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분위기를 괴기스럽게 몰아가는 도희에게 한 친구가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넌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데? 야야. 분위기 이상하게 만들지 마.”
“그래? 내가 이상하게 만드는 건지 한번 들어볼래?”
도희는 수인과 딱 정면에 마주 앉았던 친구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섰다. 친구들은 눈살을 찌푸리면서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그러자 도희는 방긋 웃어 보였다. 그 모습마저 친구들은 이상하게 여기며 도희를 쳐다보았다.
“있잖아. 너희 내가 올겨울에 결혼한다는 거 다 알고 있지?”
제 입으로 하도 말한 일이라 별로 관심은 없어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이기는 했다. 그래서 친구들은 그저 대답 없이 도희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수인은 일어나고 싶었다. 저 입에서 무슨 생떼 같은 이야기가 나올지 뻔했고, 이렇게 친구들 앞에 까발리고 싶은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하고 결혼하려던 남자, 집안끼리 20년 전부터 결혼 이야기 주고받던 남자였거든? 근데 바람이 났어. 누구하고 났냐면, 선배선배하며 쫓아다니던 여자하고.”
“어머. 미친년이다.”
누구 하나가 도희의 말에 반응을 보였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비슷한 반응의 말들이 쏟아졌다.
“소름 끼쳐. 별 미친년 다 보겠네?”
“그걸 가만히 뒀어?”
도희의 말에 감정 이입이 되어 버린 친구들은 알지도 못하는 대상이지만 부도덕한 사람 취급을 하며 욕을 서슴지 않았다. 그러다 이상한 낌새에 또 누군가 말했다.
“그게 수인이 남자친구랑 무슨.”
상관이냐고 채 묻기도 전에 다들 수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수인은 당황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얼굴에 핏기가 싹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몸이 그냥 떨려왔다.
“수인아.”
“아니야. 아니야. 애들아.”
겨우 할 수 있는 말은 앞뒤도 없는 부정하는 것. 그렇지만 너무 당황하여 뭐라고 부연을 해야 할지 몰랐다.
“좀 전에 수인이 남자친구, 오래 알던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어?”
조용하던 친구들이 제각기 삼삼오오 쑥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더러는 제법 큰 소리로 말을 하기에 수인은 덜컥 겁을 집어먹었다. 덜덜 떨고 있는 수인을 향해 도희의 칼날 같은 시선과 말이 공격해왔다.
“아니긴 뭐가 아니라는 걸까? 내 정혼자와 놀아난 주제에. 결혼도 다 엎어지게 만든 주제에. 뭐가 아니라는 거니? 김수인!”
모두가 수인을 향해 시선이 모여들었고, 수인은 도망치고 싶었다. 친구들 앞에 너무도 수치스러웠다.
“김수인 이 망할 기지배가 내 정혼자를 도둑질했다고. 애들아 똑똑히 봐 둬. 김수인의 본 모습을.”
아니라고 변명을 하고 싶지만 친구들의 실망하는 눈빛이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할 것을 알려주었다. 강심장인 수인은 어찌해야 할지 몰라 그냥 떨고만 있었다.
그때, 수군거리는 소리가 하나둘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중에 수인과 제일 친한 친구가 이도희에게 따지듯 물었다.
“이도희. 너 지금 여기서 뭐 하자는 거야? 왜 남의 잔치에 와서 분위기 망치는데?”
“그래.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친구들이 도희가 하는 말의 진위확인을 떠나 남의 돌잔치에 와서 이렇게 패악질을 부리는 도희를 몰아세웠다.
“너희 김수인 본모습 보고도 두둔하고 싶니? 얘. 불륜도 막 저지르는 애라고. 잘 봐. 아무 말 못하잖아.”
도희는 나서서 제 편을 들어주지 않는 친구들에게 화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또 한 친구가 떨고 있는 수인을 쓱 쳐다보고는 입을 열고 나섰다.
“막말로 너 결혼식 한 것도 아니잖아. 그리고 나 의심이 드는데. 진짜 이도희 네 말이 맞는다면 증거를 내놔봐.”
“그래. 너 원래 궁지에 몰리면 거짓말 잘했잖아. 수인이 전교 회장 됐을 때도 너 수인이 욕 많이 하고 다녔잖아.”
“맞아. 쌤들 하나같이 네 편만 들고, 수인이 몰아붙이고, 괴롭히고, 우리 그거 다 알거든!”
