이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김정수 원장은 언짢은 목소리로 말을 끊었다.

“현시후 선생.”

“네. 원장님.”

시후가 바짝 긴장을 한 채 김정수 원장을 쳐다보았다. 김정수 원장은 헛기침을 크게 하고는 인상을 굳힌 채 말을 이었다.

“현시후 선생이 자선의원 건물의 새 주인이라는 소리를 내 얼마 전에 들었어.”

수인은 김정수 원장의 말에 충격을 받아 시후를 쳐다보았다. 수인에게도 이 사실을 밝히지 않았던 이유는 부담을 주는 게 싫어서였다. 

“왜 그런 일을 했나. 나는 현시후 선생이 우리 자선의원에 와서 봉사를 해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하고 있어. 하지만 이렇게 거금을 들여 건물을 샀다는 말에 나는 실망을 하였어.”

실망이라는 말에 시후는 고개를 툭 하고 떨어뜨렸다. 김정수 원장이 너무도 힘들어하기에, 그 힘듦이 수인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되기에 그랬고 어차피 저로 인해 벌어진 일이기도 해서 나섰던 일이었다. 그런데 그 일로 실망감을 느꼈다 하니 시후는 제 행동이 부끄러워졌다.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하. 이렇게 말하는 나도 면목이 없네. 자네에게 고맙다는 인사는 못할 망정 이리 삐딱하게 말을 하고 있으니 나도 몹시도 부끄럽네.”

수인은 고개를 숙이고 있는 시후가 안쓰러워서 미칠 것 같았다. 그런데 김정수 원장의 다음 말은 더욱 힘이 빠지게 만들었다.

“현시후 선생. 나는 내 딸 수인이가 행복하게 살길 바란다네. 사랑하고 사랑받고 살기를 바래.”

시후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원장님. 아니 아버님. 저는 평생 수인이를 행복하게 해줄 자신이 있습니다.”

그러나 시후의 말에도 김정수 원장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슬픈 얼굴로 말을 이었다. 

“현시후 선생 집안에서 수인이를 탐탁하지 않아 할 테지. 나는 자네 아버지를 잘 알지. 절대 내 딸 수인이를 곱게 받아들이실 분이 아니란 것도 잘 알아.”

너무도 예리하게 하는 말이어서 수인도, 시후도 그 말에 반박을 하지 못했다. 

“아버님, 제가 노력하겠습니다. 제가 수인이 행복하게 하겠습니다. 저 믿어주세요. 제가 더 노력하겠습니다.”

“아니! 이보게 현시후 선생. 나는 자네를 무척 좋아하네. 자네처럼 듬직한 남자를 본 적이 없다고 내 감히 말할 수 있네. 하지만 나는 수인이 아빠라네. 내 딸이 눈물짓는 결혼을 하는 것을 허락할 수가 없네.”

김정수 원장이 기어이 눈물을 보였다. 수인은 아버지의 눈물을 보니 가슴이 갈래갈래 다 찢어지는 것 같았다. 

“죄송해요. 아버지.”

“아니야. 내가 미안하다. 내가 이 길을 선택하지 않았더라면 너에게 이런 고통을 주지 않았을 텐데 미안하다.”

김정수 원장의 뜨거운 부성애의 눈물은 모두를 울리고 말았다. 

김정수 원장은 수인과 시후를 보내놓고 생각에 잠겼다. 17년 전, 김정수가 기선대학병원 외과파트 부장에 있을 때 췌장암 수술을 마치고 위풍당당하게 수술실을 나왔다. 취재진이 이번에도 단기간에 어려운 수술을 마친 김정수를 취재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췌장암 중에서도 매우 까다로운 수술이었지만 김정수는 매우 의기양양하게 수술을 일단락 짓고 나머지 부분은 어시스트하던 후배 의사에게 맡기고 나와 인터뷰를 하며 최단기간 수술기록에 고취되어 있었다. 

그 인터뷰는 금세 저녁 뉴스감이 될 만큼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외과 의사들이 가장 많이 꺼려하는 췌장 수술에서 독보적인 수술량을 자랑하였고 성공률 거의 100%에 가까운 의사로 그렇게 김정수는 이름을 또 한 번 떨쳤다. 

그러나 그 수술로 50대 남자 환자는 급성 부작용으로 수술 직후 사망을 하였고, 그 일로 기선대학병원 원장이던 현진권과 김정수는 날카롭게 대립을 하기에 이르렀다. 

사망에 관한 책임을 어시스트를 했던 후배 의사에게 떠넘기고 이 일에서 김정수가 빠져주기를 현진권은 원하였다. 이는 기선대학병원 전체를 위해서 즉, 대의를 위해서 사소한 실수는 덮자는 이사장과 원로 의사들의 지시에 따라 현진권이 총대를 멘 일이었다. 

그러나 김정수는 그 환자의 어린 딸이 퍼부었던 독설에 주저했다. 하루 아침에 아버지를 잃은 딸은 맹비난을 서슴지 않았고, 무책임한 의사는 살인마 라는 잊을 수 없는 낙인을 김정수 가슴에 남겨 버렸다. 

