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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을 책임져 (64)화 (64/88)

64화

시후가 너무도 정확하게 자신을 뚫어지게 보는지라 그와 눈을 맞출 수가 없었다.

“남승우 씨. 그럴 용기 있으면 사랑하는 여자 붙잡아요. 엄한 데 와서 뻘짓하지 말고.”

험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시후는 강하게 말하고 싶었다. 생각할수록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었다. 

자신이라면 그럴 수 있었을까. 수인을 쳐다보는 다른 놈들의 시선조차 견디기 싫었다. 수인이 풀파티에서 다른 남자와 피부가 닿기라도 할까 봐 피가 치솟았다. 

그런데 이 남자 남승우는 지금 자신에게 도희와 결혼을 해주라고 그 부탁을 하러 왔다고 한다. 같은 남자로서 승우가 너무도 못마땅했다. 

“가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이도희 잡아요. 알았어요?”

“저는, 그냥 이대로도 좋습니다.”

멍청하다는 말이 툭 튀어 나올뻔했다. 시후는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어쩌면 자신도 이렇게 자신 없는 모습이었는지 몰랐다. 수인이 밀어낼 때 그저 밀려났으니까. 

“와. 말 안 통하는 게 이도희와 천생연분이네. 나는 결혼할 여자가 있습니다. 이제 곧 결혼할 생각이고요. 그러니 이런 말도 안 되는 부탁이 내 여자에게 얼마나 무례한 일인지 아셨으면 합니다.”

남승우의 한숨이 시후에게까지 와 닿았다. 

“이도희는 그 버릇 고쳐야 합니다. 뭐든 제 맘대로 안 되면 집착하고 기어이 움켜쥐려는 나쁜 버릇. 단지 나에게 그런 감정이니 잘 다독거려봐요. 좋아하는 남자로서.”

끝내 대답을 하지 않는 남승우를 남겨 놓고 시후는 진료실로 내려왔다. 도희를 좋아해서 이렇게라도 그녀의 문제를 해결해 주고 싶었을 남자의 마음이 이해되면서도 이해하기 싫었다. 그저 찝찝한 만남이었다고 생각하며 시후는 털어내듯 한숨을 내쉬었다. 

기다리던 퇴근 시간, 시후는 또다시 수인의 진료실을 기웃거렸다. 오후 수술이 늦어졌다기에 대신 외래 환자도 다 봐줬는데 아직 일이 안 끝났는지 진료실 문이 닫혀있었다. 시후는 가식적인 미소를 잔뜩 지은 채 수인의 담당 간호사 책상에 다가갔다. 시후를 보고 담당 간호사는 묻기도 전에 이실직고하였다.

“의뢰서 써달라는 환자가 있어서 작성하고 계세요.”

“아~”

고개를 끄덕인 시후는 뭐가 촉박한 사람처럼 시계를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며 복도가 닳도록 서성거렸다. 보다 못한 담당 간호사가 수인의 진료실에 노크를 하고 들어갔다. 조금 후 간호사는 아예 수인의 트렌치코트와 핸드백을 직접 들고 수인의 등을 떠밀어 냈다.

“퇴근 좀 하세요. 저도 빨리 집에 가고 싶어요.”

“아. 미안요. 전화할 데가 있어서.”

“당장 죽고 사는 전화 아니면, 전화는 댁에 가서 하시구요.”

이미 떠밀려 나온 수인은 바로 코앞에 서 있는 시후를 보고 입술을 말아 물었다. 밤부터 동이 터오는 아침까지 내내 괴물 같은 체력으로 덤벼오는 터라 요새 코피가 터질 지경이었다. 수인은 헤벌쭉 웃고 서 있는 시후를 보니 그냥 웃음이 나왔다.

“끝났어?”

“네. 끝났네요. 갑시다.”

“그럴까?”

또 뭘 기대하는지 시후는 발걸음이 날아가는 듯 가벼워 보였다. 

그는 차에 올라타기가 무섭게 수인의 허리를 감싸 끌어당기고 딥키스를 해댔다. 숨도 쉬지 못하고 그의 진하고 깊은 키스를 받아내느라 수인은 기진맥진했다.

“하흣!”

“어디 보자. 푸딩~ 젤리~ 잘 지냈어? 하루종일 갇혀 있느라 수고가 많네.”

슬그머니 엉큼한 손으로 수인의 블라우스를 벌리는 통에 수인은 벌써 기가 쇠했다. 이젠 밀어낼 힘도 없이 중얼거렸다. 

