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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을 책임져 (61)화 (61/88)

61화

수인의 근심 어린 얼굴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는 시후였다.

“말해봐. 나 이제 너의 고민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야.”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았다. 같은 대학 선후배, 같은 병원 수련, 같은 직장 내 동료, 이 연결 고리가 없었더라면 만나지 못했을 남자. 레벨이 다른 삶을 살고 있던 이 남자 현시후, 이런 고민이 어울리지 않는 남자를 괜히 끌어들이는 것 같아 망설여졌다.

“자선의원 건물주가 의원을 비워 달래요.”

“그 자리에서 진료한 지 20년인데 갑자기?”

김정수 원장이 원장에 취임하기 전부터 그 자리에 있던 의원이었다. 그리고 건물주는 매우 호의적인 사람이었다. 좋은 일에 동참하는 마음으로 다른 곳보다 월세도 비교적 저렴했기에 착한 건물주로도 소문이 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변덕을 부린다고 했다.

“그러게요. 갑자기 그러네요.”

지금 둘이 머리를 맞대어 고민한들 해결책이 나올 리 없지만 막상 시후에게 털어놓고 보니 마음이 조금 가벼워진 것 같았다. 그렇지만 같이 고민하는 얼굴인 게 싫었다.

“싫어요. 그런 얼굴.”

“응?”

수인은 고개를 들어 그의 입술에 살포시 도장을 찍듯 버드키스를 남겼다. 심각하던 시후의 얼굴에 미소가 옅게 번졌다. 그리곤 눈썹을 실룩거리며 장난을 걸어 보려고 시동을 걸었다.

“이게 다야?”

무척 기대하는 눈빛으로 계속 눈썹을 실룩거렸지만 돌아오는 말은 냉정하기만 했다.

“여긴 직장입니다. 현시후 과장님.”

“먼저 한 건 김 과장 아닌가?”

시후가 수인에게 몸을 기울여 왔다. 후닥닥 달아나려는 사람처럼 수인이 몸을 일으켰다.

“공과 사를 구분합시다. 안 그래도 모든 여직원들이 저한테 쌀쌀맞게 군다고요.”

“누가? 누가 우리 김수인한테 쌀쌀맞게 구는데? 누구야?”

이렇게 웃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수인은 현시후가 옆에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이리 든든할 줄 미처 몰랐다. 너무도 감동이었다. 이래서 연애를 하는구나,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

한편 시후는 진료실에 앉아 책상에 손가락을 타닥거리며 생각을 가다듬다가 마침내 결정을 하고는 그날 오후 진료가 끝나자마자 서울로 향했다. 오늘 응급실 당직이 수인이었기에 조용히 혼자 알아볼 일이 있었다. 그는 적당한 곳에 주차를 한 후 약속한 그 장소를 확인하였다. 그리고 결심한 듯 걸음을 옮겼다.

“어서 오세요~”

“좀 전에 전화드렸던 사람입니다.”

“아. 네.”

벽에 잔뜩 걸려 있는 지도들을 쭉 훑어보는 사이 중개사가 커피를 내왔다.

“믹스 커피 괜찮으시죠?”

“아. 네 감사합니다.”

중개사는 시후를 찬찬히 파악하듯 바라보더니 말을 시작했다. 

“문의하셨던 건물은 아주 오래된 건물이라 찾으시는 손님이 별로 없었어요.”

“그래요? 그럼 가격 조정이 가능하겠네요?”

시후가 빤히 쳐다보자 중개사는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 건물주가 여기 건물을 몇 개 가지고 계신 분이에요. 저희하고 임대 계약서도 많이 쓰시고.”

친분을 과시하는 중개사에게 시후는 싱긋 웃으며 훅하고 미끼를 던졌다.

“그럼 아직 계약 전이니까 승산은 있네요?”

“아무래도 먼저 계약하는 손님이 먼저니까요. 제가 한번 주인한테 연락을 취해 볼까요?”

중개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시후는 중개인이 펼쳐 놓은 노트를 쓱 쳐다보았다. 

“그런데 계약하려는 사람이 여자분 인가요?”

“네. 아주 젊은 여성분인데 부자이신 거 같더라고요. 잠깐 통화 좀 하겠습니다.”

