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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을 책임져 (60)화 (60/88)

60화

시후의 말에 많이 놀란 표정의 희윤이 수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와. 현시후 선배 완전 변했네. 남이야 결혼을 하던, 말던 하던 사람이?”

“변하긴 했어.”

수인은 피식 웃었다. 누구보다 잘 아는 내용이었다. 시후라는 남자가 이리도 결혼에 관심이 있는 줄, 그리고 이리도 감정에 솔직한 남자인 줄 몰랐기에 수인도 요즘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많이 변했다. 대체 너 현시후 선배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러게. 나도 그게 궁금해.”

대체 수인이 뭘 했기에 여자 보길 돌멩이같이 하던 남자가 수인만 보면 사족을 못 쓰고, 이제는 팔불출같이 수인이 닮은 아이 갖고 싶다고 서슴없이 이야기하는지, 참 신기한 일이었다. 

“보기보다 김수인 숨은 매력이 쩔었나?”

“내가 좀 매력 있긴 하지.”

수인은 말해 놓고 민망해서 술잔을 훅 털어 넣었다. 희윤도 송충이 씹은 얼굴을 하고는 피식 웃었다. 

“거봐. 내가 코치하나 기가 막히게 했지. 인정?”

“그래. 인정. 그날 밤. 마법 같은 밤이었지.”

두 여자는 추억에 아련하게 잠기며 대화 중이었는데,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남자 둘은 수상한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얼핏 보아서는 아주 진지하기가 의학 논문 토론장 같았다.

“진짜 그렇게 생각하냐?”

“그럼. 우리 누나 이야기 했잖아. 우리 아버지 완전 청학동 훈장님 스타일인 거 알지? 그런 양반도 손자 앞에서는 그냥 솜사탕이라니까.”

과연 그 모습을 현진권에게서 찾을 수 있을까. 시후는 고민이 되었지만 일단 그 방법이 아주 흡족하게 마음에 들기는 했다. 수인이 허락만 해준다면야 얼마든지 도전해 보고 싶은 방법이니 두 말 하면 뭐할까. 

“다른 방법보다 직방 효과가 있다 이거지?”

“아. 내가 누구냐. 이건 우리 누나가 완벽한 증거라니까.”

재건은 제 누나의 사생활 따위는 보호해 주고 싶지 않은지 아주 탈탈 털어낼 기세였고, 시후는 아주 마음에 드는 방법이라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열심히 해봐.”

“그래. 고맙다.”

도대체 두 남자는 뭘 격려하고 뭘 또 고맙다는 건지 도무지 남자들의 세계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어쨌든 시후는 수인의 특명으로 사이다만 마셨고, 나머지 세 사람은 모처럼 즐겁고 기분 좋게 취해 있었다. 시후가 운전기사를 자처하고 술 취한 셋을 이끌고 사택에 도착했다. 삐딱거리며 걷는 재건에게 슬그머니 지시를 내렸다.

“재건아. 희윤이 데리고 이리로 들어가.”

시후가 술에 취해 휘청거리는 친구 부부를 친절하게 제 사택 201호에 밀어 넣었다. 

“어머. 왜 그래요? 희윤이는 나랑 잘 건데?”

술에 취해 눈을 끔뻑거리며 말하는 수인의 입을 손바닥으로 막아섰다. 1층에는 무려 딱따구리에 촉새 부부가 귀를 쫑긋 세우고 살고 있으니 항상 조심해야 했다. 

“쉿. 왜 복도에서 떠들고 그래? 어서 올라가자.”

얼렁뚱땅 그러나 아주 의도적이며 치밀하게 시후는 교통정리를 해버렸다. 재건과 희윤 부부는 제 사택에, 시후와 수인은 수인의 사택으로 배정이 끝나버렸다.

시후에게 부축을 받으며 301호에 들어선 수인은 연신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며 소파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수인아. 나 먼저 샤워한다. 그냥 자면 안 돼.”

“한 잔 더?”

수인은 윙크까지 해대며 손가락을 귀엽게 치켜들었다. 시후는 치켜든 수인의 손가락을 입에 앙 물었다.

“그만 마셔. 너 오늘 오버했어. 이 배 좀 봐. 안주 네가 다 먹었어.”

“응? 어디?”