“이러다 진짜 나 임신하면 어떡해요?”

“축복이지. 얼마나 좋아. 낳아만 줘. 내가 다 업어 키울 테니까. 걱정하지 마. 응? 오빠 믿지?”

물론 수인도 시후 닮은 아이를 갖고 싶었지만 너무 몰아치는 통에 눈을 꼭 감아버렸다. 그러다 풀어 헤쳐진 블라우스를 억지로 잡아당기며 수인이 날카롭게 말했다.

“진짜 피임도 안 하고! 의사라는 사람이 어떻게 그래? 피임약도 못 먹게 하고?”

“피임약이 몸에 얼마나 안 좋은데. 그딴 걸 왜 먹어.”

이건 문명이 뭔지를 배운 적 없는 그런 사람의 입에서나 나올법한 말이었다. 수인은 자꾸 치근거리듯 가슴을 만져대는 시후의 손등을 내리쳤다.

“진짜 재건 선배 방법이 맞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나쁠 거 없잖아. 우리 지금도 나이가 꽤 있어. 앞으로 다섯 명 낳으려면  쉴 틈이 없지.”

자기 맘대로 벌써 가족 계획까지 마친 듯 시후의 발언은 거침이 없었다. 수인은 이제 와서 후회한들 소용없고, 후회할 수도 없음을 알지만 이러다 정말 올해 안에 애부터 덜컥 가지게 될 거 같았다. 그렇다고 싫은 건 아니지만 괜히 심술을 부리고 싶은 수인이었다. 

“자기 맘대로 다섯 명이래?”

“얼마나 예쁘겠니? 내 금쪽같은 새끼들 빨리 보고 싶다.”

손등을 찰지게 얻어맞아도 또 시후의 손은 푸딩과 젤리와 재회를 하고 있으니 수인은 그저 포기하는 편이 속이 편했다.

“아직 아버지한테 오빠 사귄다는 말도 안했다고요.”

“차차 하면 되지. 어차피 손자 앞에선 솜사탕이래.”

이럴 때 보면 영락없이 바보 같았다. 말귀 빨리 못 알아듣는 재건 선배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했던 자체를 취소하고 싶어지는 순간이었다.

“저녁 뭐 먹을까? 소고기 먹을까?”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수인을 무척이나 잘 챙겨 먹였다. 그래놓고 잠을 안 재워서 그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주말이 다가왔고, 수인은 간만에 고등학교 동창 친구 딸 돌 찬치에 얼굴을 내밀어 볼 생각이었다. 굳이 돌잔치에 따라가겠다는 시후를 재건에게 신신당부를 하여 겨우 말렸다.

“끝나면 전화해. 바로 데리러 올 테니까.”

“몰라요. 오랜만에 애들 만났는데 술도 한 잔 하겠지.”

수인이 시후의 차에서 내리려다 다시 잡혔다. 시후가 수인의 손목을 꽉 잡아서 수인이 시후의 손을 깨물었다. 아픈 척도 안 하고 시후가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아이참. 금세 갔다 온다고요.”

“술 안 돼.”

단호한 시후 때문에 수인은 어깨를 마구 흔들었다. 출렁출렁 푸딩과 젤리가 반항의 춤사위를 추고 있었다.

“많이 안 마실게요. 애들이 오늘 뭉치자고 난리였다고요.”

“안 돼. 임신 계획 중이라서 금주라고 그래.”

“꺄!”

수인이 아무리 비명을 질러도 시후의 표정은 끄떡없이 근엄했다. 그런 시후의 허벅지를 손으로 꼬집어 버렸다.

“왜 자꾸 임신을 못 시켜 안달 난 변태같이 그래요?”

“꼭 그런 거 아니고. 우리가 사랑을 자주 나누기는 하니까. 기대를 한다는 거지. 내 말은.”

또 어느새 순둥이 강아지 같은 눈을 하며 쫑알쫑알 말을 이었다. 덩치와 체력은 북극곰이면서 강아지의 탈을 쓰려고 하니 수인은 기가 막혀왔다.

“아 진짜!”

“그러니까. 혼인신고부터 하자. 응? 결혼식은 그저 형식적인 거지. 그게 뭐가 중요해?”

하나 틀린 말은 없었지만 수인은 그래도 부모님께 허락을 산뜻하게 받지 못하는 처지라고 생각하니 이 행복이 마냥 행복한 건 아니었다.

