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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을 책임져 (66)화 (66/88)

66화

시후의 손을 잡고 시후 부모님이 살고 있는 본가에 첫발을 내디뎠다. 레지던트 수련 시절 레지던트들과 와본 적 있는 곳이었지만 그때는 그저 시후의 후배였고, 지금은 시후의 여자 친구로서 들어섰기에 느낌이 이상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널찍한 정원은 잘 가꾸어져 있었고, 3층짜리 건물은 웅장하기만 했다. 현관에 들어선 시후와 수인을 맞이하는 건 정민선 혼자였다.

수인은 얼른 시후와 잡았던 손을 놓고 인사를 올렸다.

“안녕하세요.”

“어머니, 저희 왔어요.”

불안해하는 시후의 얼굴과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는 수인을 보고 정민선은 어둡지도 밝지도 않은 얼굴로 맞이했다.

“들어와. 아버지 서재에 계신다.”

이미 수 차례 시후에게 들었던 터라 정민선은 수인에 대해 좋게 생각해 보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수인이라면 오래전부터 봐왔고, 예의 바르고 사회성 좋은 아이란걸 알기에 시후의 짝이 될 줄은 몰랐지만 수인 하나만 놓고 보면 그리 나쁘지 않다고 생각은 했다. 

하지만 문제는 시후의 부친 현진권과 수인의 부친 김정수와의 골이 깊어도 너무 깊다는 것이었다. 어쨌든 도희가 제 선에서 시후를 정리하는 듯 흘러가고 있어 정민선은 수인을 나쁘게 보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아버지, 심기가 좋지는 않아.”

귀띔이라도 해주고 싶은 정민선이 앞서 걸으며 말했다. 이미 알고 있는 일이지만 수인은 더욱 위축이 되어 버렸다. 그런 수인의 어깨를 시후가 다독였다. 수인에게 미안한 이 상황이 미치게 싫지만 그래도 용기 내서 먼저 인사 오자고 한 수인이 너무 고마운 시후였다. 

차분한 걸음으로 서재에 당도한 두 사람은 정민선이 열어준 서재로 들어섰다. 

“아버지. 저 왔어요.”

뻔히 보이는 사람들을 투명 인간 취급하듯 현진권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정민선이 조심스럽게 현진권을 불렀다.

“여보. 애들이 인사 왔어요.”

“누가 맘대로 들이라 했어? 당신 이따위로 사람 열받게 할 건가? 나는 아들도 보고 싶지 않다고 분명하게 말했잖아.”

노기가 풀릴 것 같지 않았다. 시후는 실망한 얼굴로 수인을 살폈다. 슬퍼 보이는 수인의 얼굴이 보이니 시후는 한숨부터 나왔다.

“아버지. 인사만 받으세요.”

아예 회전의자를 돌려 등을 보이는 현진권이었다. 미안한 얼굴이 된 정민선이 다시 한 번 간청하듯 말했다.

“여보. 그러지 말고 인사만 받아요.”

“당장 돌려보내! 나에게 이리 강요할 자격을 누가 준 거야?”

현진권의 소리가 거칠게 울려 퍼졌다. 그도 시후가 이도희와의 결혼을 할 수 없다고 선언한 이후 나름의 고초가 있었다. 이 사장은 대 놓고 현진권을 무시하기에 이르렀고, 기선대학병원 원장 자리를 내놓아야 하는 게 아닌지 고심하게 만들었다. 

한국 최고의 대학병원이라는 타이틀을 만들어 놓은 건 누가 뭐라고 해도 현진권의 작품이었다. 그런 곳을 애먼 이유로 놓기란 사실 현진권의 입장에서는 납득할 수 없는 이유였다. 

“여보.”

정민선은 시후 보기도, 수인 보기도 민망해서 현진권을 말리고 싶었으나 현진권의 마음은 아직 굳게 닫혀 있었다.