그 일로 김정수는 더 이상 스타급 의사로서의 삶을 버젓이 살아갈 수 없었다. 방황이 시작된 건 그 즈음이었다. 그리고 여론에 공격을 당하던 어느 날, 항상 조용하고 정직했고 늘 김정수를 자랑으로 여겼던 아내가 남편을 대신해서 죄값을 치르고 싶다는 유서 한 장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게 김정수가 더는 스타 의사로 살아갈 수 없게 만든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기어이 김정수는 덮어버리자는 현진권의 권유를 거부하며 잘못을 시인했고, 더는 수술하는 외과 의사의 삶을 살지 않겠다는 양심선언을 하면서 기선대학병원에 큰 타격을 입히며 떠나왔다. 

김정수는 그때를 다시 한 번 기억에서 꺼내며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런 인연의 고리가 아직도 이어졌던가. 그 악연이 이제는 딸 수인에게까지 이어지고 있어 김정수는 두 눈에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한편 시후와 수인은 침울했다. 당연히 기뻐하실 줄만 알았다. 비록 시후의 집안에서 반대하고 있음을 숨길 마음이 없었지만, 그래도 힘내라며 위로해 주실 줄 알았다. 그런데 김정수 원장은 단박에 수인과 시후의 결혼을 반대했다. 

충격을 받은 수인과 시후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차 안에 앉아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시후가 수인의 이름을 부르는데 그 목소리가 너무도 슬프게 들렸다.

“수인아.”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있는 수인에게 시후가 다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수인아.”

“네.”

“우리 헤어질까?”

시후의 말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수인은 너무 놀라서 시후의 손을 끌어당겼다. 당연히 허락해 줄 거라 믿었던 김정수 원장의 반대 한 번에 이리도 쉽게 허물어질 사이였던가. 수인은 너무 놀라고 비통해서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러다 한줄기 눈물이 볼을 타고 내렸다. 

“대답해. 울지 말고.”

시후의 표정이 너무 심각했고, 목소리가 떨려왔다. 수인은 울음이 터졌다. 끄억거리며 울음이 터져 나왔다.

“대답해.”

시후의 눈에도 어느새 뜨거운 눈물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수인이 잡고 있던 손을 빼내어 버렸다. 수인은 빼내 버린 시후의 손을 놓치고 기겁을 하며 다시 손을 끌어 잡았다.

“안 돼요. 우리가 어떻게 헤어져. 어떡해.”

수인은 시후를 끌어안으려 허둥거렸다. 그제야 시후가 눈물이 가득 찬 눈으로 수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손을 들어 눈물범벅인 수인의 얼굴을 엄지손가락으로 닦아 내렸다. 

“나 죽어도 오빠랑 헤어질 수 없어요.”

“울지마 바보야. 난 죽어서도 너하고 헤어질 수 없어.”

시후는 수인의 입술에 힘차게 키스를 해왔다. 두 사람이 흘린 눈물이 하나로 모여들었다. 서로를 위로하는 눈물과 뜨거운 키스가 끝없이 이어졌다. 

그렇게 죽어서도 헤어질 수 없다고 마음을 맞춘 두 사람은 이제 더 깊게 서로를 사랑하고 있었다. 지금 당장 부모님의 축복을 받을 수 없음이 슬프기는 했으나 두 사람은 오로지 세상에 두 사람만 존재하는 것처럼 서로에게 더 깊게 빠져들었다. 잠시도 안 보면 안달이 날 만큼 둘은 간절하게 애틋하게 사랑을 했다. 

그들은 서로의 품에서 잠이 들고 새롭게 시작하는 행복 속에서 깨어났다. 함께 하는 수술실에서도 환상의 호흡을 자랑하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였다. 이제 의료원 내에서도 둘은 당당하게 공개 연애를 했고, 보는 사람들마저도 너무 예쁜 커플이라는 칭찬이 자자했다.

“현 과장님은 요새 들어 더 멋져지신 거 같아요.”

“그래요? 난 잘 모르겠던데, 늘 멋있어서.”

“아흐~ 과장님 은근 현 과장님 자랑 심하신 거 알아요?”

수인은 5층 입원실 간호사 데스크에서 시후를 마음껏 자랑하고 있었다. 그런 수인은 씁쓸한 표정으로 보고 있던 진창욱이 얼른 표정을 바꾸고 대뜸 끼어들었다.

“얼마 전 원내 인기 투표에도 현 과장님이 압도적인 1등이셨어요.”

“그죠? 압도적인 1등이라니 하하하.”

수인은 대 놓고 시후 자랑에 열을 내고 있었다. 이젠 완벽하게 끼어들 틈이 없어진 수인이었기에 진창욱은 영리하게 아주 절친한 동료로 노선을 잘 잡았다. 

“두 분 잘 어울리세요.”

“그죠? 이럴 줄 알았으면 더 빨리 사귈 걸 그랬어요. 하하하.”

수인은 주저하고 싶지도 않았고, 감추고 아닌 척하고 싶지도 않았다. 정말 하루하루가 시후 덕분에 행복했고, 사랑을 듬뿍 받고 잘 살고 있었다.

“보기 좋아요. 김 과장님.”

“고마워요. 그럼 나머지 오더는 오후에 또 낼게요.”

그렇게 쾌활하고 따뜻한 에너지를 남기고 수인은 계단을 총총 뛰어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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