“아. 그 옛날 멋지던 현시후 선배님 보고 싶다.”

“인생 다 그런 거야. 오빠오빠하다가 여보여보하는거지.”

능글맞기로는 세계 선수권 대회 우승자 같기만 했다. 모두가 껌뻑 넘어갈 것 같던 미소도 이젠 능글거렸다. 그러다 시후가 수인의 손을 번쩍 들어 확인을 했다. 분명 그 샛노랗고 굵다란 순금반지를 찾는 것 같았다. 

슬그머니 핸드백에서 빼두었던 반지를 꺼내서 시후가 보는 앞에서 끼웠다. 매일 수술을 하는 사람이라 액세서리를 할 수 없다는 걸 서로 잘 알기에 왜 뺐냐고 따질 수 없지만 이런 대외적인 자리에선 꼭 착용하기로 약속을 했었다.

“볼 때마다 할머니 같아. 큭큭큭.”

“다음엔 발에다 차는 커플 아이템을 해야겠다.”

아무리 수술을 해도 발까지 씻거나 하지는 않으니 하는 말이었지만 수인은 박장대소했다. 상상만으로도 웃음이 터졌다.

“아. 뭐야. 누가 커플 발찌를 해요?”

“필요에 따라 응용해야지. 그나저나, 김수인. 술 안 돼.”

수인은 잔소리에 집중하는 시후에게서 후다닥 달아나 버렸다. 차에서 내려 뛰어가는 그녀의 뒤통수에 대고 시후는 소리를 질렀다.

“김수인. 사랑한다~”

들을 사람 다 들을 수 있을 만큼 큰 소리였다.

아니나 다를까. 돌잔치에 모여들던 친구 중 하나가 수인의 어깨를 툭 쳤다. 수다 삼매경에 빠져있던 수인은 방긋 웃으며 옆을 돌아보았다.

“김수인. 너 남친 완전 박력 짱이던데?”

“응?”

“아~ 나도 들었다. 올라오면서.”

다들 들었다며 하나둘 증인들이 나서기 시작했다. 수인은 부끄럽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하고 어쩔 줄 몰라 했다.

“나 얼굴도 봤다~”

그 와중엔 차에 타고 있던 시후의 얼굴을 봤다는 증인까지 나섰다. 다들 흥분의 도가니가 되어 수인의 생애 첫 남자친구에 대해 기대감이 한없이 부풀어 올라갔다.

“어떻게 만난 거야? 언제부터야? 아우 기지배.”

“누구야? 뭐 하는 사람?”

“잘생겼어? 사진 좀 보자.”

여자 친구들의 관심사는 죄다 수인의 남자친구에게 쏠렸다. 지금 돌잔치 축하 차 와 있다는 사실도 다 까마득하게 잊은 듯 그랬고, 심지어 돌잔치 주인공인 애 엄마까지 합세를 하여 더 요란해졌다.

“말 좀 해봐. 누구야? 얘 말로는 엄청 잘생겼다는데? 사진 좀 보여줘라.”

“오래 알고 지내던 사람이야.”

“어머 어머!”

여자들은 자기 친구의 남자친구 이야기라면 다 제 이야기처럼 듣는 경향이 있었다. 어찌나 감정 이입도 잘하는지 다 같이 흥분해서는 설렘 가득한 얼굴로 다음 이야기에 목말라했다.

그때, 어디선가 웃음소리가 들려왔는데, 소름이 끼치는 그런 웃음소리였다. 수인에게 몰려 있던 시선이 웃음소리가 나는 곳으로 향했다. 

“어머. 이도희 아니야? 쟤 웃음소리였어?”

쑥떡 거리는 친구들 사이로 이도희가 걸어왔다. 그리곤 테이블 위에 팔을 괴고 손끝에 얼굴을 올렸다. 하는 짓이 하도 얄궂어서 친구들의 시선이 떼어지지 않았다. 도희는 뱀처럼 차가운 시선으로 수인에게 집중했다.

그러자 친구들 모두 도희의 시선을 따라 수인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이 상황이 뭔지 알아내려고 친구들의 시선이 이쪽저쪽 어지럽게 얽혀들었다. 도희는 또 한 번 소름 돋는 웃음소리를 내더니 얄미울 정도로 입술을 벌리고 말을 꺼냈다. 

“내가 말해줄게. 김수인이 지금 만나는 그 남자.”

수인은 심장이 딱 멈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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