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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을 책임져 (63)화 (63/88)

63화

아직 초저녁이고 잘만하면 2시간짜리 영화는 넉넉하게 볼수 있을것 같은데 시후는 고개까지 저어댔다.

“아. 맛있겠다. 근데 맥주가 빠져서 서운한데요?”

“술은 일단 안 돼.”

수인은 맥주 한 모금이 아주 간절했지만 시후가 금주를 하고 있는 상태이니 이해했다. 어쨌건 탄산 한모금, 치킨 한조각 사이 좋게 나눠 먹으니 매번 먹는 치킨이지만 맛이 더 좋은 것 같았다. 먹다 보니 치킨도, 먹을 것도 다 동이 났다. 

그러자 이번에 시후가 양치를 하라며 독촉을 했다. 암튼 깨끗한 남자친구 만났으니 따를 수밖에 없다며 수인은 나란히 서서 양치를 했다. 함께 서서 거울을 보고 있는 것도 웃음이 나올 만큼 그냥 좋았다. 

“이젠 뭐해요?”

“이제 본론에 들어가 볼까? 든든하게 먹었지?”

시후가 눈을 반짝이며 묻기에 수인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재킷에서 무언가 꺼내 바지 주머니에 감추고 돌아왔다. 행동이 뻔히 보이기는 하지만 궁금해서 수인이 물었다.

“뭘 감춘 거예요?”

“안 감췄는데. 골라봐. 오른쪽, 왼쪽.”

양쪽 바지 주머니를 탁탁 치며 말하기에 수인은 고심하는 척했다. 오른쪽은 불룩 솟아있었고, 왼쪽은 납작했다. 

“어떤 게 좋은 건데요?”

“음. 둘 다 좋을걸? 빨리 골라봐.”

장난꾸러기 같은 눈을 하면서 시후가 웃었다. 고심하는 척했지만 얄팍한 것보다 두툼한 게 왠지 더 끌렸다. 그래서 수인이 오른쪽을 톡 건드렸다.

“좋은 선택이었어.”

오른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더니 쑥 하고 꺼내었다. 얼마나 작기에 큼직한 시후의 손안에 쏙 쥐어져서 보이지도 않았다.

“장난치는 거죠? 아무것도 없는 거 아닌가?”

의심의 눈초리를 하고 있던 수인 앞에 시후가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20년 전에 봄 직한 핑크 플라스틱 큐브 안에 샛노랗고 굵다란 가락지가 두 개 들어있었다. 수인은 보자마자 웃음이 막 터졌다. 

“설마 순금이에요?”

“응. 이거밖에 없대.”

“와~ 커플링을 순금으로 하는 사람도 있어요?”

“아무거면 어때. 손 내놔봐.”

노란색이 황홀할 정도로 샛노랬지만 시후의 표정은 너무도 진지했다. 수인은 웃음이 나오려다가 시후를 보고 입을 꼭 다물었다. 시후는 그중 반지 하나를 집어 수인의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김수인. 나랑 결혼해줄래?”

“어머!”

수인은 깜짝 놀라서 입을 틀어막았다. 말로만 듣던 결혼 프러포즈의 순간이었다. 치킨을 배불리 먹고 받은 프러포즈.

“대답해야지. 예스야, 노야”

“예스.”

냉큼 답하는 수인이 너무 귀여워서 시후는 귀에 입이 걸릴 만큼 흐뭇하게 웃었다. 그리곤 으스러지게 껴안는 시후였다. 

“고마워. 평생 잘할게. 120년 너만 사랑할게.”

“사랑해요.”

“사랑해 수인아.”

둘은 뜨거운 키스를 나누었다. 그러다 슬그머니 또 수인의 가슴에 손을 올리는 시후 때문에 수인이 입술을 떼어냈다.

“허허!”

“허허! 왼쪽 주머니 꺼내 봐.”

시후가 당당한 얼굴로 왼쪽 바지 주머니를 탁탁 치기에 수인은 그 안에서 종이를 하나 꺼내었다.

“뭐예요?”

“뭐긴. 김수인을 위한 선물이지.”

느끼한 말투에 수인은 한번 흘겨본 뒤 종이를 펼쳤다. 그리곤 놀라서 입을 틀어막았다. 오늘따라 보고도 믿을 수 없고, 듣고도 믿을 수 없는 말이 왜 이리 많은지 도깨비한테 홀린 것만 같았다.

“맞지? 됐지?”

