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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을 책임져 (62)화 (62/88)

62화

시후는 콧노래를 부르며 피자 다섯 박스를 한 손바닥 위에 올리고 응급실 안으로 들어섰다.

“어머. 현 과장님.”

“마침 응급실에 환자가 없네요?”

응급실 간호사가 시후의 손에 들린 피자를 보며 반가워했다. 

“야식 맛있게 드십시오.”

다들 오늘 당직이 수인이기에 시후가 들렸다는 걸 눈치로 다 알았다. 그러면서도 출출하던 차에 피자는 꽤 반가운 야식이었다. 시후는 차에서 또 한 판을 찾아 들고 당직실로 향했다. 음악을 틀어 놓고 뭔가를 하는 게 분명한데 시후는 기분이 좋아서 들어서기도 전에 웃음이 나왔다. 괜히 놀랄까 봐 노크를 야무지게 했다.

똑똑똑!

“네!”

당직실에 누군가 찾아오는 일은 별로 없었다. 필요하면 전화로 연락을 했고, 거의 복도 끝방이라 지나가는 사람도 거의 없는 그런 곳이었다. 

좀 당황하면서 놀란 수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후는 그 표정이 또 얼마나 가슴 설레게 만들지 기대를 하며 문을 열었다.

“짜잔~”

“진짜 피자 사 온 거예요?”

“사 온다고 했잖아.”

피자는 거의 집어 던지듯 테이블에 올리고 시후가 수인을 확 끌어당겨 안았다. 수인도 기대하는 눈빛으로 시후를 올려다보기에 시후의 심장은 미친 듯이 심박동수를 올려댔다.

“근무 중에 이러면 곤란한데.”

말은 곤란하다면서 고개를 더 위로 드는 건 또 뭐람. 자신에게 이리 잘 맞춰주는 수인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지그시 입술을 내려 그녀의 입술 전체를 덮어버렸다. 쪼옥 쪼옥, 당직실에 울려 퍼지는 야릇하고 설레는 소리는 끝없이 이어졌다. 

“안 돼~”

어느새 자신의 상의 안으로 쏙 들어온 시후의 손을 수인이 움켜잡았다.

“왜? 여긴 아무도 안 와. 알잖아.”

“허허! 진단서 가져오랬죠?”

째려보는 눈도 어찌 이리 예쁠까. 눈에 콩깍지가 제대로 씌워진 시후였기에 뭘 해도 그냥 좋았다. 그리곤 다시 은근슬쩍 밀어붙였다. 

“다 나았어. 진짜야.”

“떽! 은근슬쩍 이러기 없다고 분명 약속했는데?”

그 키스 한번 받아보겠다고 내밀었던 새끼손가락을 비틀고 싶은 심정이었다. 붙잡힌 손을 뿌리칠 수는 있었지만 시후는 심술 난 아이처럼 손을 내렸다.

“만지는 것도 안 돼?”

“안 돼요.”

수인이 치켜 올라간 옷을 내리고 아예 카디건을 챙겨 입었다. 시후는 카디건 끝자락을 잡고 나풀거리며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만지고 싶어. 너무 좋단 말이야. 이것만 다시 계약하자. 응?”

기다랗고 주름 하나 없는 피아노 손가락이라며 자랑하던 검지를 들어 수인의 가슴을 슬쩍 쿡 눌렀다.

“안 돼요!”

시무룩한 표정을 싹 무시하고 수인은 피자 포장을 풀어내었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걸 보니 따뜻할 때 먹이고 싶어 얼마나 달려왔을지 눈에 선했다.

“피자 먹어요.”

“치!”

덩치는 산만한 남자가 삐진 아이같이 입에서 무심코 나온 외마디에 수인은 깔깔 웃었다.

“나도 이제 망설이고 싶지 않아요. 다 큰 어른이고 서른도 넘었는데 하고 싶을 때 마음껏 할 자유를 누리고 싶다고요.”

“말하고 행동이 다르잖아.”

여전히 시무룩한 표정으로 또 얌전하게 수인 옆에 기대앉는 시후였다. 수인은 웃음이 나오는 걸 입으로 가리며 피자 한쪽을 권했다.

“피자가 급한 게 아니라니까!”

“허허! 진단서 떼 오랬죠? 정확하게 OS 쌤 도장 꽉 찍힌 걸로. 응?”