갑자기 수세에 몰린 건 이도희가 되어 버렸다. 수인은 울음이 터져 나올까 봐 한 마디도 못 하고 고개를 숙인 채 떨고 있었다. 그러자 옆에 친구가 수인의 어깨를 감싸주었다.
“김수인이 그랬다면 이유가 있겠지. 그리고 이도희, 우린 네 편 들어줄 마음 없다.”
“이 미친년들이! 다들 눈이 삐었어? 귀가 먹었어?”
이도희가 완전히 미친 사람처럼 눈 흰자위가 돌아가서는 악을 써댔다.
“그래. 우린 눈멀고 귀먹었다! 어디 남의 잔치에 와서 민폐를 끼치고 난리야? 당장 꺼져!”
오늘 돌잔치 주인공이자 수인의 친구가 벌떡 일어나 이도희를 향해 삿대질을 해댔다. 그러자 다른 친구들도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짜 이도희. 하나도 안 변하는구나? 근데 얘 누가 불렀니? 다음부턴 부르지 마. 이게 뭐야?”
“맞아. 너 이도희, 맨날 지 아빠 빽만 믿고 언제까지 이러고 살래?”
고등학교 내내 쌓인 게 많았던지 친구들은 돌아가며 이도희에 불만을 쏟아내었다. 결국 돌잔치 주인공은 자기 남편을 시켜 이도희를 거의 끌어내다시피 밖으로 내보내 버렸다.
수인은 돌잔치를 어떻게 치르고 나왔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냥 하염없이 걷다가 걸려 온 전화를 받고 보니 지금 어디를 걷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희윤의 차가 깜빡이를 켠 채 수인에게 다가왔다. 수인을 보자마자 희윤이 달려왔다.
“수인아. 괜찮아?”
“어? 어.”
“일단 타. 가자.”
희윤이 수인의 어깨를 감싸고 차에 태웠다. 수인은 희윤의 차에 타자마자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서럽게 우는 수인을 희윤이 위로했다. 이도희를 미친 듯이 대신 욕해 주었지만 수인의 울음은 그치지 않았다.
“수인아. 일단 진정 좀 해. 시후 선배가 술을 한잔해서 내가 너 데리러 온 건데. 내가 오길 잘한 거 같아.”
별별 이야기를 다 해도 부끄럽지 않은 친구 희윤이었지만 도저히 오늘 이 울음에 대해서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돌잔치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래? 혹시 이도희가 또라이 짓 했어?”
대답이 없지만 예감할 수 있었다. 이도희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거란 것도 희윤은 잘 알았다. 희윤의 엄마에게 도희가 어릴 때부터 바이올린 수업을 받아왔기에 자주 마주쳤고, 이렇게 저렇게 얽히어 있기에 전후 사정 또한 설명하지 않아도 제일 잘 아는 희윤이었다.
“희윤아.”
“응.”
“시후 선배한테는 말하지 말아줘.”
“그래. 알았어.”
시후에게 이 일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또 한 번 미안하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고, 그는 수인에게 미안할 일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수인이 울었다면 분명 제 탓인 듯 미안해할 남자였다.
“진정 좀 돼?”
“응.”
“화장 다 번졌어.”
희윤은 주차를 하고도 차분하게 오랫동안 기다려주었다. 부어오른 눈이 좀 어색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많이 평온을 찾았다. 희윤이 수인의 어깨를 잡아 돌렸다.
“어디 봐. 시후 선배 귀신같이 알걸?”
“그렇겠지? 눈 많이 부었어?”
“안 되겠다. 이리 얼굴 내밀어.”
희윤은 제 파우치를 열어 수술 도구 펼치듯 주욱 펼쳤다. 그리곤 고심하는 얼굴로 아이섀도를 집어 들었다.
“지금 상태로는 스모키 화장밖에 방법이 없겠어.”
“진단이 그것밖에 안 나와?”
불안한 얼굴이었지만 수인은 희윤에게 매달리는 심정으로 쳐다보았다.
“응. 기다려봐. 내가 이래 봬도 코스메틱에 관심이 많잖아.”
희윤은 실력을 마음껏 발휘하여 수인을 완전 다른 여자로 만들어 놓았다. 거울을 들여다본 수인도 화들짝 놀랐다. 그리고 또다시 걱정스런 얼굴로 희윤을 보았다.