“말도 안 돼요! 겨우 한 달 만에 다 붙었다고요?”

“우길 생각하지 마. OS 선생님 도장 콱 찍혀 있는 거 확인했지?”

시후는 당당하고 떳떳한 얼굴로 활짝 가지런한 치아까지 내놓고 웃었다. 수인은 기가 막혔다. 적어도 2개월 이상이 걸리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꼼짝 안 하고 누워만 지낸 것이 아니고 수술도 하고 웬만한 진료는 다 했기에 더더구나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 그래요?”

“뭘 어떻게 그래? 너무도 간절하니 하느님이 보우하사. 응?”

“아무리 그래도. 이건.”

다른 말 더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시후의 절제되었던 본능이 미친 듯이 터져 나왔다. 수인의 티셔츠는 벌써 저 멀리 날아갔다. 입고 있던 트레이닝 바지 또한 언제 벗겨졌는지 속수무책으로 몸에서 나가떨어졌다. 

“어머. 오빠. 잠깐만.”

“잠깐 안 돼. 우린 이제 달성해야 할 목표가 있어서 더는 안 되겠어.”

시후의 자극에 정신이 아득해져서 수인은 그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이 남자, 10년을 굶주린 늑대처럼 수인에게 달려들었다. 

“엄마야~”

“엄마 찾지 마. 오빠만 믿어. 알았지?”

탐스러운 수인의 가슴을 내려다보며 시후는 감격의 눈물이라도 흘리고 있는 거 같았다. 

“반갑다. 너무 반갑다. 두 눈으로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잖아.”

“어머~ 잠, 잠깐만요. 꺅!”

꺅! 아무리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러대도 당당한 이 오빠를 막을 수 없었다. 갈비뼈가 붙기만을 얼마나 손꼽아 기다렸는지 시후의 간절한 기도를 들었더라면 수인은 지금 참회의 눈물을 흘려야 했다. 그런 시후를 더는 막을 수 없었고, 어쨌든 수인은 지금 시후와의 결합이 너무 좋았다. 

땀을 뻘뻘 흘린 시후가 이젠 좀 지쳤는지 수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풀썩 쓰러졌다. 

“하. 아. 너무 좋아서 죽을 것 같다.”

“오빠.”

수인이 시후의 젖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스르륵 수인의 가슴까지 미끄러져 내려온 시후가 탱글하고 풍만한 수인의 가슴에 뽀뽀를 하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아직도 미스터리해. 이 사이즈를 어떻게 몰랐지?”

“부끄럽게 왜 그래요?”

“부끄럽긴. 아주 예뻐 죽겠는데. 언제 이렇게 대견하게 자랐을까?”

시후의 한마디 한마디에 수인은 부끄러워서 몸을 비비 꼬아댔다. 그리곤 가슴에 이불을 끌어와 덮어버렸다. 시후는 잽싸게 이불을 걷어 던지며 근엄하게 말했다.

“가리지 마. 감상 중이잖아.”

“뭘 감상해요?”

“이름을 붙이고 싶어. 이 감촉 그대로 오른쪽은 푸딩. 왼쪽은 젤리. 오, 이름도 예쁘고, 외모도 예쁘고 푸딩과 젤리, 걸그룹 같지 않아?”

이름 붙이고 어찌나 만족하는지 푸딩과 젤리를 쓸어안고 웃어댔다. 수인은 머리가 띵했다. 이 남자 까도 까도 색다른 양파 같은 이 느낌 뭐지. 수인은 따라 웃을 수도 없어 울상을 지었다.

“제가 12년 따라다녔던 그 현시후씨는 영영 지구상에서는 만날 수 없나요?”

“응. 아마 이번 생 끝나도 못 만날걸? 그치 푸딩~ 오구 젤리 삐지면 안 돼~”

부끄러우면 어떠하리. 사실 부끄러움보다 그의 살갗을 쓰다듬고 있는 지금이 비교할 수 없이 행복한 수인이었다. 수인은 완벽하게 사랑받고 있는 지금 기분이 너무 좋았다.

“수인아. 자?”

“졸려요.”

“그래. 자. 아침에 또 해도 되지?”

체력이 국가 대표 뺨치는 남자친구를 둔 건 행운인 건가. 수인은 달콤하고 짜릿했지만 지칠 줄 모르는 시후를 그만 재우고 싶었다. 시후는 수인을 끌어안고 토닥거렸다. 수인을 안고 있는 지금, 이 행복이 영원할 것 같았다. 