“아. 나!”

시후는 포효하고 싶은 울대를 억지로 참아가며 고개를 천장으로 치켜들었다. 좀 전 수인의 가슴에 올렸던 그 손바닥에 말랑한 감촉이 아직 살아서 시후를 괴롭혔다. 그런 손 위에 수인은 피자를 올려놓았다.

“안 먹어!”

“맛있는데.”

삐진 시후를 놀리듯 수인은 무척이나 맛있게 피자를 물어뜯었다. 달라져도 너무 달라진 그였지만 수인은 지금의 시후가 더 좋은 건 두말하면 잔소리였다. 이렇게 평온하고 따뜻한 연애를 하게 될 줄이야 어찌 알았을까. 인생 길다는 어른들의 말이 하나 틀린 것 같지 않았다.

그렇게 참고 또 참아서 몸 안에 사리가 한 가마니는 생긴 것 같은 시후가 비장한 미소를 지었다. 

“하하하. 하하하.”

그리곤 재킷 안주머니에 보물인 듯 고이 접어 넣었다. 이제 곧 퇴근, 담당 간호사는 피식 피식 웃어대는 시후를 힐끔거렸다. 대놓고 연애를 하더니 사람이 달라져도 너무 달라졌지만 지금 저 모습은 필시 바보 같기만 했다.

“뭐 좋은 일 있으세요?”

“암요. 좋다마다요. 근데 요 근처에 금은방 있습니까?”

뜬금없이 금은방이라니요. 요새 누가 그런 단어를 쓴답니까. 담당 간호사는 저도 모르게 비웃음 같은 웃음이 나와 버려 미안한 얼굴로 입을 틀어막았다.

“읍내에 하나 있기는 해요. 아주 클래식하긴 한데 있긴 있어요.”

“아. 그렇군요. 그럼 전 퇴근합니다.”

웬일인지 수인의 진료실을 염탐한다거나 기웃거리지 않고 곧장 복도를 지나쳐 로비로 가버렸다. 수인의 담당 간호사가 의아해서 고개를 갸웃했다. 벌써 헤어진 건가? 

사내 커플은 매일 얼굴 보고 싶을 때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헤어지면 직장 전체가 흔들리니 그게 문제였다. 수인의 담당 간호사가 고개를 갸웃한 채 수인에게 걸어왔다.

“현 과장님. 혼자 퇴근하시는데요?”

“그래요? 뭐 그런가 보죠.”

수인의 반응 또한 시큰둥하기에 간호사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

“과장님. 그럼 내일 뵐게요.”

“네. 수고하셨어요.”

억지로 웃어 보이며 인사를 하는 거 같아 간호사는 짠한 표정으로 수인을 보았다. 그렇지만 수인은 뭐 상관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챙겼다. 

갑자기 시후가 자기 집으로 초대를 한다며 수선을 떨어대기에 장이라도 보러 먼저 갔다고 생각했다. 그래 뭐가 됐든 초대라니까 준비할 시간을 주고 싶어서 수인은 천천히 움직이기로 했다.

수인이 뭉그적거리며 사택 주차장으로 들어서는데 전화가 왔다.

- 수인아. 퇴근했어?

아버지 김정수 원장이었다. 언제 들어도 반가운 아버지 목소리였지만 요새 수인은 아버지에게 큰 힘이 되어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었다.

“아버지. 안 그래도 전화하려고 했어요.”

- 어. 그렇구나.

수인은 차를 주차하고 연결된 블루투스를 끈 채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제가 알아보니까, 저 신용대출 3억을 할 수 있대요. 그거 일단 받기로 했어요. 오빠도 대출 받을 수 있다고 해서요. 저희 합하면 7억 정도 구할수 있겠어요. 그걸로 인근에 다른 건물 찾아보면 되지 않을까요?”

아버지가 굉장히 미안해하는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아서 수인은 조심스러웠다. 그런데 돌아오는 김정수 원장의 목소리는 꽤 밝았다.

- 수인아. 대출 안 받아도 돼. 새 건물주가 영구적으로 사용해도 된다고 그리 연락이 왔구나.

“네? 영구적으로요?”