중개사가 자선의원 건물주와 통화를 하는 사이 시후는 제가 원하는 정보를 딱 확인해 버렸다. 일이 이렇게 돌아가면 절대 안 되었다. 

시후는 끓어오르는 화를 삭이며 중개인이 전화를 끝내기를 기다렸다. 주인과 이야기가 잘 되었는지 밝은 표정의 중개인이 빨리 소식을 알려주고 싶어 안달이 난 것 같았다.

“아직 가계약도 안 했다네요. 일단 건물 둘러보시겠어요?”

“아니요. 건물에 대해서는 잘 압니다. 그럼 일단 제가 먼저 계약을 하겠습니다. 바로 계좌로 선입금하면 됩니까?”

시후의 말에 중개인은 화들짝 놀라며 당황했다. 노트를 뒤적거리며 횡설수설하더니 정신이 좀 차려지는지 시후에게 물었다.

“정말 계약 하신다고요? 주인이 시세보다 싸게는 안 된대요. 왜냐면 계약하고 싶다던 여자분이 부르는 대로 주겠다고 했대요.”

“그래요? 그쪽 조건은 뭐였답니까?”

시후는 예상하는 바가 들어맞지 않기를 바라며 물었다. 중개인은 메모했던 부분을 찾아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말을 이었다.

“음. 아. 그러니까. 지금 자선의원이라고 좀 어려운 사람들 많이 오는 의원이 그 건물에 있어요. 잘 아신다고 하니 무슨 말씀인지 아실 것 같은데.”

“네. 잘 압니다. 그래서요?”

중개인은 시후가 그 건물에 대해 잘 안다고 하니 마음이 놓이는지 다시 말을 이었다.

“그 자선의원 나가는 조건으로 매입한다고 했다네요.”

“아. 그렇구나. 그럼 저는 그 조건 없이 그냥 매입한다고 전해주시겠어요?”

시후가 딱 부러지게 말을 해버리는 바람에 어안이 벙벙한 중개인이 잠시 말문을 닫은 채 멍했다. 그리곤 다시 정신을 차리고 말을 이었다.

“그 건물이 사실 문제가 많아요. 저는 중개인으로서 양심적인 거래를 주선하기 때문에 직접 보시고 결정하는 게 어떠실지.”

“괜찮습니다. 충분히 그 건물에 대해 잘 압니다. 그러니 중개 책임 묻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는 시후가 중개사 사무실을 나왔다. 그리고 이제 찾아갈 곳이 또 한군데 남아있었다.

시후는 어느 휘황찬란한 저택 앞에 차를 세웠다. 그리곤 통화 버튼을 눌렀다. 몇 번 울리지 않고 바로 받는 전화, 이도희였다.

“웬일이야? 친히 전화를 다 주고?”

“집이면 나와. 집 앞에 있으니까.”

최대한 자제한 목소리로 말했고, 도희는 의아했지만 시후가 집 앞에 자신을 만나려고 온건 처음 있는 일이라 궁금했다. 나온다고 대답을 하고도 1시간이 넘어가는 것 같았다. 시후는 부글거리며 화가 치솟는 걸 수인과 통화를 하며 달래고 있었다.

“내가 야식 배달 간다니까. 피자 콜?”

- 아. 싫어요. 안 그래도 나 놀림당하고 있단 말이에요.

“아니 누가 자꾸 우리 수인이를 놀리고 괴롭히냐니까? 말을 해! 혼내주게.”

- 내가 인기 많은 남자랑 사귀는 게 죄지 뭐.

말할 때 입 모양이 어떨지도 다 떠올라서 시후는 피식피식 웃었다. 

“한 9시쯤 갈게.”

- 안 와도 된다니까요. 왜 그래요~

“아. 싫어. 내가 뭐 다른 사람 먹이고 싶어서 그런 줄 알아? 너 한 쪽 먹이고 싶어서 그런 거지. 암튼 나 말 안 들을 거니까 그런줄 알아.”

- 참 고집도 세다.

“나 고집 쎈 거 몰랐어? 다 내 맘대로 할 거야.”

연애에 푹 빠져 있는 사람들은 그게 유치한 줄을 모르겠지만 대화를 하는 것만으로도 둘은 행복한 일이었다. 그 행복에 빠져 있는데, 드디어 이도희가 모습을 드러냈다. 

“수인아. 일해. 나 보고 싶어도 울지 말고.”