***

시후는 자기를 찾아왔다는 낯선 남자를 휴게실에서 만났다. 훤칠한 키에 햇빛 한 줌 보지 못한 파리한 얼굴이 딱 봐도 묘한 매력이 넘쳤다.

“남승우 씨?”

“안녕하세요.”

선뜻 악수를 청하는 승우의 손을 잡지 않았다. 시후는 가벼운 목례로 인사를 대신하고 자리를 권했다.

“저를 왜 보자고 했습니까?”

“실제로 뵈니까 이해가 갑니다. 도희가 집착하는 이유.”

뜬금없이 찾아와 뜬금없는 말로 시작하는 승우를 시후가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았다. 그에 대한 정보가 짧았기에 이 만남을 원하는 이유부터가 궁금했다.

“이도희가 보냈습니까?”

“아니요. 제가 스스로 왔습니다. 저는 도희 반주자예요. 도희와 10년 넘게 작업을 같이 했어요.”

그러고 보니 파리한 얼굴 하며 예술가 느낌이 물씬 나는 묘한 매력의 사내였다. 그러나 시후를 찾아온 이유를 빨리 내놓지 않았기에 시후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갔다.

“저 근무 중에 나온 겁니다. 본론만 간단히 들었으면 합니다.”

“네. 죄송합니다. 제가 이렇게 현 선생님 찾아온 이유는, 도희와 결혼을 해주셨으면 해서입니다.”

또 그 이야기라면 진절머리가 나는 데다 이번엔 생면부지의 남자로부터 듣게 되니 기분이 매우 언짢아졌다. 예의를 차려 말하기도 싫어진 시후가 예리하게 받아쳤다.

“심부름꾼입니까? 대체 뭡니까?”

“저는 도희가 너무 힘들어하는 게 안쓰러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도희가 힘든 게 결혼 때문이라면 현 선생님밖에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시후는 입이 떡 벌어졌다. 대체 이 남자의 정체를 뭐라고 이해하면 좋을까.

“지금 나더러 이도희와 결혼을 해주라 그 말을 하는 겁니까?”

“도희가 원하는 건 현시후 선생과의 결혼이니까요.”

오마이갓. 시후는 현기증이 몰려왔다. 처음 보는 남자의 입에서 나온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도희는 깊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녀가 위태해서 볼 수가 없어요. 그녀를 위해서 결혼해줄 수 없겠습니까?”

애절한 눈빛으로 변한 승우는 시후를 바라보았다. 시후는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얼굴은 아마도 제 맘대로 붉으락푸르락할 것 같았다.

“남승우 씨. 당신 정체가 뭔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도희라면 치가 떨립니다. 그냥 내 인생에 이름 석 자도 올리고 싶지 않은데 어떡할까요?”

승우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이 남자가 도희를 언급할 때마다 미세하게 떨고 있음이 느껴졌다. 소중한 대상을 말하듯 남자의 태도가 그랬다.

“이도희 좋아합니까?”

지금 사랑을 하고 있는 시후는 그 모습이 단번에 보였다. 시후도 그런 자신에 놀랐지만 지금은 이 남자와의 대화가 우선이었다. 

머뭇거리는 남자의 표정만으로도 충분한 답을 들은 것 같았다. 시후는 고개를 내저었다. 허리를 굽혀 두 손을 무릎에 대고 숙였던 고개를 다시 들어 승우를 응시했다.

“이봐요. 남승우 씨. 당신 남자 아닙니까?”

“예?”

당황하는 눈빛만 보아도 승우가 얼마나 마음 여린 사람임을 알 것 같았다. 그런 남자가 이곳까지 시후를 찾아온 이유, 도희에 대한 깊은 사랑 말고는 설명이 되질 않았다.

“잘 들어요. 내 여자다 싶으면 잡아요. 놓치고 후회하기에는 우리 인생이 길지 않습니다. 나도 이 깨달음을 겨우 얼마 전에 깨우쳤지만 나는 내 인생 다 걸어도 아깝지 않은 여자를 잡았죠.”

“현 선생님.”

승우는 자신이 이곳에 찾아온 이유를 피력하려 했다. 그러나 시후는 그 부탁 들어줄 수 없었고, 이런 부탁 따위 하러 온 승우를 한 대 치고 싶을 만큼 답답했다.

“사랑하는 여자를 다른 남자에게 부탁하러 올 용기는 있었습니까?”

승우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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