“괜찮은 거야? 나 아닌 것 같은데?”
“음. 예뻐. 예뻐. 완전 섹시해. 할리우드 배우 같다.”
그 말에도 용기는커녕 더 안으로 말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어서 수인은 머뭇거렸다. 그런 수인의 어깨를 다독이며 희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 예뻐. 진짜야. 얼른 가자. 저기 나의 남자와 너의 남자가 보이는구나.”
희윤의 말에 수인은 고개를 들었다. 시후를 보며 눈물이 흘러 버릴까 걱정이 되었지만 또 어서 빨리 보고 싶었다.
시후는 수인의 얼굴을 보고 너무 깜짝 놀라버렸다. 항상 수수하게 화장을 하거나 맨얼굴이었던 수인이기에 짙은 화장한 모습이 너무 낯설었다. 그렇지만 또 이런 모습이 이렇게 어울리는 줄 몰랐다.
“오빠.”
“야~ 김수인 맞아?”
재건이 더 놀라서 막 웃어댔다. 시후는 눈을 깜빡거리며 수인을 쳐다보았다. 침을 꿀꺽 삼키며 시후가 겨우 손을 내밀었다.
“예쁘죠? 수인이가 꾸밀 줄을 몰라서 그렇지 얘 진짜 예쁜 얼굴이거든요. 어때요?”
“예뻐.”
눈가를 짙은 회색으로 과감하게 칠하고 아이라인을 두껍게 그려 올렸다. 펄도 과감하게 넣어 놓아서 자체 발광이 나는 듯 보였다.
“술 많이 마셨어요?”
얼굴을 너무 빤히 보고 있는 시후에게 수인이 넌지시 말했다.
“아니. 이제 두잔 째.”
“김수인 갈수록 내가 알던 그 김수인이 맞나 싶은데?”
시후가 하고 싶었던 말을 재건이 대신하고 있었다.
“아. 뭐해요? 다 모였으니 한 잔 하자. 자꾸 딴소리들만 하고 그래?”
“그러자. 아. 오늘 나이트라도 가야 하나? 우리 나이트 갈까?”
재건과 희윤은 분위기를 한껏 즐겁게 만들고 있었다. 시후는 수인이 울었던 걸 알아채지 못했고, 수인도 내색하지 않고 그저 재건과 희윤이 만들어 주는 즐거운 분위기에 빠져들어 갔다. 그러면서도 수인을 알뜰살뜰하게 챙겨주는 시후를 느낄 때마다 울컥하기는 했다. 이 남자 하나 얻는 게 이리도 많이 아프지만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남자임을 느끼고 또 느꼈다.
***
무척 긴장한 수인을 시후가 심호흡을 함께 해주며 안심을 시켜주었다.
“오빠. 괜찮을까요?”
막상 도착하고 보니 수인의 가슴은 미친 듯이 뛰어서 진정이 되질 않았다.
“미안해. 이렇게 힘들게 만들어서.”
시후는 수인의 뺨에 손을 올려 어루만졌다. 미안한 마음 가득 담긴 애처로운 눈을 하고 있기에 수인의 마음은 더없이 무거웠다.
“그동안 어머니는 많이 부드러워지셨어.”
매일 매일 시후를 설득하던 정민선이 어느 순간부터 시후에게 설득을 당해 버렸다. 그렇지만 정민선은 남편 현진권의 눈치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런 정민선에게 인사를 드리자고 수인이 시후에게 먼저 요청하여 도착한 지금이었다.
“너무 떨려요.”
긴장을 너무 해버린 티가 나는 수인에게 시후는 마지막 당부같이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먼저 마음 써주는 것도 고맙지만 더는 수인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았다.
“수인아. 딱 여기까지만 하자. 인사만 드리고 잊어버리는 거야.”
“알았어요. 오빠가 계속 말했잖아요. 그렇게 할게요.”
그는 부모님이 끝까지 반대를 하신다면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우격다짐으로 억지로 두 사람의 결혼을 찬성해 달라고 할 수 없었고, 아버지도 포기하는 게 무엇인지 스스로 느낄수 있는 시간을 주고 싶었다. 그래서 오늘 자식 된 도리로 결혼하고 싶은 여자 김수인을 소개하고 딱 여기서 멈추고 싶은 시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