“나가래도!”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에 수인은 어깨를 움츠렸다. 최악의 시나리오를 생각하며 온 길이었지만 막상 그 현실을 접하고 나니 수인은 눈물이 날 것처럼 가슴이 아팠다. 자신을 부정하는 사람 앞에 의연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제아무리 수술실에서 강심장이고, 제아무리 사회성도 인성도 좋은 수인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은 버티기가 힘들었다. 급기야 수인은 눈물을 보였고, 시후는 그런 수인을 데리고 서재를 나와 버렸다. 

금세 뒤따라 나온 정민선이 수인의 손을 잡았다.

“수인아. 너무 마음 쓰지 마라. 저 양반도 힘든 상황이야.”

“그래도 너무 하시네요.”

시후가 섭섭한 마음을 있는 대로 드러내는데 수인이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제가 죄송해요.”

“네가 죄송할 일인지는 모르겠다. 저 양반도 그저 곤란한 상황이기는 해. 미안하지만 너그러이 이해해 달라고 할 수밖에 없구나.”

정민선은 딱 중간자적 입장을 취하고 싶었다. 너무 수인을 미워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덮어놓고 좋아할 수도 없었다. 이도희와 아들 시후가 결혼을 했더라면 현진권의 마음은 편할지 모르지만 사실 정민선은 그리 편할 것 같지 않았다. 

도희를 부추긴 건 정민선 자신이었지만 아들이 자신과 맞지 않는 이도희와 사느라 힘들어하는 것을 보지 않아 어쩌면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오늘은 이쯤에서 돌아가려무나. 또 기회가 있지 않겠니.”

“어머니. 죄송합니다.”

수인은 허리를 굽혀 인사를 올렸다. 혼자만 떼어 놓고 보면 어디 하나 흠잡을 곳 없는 수인인데 아버지들끼리 골이 깊기에 정민선은 안타까웠다. 

수인은 울먹이며 시후 부모님의 집을 나왔다. 그런 수인을 다독이는 시후의 마음도 한없이 아프기만 했다. 

“수인아. 미안해.”

“오빠가 미안할 일 아니잖아요.”

“그래도. 내가 아버지 대신해서 사과할게.”

그렇게 대신 사과를 해서 수인의 마음이 아프지 않다면 천번 만번이라도 사과를 하고 싶은 시후였다. 그렇지만 수인은 시후가 사과하는 게 싫었다. 

“괜찮아요. 오빠 잘못 아닌데 뭐.”

“고맙다.”

시후는 수인을 끌어안았다. 

드라이브를 하며 기분 전환을 시켜 주고 싶었던 시후는 음악을 크게 틀고 시원하게 달렸다. 

“수인아. 우리 의료원 근처에 전원주택 하나 살까?”

“전원주택이요?”

한없이 가라앉을 땐 의도적으로 다른 화젯거리에 빠져들면 도움이 될 거 같았다. 시후는 그래서 너무 앞서가는 것 같지만 수인과 둘이 행복하게 살아갈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응. 마당이 있었으면 좋겠어.”

“좋을 것 같아요. 나는 내내 아파트에만 살아봤거든요.”

시후의 의도대로 수인이 이야기에 빠져들어 갔다. 시후는 고마운 마음에 한층 더 깊숙하게 이야기를 끌고 갔다.

“이담에 우리 애들 태어나면 마당에서 뛰어놀게 하면 좋겠어. 그치?”

“생각만 해도 즐겁네요.”

“그래? 우리 당장 집 보러 가자.”

활짝 웃으며 시후가 수인을 바라보았다. 수인은 마음을 써주는 시후가 고마워서 그의 손등에 키스를 남겼다.

“근데. 오빠 알다시피 난 모아둔 돈이 없어요.”

“돈? 나 많아. 걱정 마.”

돈을 열심히 벌어도 늘 가난했던 수인을 누구보다 잘 아는 시후였고, 또 시후에게는 물려받은 유산이 꽤 많았다. 

무남독녀 외동딸이던 시후 모친 정민선의 집안에서 시후에게 어마어마한 재산을 미리 상속해 주었다. 후배였던 수인에게 그런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었지만 이제 결혼을 할 사이이니 시후는 진실을 말해주려 했다.