- 아잉~ 뭐야.

“사랑한다.”

도희가 눈앞에까지 와서 시후의 차를 노려보고 서 있는데 시후는 수인에게 전화기 뽀뽀까지 말끔하게 하고 전화를 끊었다. 

도희가 인상을 있는 대로 쓰고 시후의 차에 타려고 문고리를 잡았다. 시후는 교통사고 이후 반파된 차를 폐차하고 얼마 전에 뽑은 새 차이기에 수인 말고는 아무도 태우고 싶지 않았다. 엉뚱할 수도 있지만 시후는 차에서 내렸다.

“뭐야? 왜 내려?”

“내 차를 네가 왜 타?”

그 말에 도희의 눈에 불꽃이 일었다. 세상천지 도희를 이리 막 대하는 남자, 아니 여자 남자 통틀어 이제껏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아. 뭐야?”

“됐고. 너한테 경고하러 왔다.”

시후의 말에 도희는 약이 슬슬 올라서 입꼬리 한쪽이 벌어져 올라갔다. 

“이 오빠 미쳤구나? 지금 넌 나한테 무릎 꿇고 빌어도 시원찮아. 알아?”

“내가? 내가 왜 너한테 비는데? 그것도 무릎을 왜 꿇고? 너 뭐 막장드라마 중독이냐? 아님 뭐 망상증 있어?”

도희가 열 받아 하는 모습을 부추기는 사람처럼 시후의 날선 말투는 이어졌다. 도희는 입술을 짓이기며 시후에게 다가섰다. 그래봤자 눈 하나 깜짝할 시후가 아니었지만 도희는 여차하면 뺨이라도 한 대 갈기고 싶었다.

“네가 뭔데 나한테 막말해? 잘못한 건 너야!”

“하. 이도희. 너 정말 구제불능인 거냐? 내가 네 손이라도 잡았냐? 어? 내가 뭘 잘못한 건지 말해볼래?”

시후는 도저히 이렇게 자신에게 집착하는 도희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집안에서 결정한 일이라 해도 상대방이 아니라고 선언한 마당이고, 자신에게 사랑하는 여자가 따로 있다는 걸 인지한 이상 이렇게 찌질하게 굴면 본인만 더 아픈걸 모르는 걸까. 

“우리 결혼하기로 한 게 20년 전부터야. 이럴 수는 없어. 나한테 이럴 수는 없다고!”

“대체 너.”

시후는 가슴이 답답하여 말문이 막혔다. 이 정도면 문제가 있어도 단단히 있는 거 같았다. 하지만 더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시후는 끓어오르는 화를 눌러 내리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만하자. 더는 서로 얼굴 볼일 없었으면 한다. 부모님들은 알아서 하시겠지. 그리고 이도희.”

시후는 또 한 번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오늘 이곳까지 왔던 이유는 이렇게 말싸움을 하고 싶어서도 아니고, 한숨을 가슴 터지게 하고 싶어서도 아니었다. 

“너 경고하는데, 자선의원 건들이지 마라. 만약 분풀이가 필요하다면 나한테 직접 해. 알겠어? 안 그럼 너 구린 거 다 털어서 언론에 다 까발려 버릴 테니까. 조심해.”

“뭐라고? 야! 현시후! 이 미친놈아! 너 지금 나 협박하는 거야?”

“경고라니까. 넌 말귀도 참 못 알아듣는구나. 하. 책 좀 읽어라 책!”

자선의원에 못된 짓을 하려던 것에 비해선 양호하다 생각을 하며 시후는 돌아섰다. 돌아서는 시후에게 뾰족한 구두가 하나 날아들었다. 어깨쯤에 부딪히며 떨어지는 구두를 보고 시후는 어이가 없었다. 

시후는 화를 낼까 잠시 생각하다 구두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이도희에게 다가갔다. 흠칫 놀라며 도희가 한쪽 구두만 신은 채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시후는 씩 웃었다. 

그 웃음이 도희에게 약을 잔뜩 올리는 그런 웃음이었고, 이내 팔에 온 힘을 쏟아 구두를 마치 야구공 던지듯 저 멀리 보이는 산을 향해 던져버렸다.

“야! 지금 뭐 하는 거야?”

“치료비는 이걸로 퉁치자.”

시후는 어깨를 툭툭 털어내고는 차에 올라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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