배를 말하는데 또 수인은 가슴부터 느긋하고 야릇하게 쓸어내렸다. 시후는 벌써 식은땀이 온몸에 솟아나는 것 같았다. 

“넌 꼭 취하면 바스트인지 앱도맨인지 구분을 못하더라?”

“여기!”

꼭 손바닥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복부를 가리키지 않아도 배가 어디인지 잘 알았다. 볼록하니 귀여운 배를 쑥 내밀고 웃고 있는 수인은 치명적인 매력을 막 뿜어내고 있었다. 

“아. 몰라! 나 먼저 샤워하고 올 테니까. 딱 기다려. 잠들지 말고.”

시후는 얼른 먼저 샤워하고 나와서는 수인의 상태를 살폈다.

“수인아. 씻어.”

게슴츠레한 눈으로 수인이 시후를 올려다보았다. 편한 사람들과 즐거운 시간이다 보니 그동안 쌓였던 스트레스를 다 푼 듯했다. 그러나 술이 좀 과하기는 한 것 같았다.

“수인아.”

“아! 현시후다. 잘생긴 현시후!”

딱 알아보긴 했다. 과하게 안주를 흡입하기에 수인이 취한 걸 알았지만 평소보다 더 취해 보여서 시후는 걱정이 되었다. 

“수인아. 김수인. 일어날 수 있겠어?”

“아니~ 하하하. 현시후. 내 남자친구. 현시후다~”

귀여운 건 사실이었지만 난감해져 갔다. 덥다며 옷을 하나둘 벗어 버리는데, 오늘 시후는 술 취한 수인을 신사답게 재울 수 있을까. 아주 롤러코스터를 탄 것보다 더 울렁증이 밀려와서 시후는 갑자기 베란다로 뛰어나갔다. 

서늘한 밤공기를 허파에 가득 담지 않으면 오늘 사람이 아니게 될 것 같았다. 그리고 하필 둥근 만월이 덩실덩실 떠 있는 가을밤이었다. 시후는 긴 목을 빼서 만월을 바라보았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제발 짐승으로 변하지 않게 도와주소서! 

그리고 가슴 가득 신선한 공기를 빨아들였다. 시원한 공기가 도움이 되었던지 시후는 이내 이성적이며 도덕적인 사람으로 돌아왔다. 시후는 여자가 술 취했다면 잘 씻기고 양치 시켜 이불 꼭 덮어 재워주는 게 맞다고 부르짖는 도덕적인 싸나이였다. 

“수인아. 씻자. 응? 아. 미치겠네. 안 돼. 더 이상 벗지 마. 제발.”

참, 사람이란 간사하지. 언제는 벗어주면 고마울 것 같은데, 지금은 또 과하게 벗고 속 피부를 다 드러낸 수인을 보는 게 참으로 고통의 시간이었다. 

“이러지 마. 야, 인마!”

게다가 헐벗고 시후를 끌어안는 통에 시후의 자제심은 그야말로 목숨을 다해가고 있었다. 

“현시후~ 사랑해요.”

결정타까지 날리는 수인을 붙잡고 시후는 울고 싶었다. 이성은 잠시 잃고 싶지만 이젠 몸도 따라 주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시후는 절망스러웠다. 이놈의 갈비뼈는 왜 안 붙고 난리냐고. 이 절묘한 타이밍에. 시후는 속으로 애국가 4절까지를 몇 번이나 불렀는지 몰랐다. 

겨우 가슴 통증을 참아가며 수인을 씻기고 양치 시켜 침대에 데려다 놓았다. 문제는 헐벗은 수인에게 잠옷을 입히는 과정이었다. 시후의 속마음에서 수천 번의 갈등이 건기 때 산을 다 집어삼키는 산불처럼 번졌다. 

“아니야. 난 짐승이 아니라고.”

“흥~ 예뻐.”

도대체 누가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수인은 말간 얼굴로 예쁘게 웃었다. 

“아. 미치겠다. 김수인 넌 진짜 어메이징하다. 어메이징.”

시후는 간신히 수인의 잠옷을 입히고 이불을 목까지 끌어다 덮어줬다. 그리고 펄떡이는 심장을 억지로 눌러 내리며 긴 호흡을 내 쉬었다.

“자자. 자야 해. 수인아. 제발 자자.”