“나 외가에서 유산 상속받은 게 좀 돼. 청단동에 8층짜리 빌딩이 하나 있고, 압구동에 30세대 입주해 있는 오피스텔 건물이 하나 있어. 얼마 전에 연이동 주택 하나는 처분했어. 

그리고 외할아버지 회사 주식 지분이 꽤 있어. 그건 확인을 안 해봐서 지금 얼마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그것도 100억은 돼. 그리고 제주도에 말 목장이 하나 있고, 공항 근처에 쇼핑몰 들어와 있는 건물이 하나 있어. 현금은 4억 정도 있는 것 같다. 주로 월세 들어온 돈.”

줄줄 끝도 없이 나열되고 있는 시후의 재산 이야기에 수인은 숨이 턱 하고 막혔다. 의대 때도 레지던트 때도 시후가 부자라는 소문은 익히 들었다. 

자세한 건 알수 없는 일이었지만 보기에도 부티가 줄줄 나는 외모였고, 그의 조부와 부친, 일가친척이 내로라하는 의료계의 거물들이어서 그런 줄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런 재력가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재벌이었어요?”

“뭐 이 정도 가지고 재벌씩이나. 그냥 좀 운이 좋아서 많이 가지고 있는 정도지.”

수인은 물끄러미 시후를 바라보았다. 뭐라고 해야 할지도 몰랐고, 어떤 감정을 가져야 할지를 몰라서 어리둥절했다.

“너 하나 먹여 살리는 건 걱정하지 말랬잖아.”

“나 하나가 아니고 수백 명도 먹여 살리겠네요. 기분이 이상해요.”

정말 뭐라고 표현을 해야 할지 몰랐다. 갑자기 내 남자친구가 부자라서 더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좋다고 하면 속물이 되는 것 같았다.

“넌 아무 걱정 하지 말라니까. 내가 다해. 네가 걱정할까 봐 이야기 한 거야. 그리고 결혼할 거니까 미리 밝혀두는 거고.”

“그래도 너무 이상해. 내 남자친구가 재벌이었어. 이상해.”

수인은 중얼거리며 충격을 털어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또 얼마나 예쁜지 시후는 껄껄 웃었다. 

“재벌 아니라니까. 그래서 싫어?”

시후는 호들갑스럽게 좋아하지 않는 수인이 더 마음에 들었다. 

“싫은 건 아니고. 모르겠어요.”

“내가 말했잖아. 네가 자선의원 차기 원장 하고 싶으면 하면 된다고.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지? 넌 하고 싶은 거 해. 돈은 오빠가 열심히 벌 테니까. 알았지?”

수인은 감동이 막 밀려들어서 가슴이 뻐근했다. 생각하지 못한 감동을 막 투척하는 시후 때문에 수인은 좋으면서도 또 한편 미안했다.

“오빠한테 그런 부담 주기 싫어요.”

“그게 왜 부담이야? 그리고 남편 뒀다가 뭐에다 쓰려고 했어?”

이내 능글거리게 웃어 보이는 시후 때문에 심각했던 마음을 오래 끌고 갈 수도 없었다. 수인은 피식 웃었다. 

“자꾸 웃기지 말아요.”

“그래. 뭐 남편으로서 밤에도 짱 멋지기는 할 테지. 무엇이든 열심히 할 테니까 시켜만 주십시오.”

시후가 마치 오디션을 보는 신인 배우처럼 대사를 하는 통에 수인은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이리도 멋질 수가 있을까. 가진 것이 많지만 티를 내지 않으면서도 수인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아낌없이 해주겠다는 멋진 마음까지 어느 하나 껄끄럽게 볼 수 없는 남자였다. 마주보고 웃고 있으니 참 좋을 뿐이었다. 

그러나 시후는 이렇게 미리 말하는 이유가 또 있었다. 이제 저 앞에 자선의원이 보였다. 비록 시후의 아버지는 노발대발할 일이었지만 항상 시후를 예뻐하시는 김정수 원장님에게 당당히 교제 사실을 밝히고 이제 곧 결혼도 하겠다고 말씀드릴 생각을 하니 가슴이 콩닥거리며 떨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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