듣고도 믿을 수 없었다. 아무리 허름한 건물이라 해도 서울 시내 한복판 꽤 비싼 동네였기에 자고 나면 땅값이 올랐다. 그런 곳의 건물을 영구적으로 사용해도 된다니 정말 믿을 수 없었다. 

- 그래. 내가 너무 기뻐서 알려주려고 전화했다.

“새 주인 만나 보셨어요?”

고마운 일이기는 하나 아버지가 워낙 세상 물정에 어두우니 수인은 걱정이 되었다.

- 아니, 다음 달에 계약서 다시 쓰자고 했다는 말만 중개인이 했어.

“고마운 사람이네요. 정말.”

- 그래. 고맙지. 어디 이게 쉬운 일이냐 말이지.

건물 임대 하나에도 이게 쉬운 일이냐며 치켜세우는 양반이 자신은 빈털터리가 되도록 자선의원에 모든 걸 다 쏟아부었다. 그러고도 늘 더하지 못해 미안해하는 사람이 아버지 김정수 원장이었다. 그렇게 밝은 목소리로 아버지와 대화를 할 수 있어서, 그리고 대출을 받지 않아도 되었기에 수인은 오늘 큰 선물을 받은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그 사이 시후의 자동차가 사택 주차장으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무언가 장을 봤는지 잔뜩 물건을 차에서 내리기에 수인이 뛰어갔다.

“오빠~”

“우리 예쁜이. 뭐 했어?”

느끼하고 적응이 안 되긴 했지만 수인은 일단 오늘 기분이 좋아서 활짝 웃었다. 얼른 아버지와의 통화를 알려주고 싶어 수인이 말했다.

“자선의원이요. 안 옮겨도 된대요. 새 주인이 계속 쓰라고 했대요.”

“그래? 잘됐다.”

시후는 아주 편안한 얼굴을 하며 방긋 웃었다. 수인은 시후가 사 온 것들을 보며 그냥 따라 웃었다. 시후는 아주 자연스럽게 수인을 데리고 사택으로 향했다.

“얼른 들어가자. 저녁은 가볍게 치킨 먹자.”

“치킨이요?”

초대라고 하기에 꽤 근사한 무언가 준비할 거라 예상했는데 좀 기운이 스르륵 빠졌다. 하지만 뭘 먹는 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오늘 병원의 응급실 당직도, 콜도 없는 자유로운 저녁 시간, 사랑하는 이와 함께가 중요했다. 수인은 시후를 따라 201호에 들어섰다. 

“일단, 샤워 먼저 해.”

“왜? 왜 또?”

강하게 거부하는 수인을 향해 시후가 치킨과 과일을 들어 보였다. 

“맥주는 없어요?”

“너 취하면 내가 힘들어서 안 돼. 씻자 하면 도망가고, 양치하자 하면 물고, 아. 안 돼. 진짜 힘들어서 더는 못해.”

“치. 나는 북극곰만한 남자도 거뜬하게 씻기고 재웠는데 너무해!”

왕 부장과 둘이 시작했던 술자리에서 시후가 너무 술에 취해 수인의 집 앞에 쓰러져 있던 날 이야기였다. 얼마나 진땀을 흘리며 시후를 수발들어줬는데, 그에 비해 작은 토끼인형만한 자신이 뭘 힘들다며 저리 타박을 하는지. 입을 삐죽거리면서도 수인은 시후의 의견을 받아들여 제집에 올라가서 샤워를 끝내고 편한 옷을 갈아입고 내려왔다.

어느새 치킨과 과일을 다 차려 놓은 시후는 젖은 머리를 수건에 털며 나왔다.

“으~ 향긋한 냄새.”

수인은 무심결에 말해 놓고 쿡, 하고 헛기침을 해버렸다. 그녀는 친오빠도 있고, 의대 동기들과 몇 날 며칠 밤샘을 하며 공부한 적이 많기에 남자들에게서 얼마나 이상한 냄새가 나는지 잘 알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시후는 그런 냄새조차 없었다. 그냥 바디워시 하나로 샤워를 하는 거 같은데 그에게선 항상 햇빛에 쨍하게 잘 마른 코튼향이 나곤 했다. 수인의 그 말을 못 들었던지 시후가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벌컥벌컥 들이켰다. 

“우리 이거 먹고 오늘은 영화 봐요.”

“영화 볼 시간 없을걸.”

시후가 잔에 탄산음료를 따라 주며 씩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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