“흥~”

애교 섞인 비음에 시후의 심장은 이제 곧 멈출 것 같았다. 생리현상을 극도로 참으면 이상하게 몸이 경직되거나 비정상적으로 떨려온다는 체험을 아주 톡톡하게 겪고 있는 시후였다. 

“아. 죽을 것 같다. 자야 해. 수인아. 난 아직 사람이다. 사람!”

“오빠앙~”

홈런이었다. 절대로 왈가불가할 수 없는 명백한 만루 홈런. 시후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지금 이순간 입술에 피가 나더라도 깨물고 깨물 수밖에 없었다. 이 예쁜 입을 틀어막을 수도 없고, 틀어 막아보려고 입술에 입술을 댈 수도 없고, 정말 시후는 감각이 극도로 예민해져서 금방이라도 바스라질것 같았다.

“하! 치명적인 여자였어. 하! 김수인. 넌 진짜 내 인생 전부 바치게 만든다.”

그렇게 시험대에 오른 사람처럼 잠을 설친 시후가 새벽 동이 터오는 새로운 태양에 수인의 얼굴을 비춰보았다.

“왜 이렇게 예쁘냐. 자는 것도 예뻐 죽겠네.”

이제야 부들부들 떨며 참았던 긴장이 풀리는지 시후가 스르륵 잠이 들었다. 

***

수인은 아버지 김정수 원장의 전화를 받고 깊은 한숨이 삐져나왔다. 아버지의 고민이 얼마나 깊을지 느껴지기에 더 안타까운 마음이었다. 그런 수인이 생각에 잠겨 얼굴을 손으로 문지르고 있으니 시후는 간이 철렁 내려앉았다. 대장암 수술을 마치고 의사 휴게실에 뒤따라 들어온 시후는 수인의 다리를 주물러 주려 했던 그 즐거운 마음은 일단 접고 곁에 앉았다. 

“무슨 일 있어?”

“자선의원이요.”

수인은 스르륵 시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시후는 팔을 둘러 수인의 어깨를 감쌌다. 

“원장님 전화였어?”

통화를 하며 휴게실로 먼저 향하는 걸 본 터라 시후가 물었다. 수인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신데? 안 좋은 일이야?”

“그렇죠. 건물주가 나가달라고 했다네요. 그것도 3개월 안에.”

그녀가 내쉬는 한숨이 어깨를 감싸고 있는 시후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지난 주말에 시사채널에서 자선의원을 대놓고 비방하던 기선대학병원 이야기가 나왔었다. 

조악한 의료시설과 경험 부족한 의사들의 자원봉사로 말미암아 제때 적기 치료를 받지 못한 환자들이 속출한다며 더 이상 자선이라는 이름으로 의사의 명예를 더럽히지 말라는 아주 극단적인 메시지가 방송을 탔었다. 그 내용이 누구를 향하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원장님 힘드시겠네.”

“늘 힘드시죠. 아버지 선택이 의롭다는 건 인정하겠는데, 왜 혼자 그 길을 가셨는지 아직 나는 이해가 안 돼요.”

수인이 중학생이던 시절, 잘 나가던 기선대학병원의 간판 의사였던 아버지 김정수가 돌연 사표를 내고 자선의원에 원장직을 수락한 일이 아직도 수인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벌써 몇 대에 걸쳐 내려오는 역사가 꽤 깊은 의원이기는 했으나 평범한 진료보다 극심한 차별을 견뎌내야 하는 곳이었다. 왜 그런 힘든 길을 간다고 하셨을까. 수인은 정말 이유를 알고 싶었다. 

“원장님께서 진짜 의사의 길로 가시고 싶으셨던 거지.”

“나도 처음엔 그런 줄 알았어요. 그런데 이건 고행의 길이잖아요. 빚쟁이처럼 빚에 허덕이고, 온갖 의사협회에서 공격의 대상이고, 점점 늘어나는 환자는 감당이 안 되고.”

수인은 머리가 아파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버렸다. 아버지를 누구보다 존경했다. 수인과 친오빠 수열은 그런 아버지를 보고 자라왔기에 행운이라고 생각하며 각자가 할 수 있는 의사의 길로 자발적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현실을 살아가다 보니 아버지가 참으로 바보 같을 때가 많았다. 월급 한 푼 받지 못하고 일하는, 허울만 좋은 원장 자리를 왜 저리 오래 버티고 있는지 안쓰러워서 미칠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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